지상 전람회 첫째날
두 해 전 화가 이상열의 그림을 마주했을 때 그는 꽃의 화가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때 화폭 속에서 나의 시선을 잡아끈 꽃 중에 「개나리」가 있었다. 이상열의 개나리는 봄에 일찍 피어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작고 여린 노란 꽃이 아니었다. 그의 개나리는 샘처럼 펑펑 솟아나고 있었다. 나는 개나리가 샘처럼 솟아나는 힘찬 꽃이란 건 그때 처음 알았다. 하긴 그렇게 힘차게 솟지 않고는 아직도 어른 거리고 있는 겨울 추위의 끝자락을 깨끗이 걷어내고 그렇게 일찍 봄을 맞을 순 없었으리라.
「개나리」, 2006
「개나리 II」, 2007
지난 해 다시 그의 그림 앞에 섰을 때 그 개나리는 이제 파도가 되어 있었다. 개나리는 노란 바다를 이루어 세상으로 거침없이 밀려들었다. 그때부터 개나리를 보면 나는 파도 소리의 환청을 듣곤 했다. 그때면 난 그 파도에 몸을 싣고 세상으로 쏴아 몰려나가고 싶었다. 꽃의 힘은 내게 전이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좀 무력해진다 싶을 땐 그의 개나리를 생각했다.
올해 만난 화가 이상열의 그림은 그가 이제 나무의 화가가 되었음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의 화폭 속엔 감나무와 배나무가 있었으며, 복숭아 나무와 사과나무가 있었다. 그는 왜 꽃에게 내주었던 자신의 화폭을 이제 나무에게 내주고 있는 것일까.
나무는 꽃의 몸이다. 꽃이나 과일, 혹은 잎은 나무의 표정이고 낯빛이다. 꽃의 화가였을 때 이상열이 나무의 표정과 낯빛을 살피고, 대개 연약하게 다가오는 그 표정을 힘의 표정으로 살려내고 그려냈다면, 나무의 화가가 되었을 때 그는 나무의 몸을 살핀다. 이상열의 초점이 꽃에서 나무로 내려갔다는 것은 그러고 보면 표정과 낯빛을 살피던 시선이, 그 표정과 낯빛을 낳은 몸으로 내려갔다는 의미이다. 몸은 우리의 현실이다. 힘의 표정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현실을 함께 살피지 않으면 표정은 얼굴에 그린 덧칠이 되고 만다. 표정을 살피는 한편으로 몸에 시선을 주어야 하는 연유가 그곳에 있다. 몸으로 가면서 꽃을 살피던 시선은 한층 깊어지고 현실의 지층에 단단히 발을 내린다.
말을 나누고 대화를 하려면 표정에 눈을 맞추는 것이 첫순서이다. 그러니 누구나 처음엔 꽃에 눈을 맞추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말이 오고가다 마음의 나눔이 깊어지면 우리는 서로 껴안게 되고, 그 포옹의 자리엔 바로 몸이 있다. 그래서 꽃의 그림이 눈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그림이라면 나무의 그림은 세상에 대한 포옹의 그림이다.
두 해 전 이상열의 그림 속으로 초대받았을 때 그 길이 꽃들과 얘기나누며 노는 길이었다면 올해 나무들이 가득한 그의 화폭은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가끔 포옹을 나누는 길이었다. 그는 그렇게 꽃의 화가에서 나무의 화가로 길을 터놓고 있었다.
꽃이 핀 배나무
Oil on Canvas
53.0*41.0cm(10P)
2008
배꽃은 희다,
마치 온나무에 하얀 등을 주렁주렁 매단듯.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도 배꽃은 희다,
마치 나무 가득 흰빛을 채운 듯.
봄엔 배나무가 그 가지 끝에 흰 배꽃을 매달고 봄을 하얗게 밝힌다.
배나무가 배꽃으로 밝힌 길은 여름을 거쳐 가을로 이어지며,
또 겨울을 이겨내고 다시 봄으로 돌아오는 순환의 고리를 엮어낸다.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 배나무는
배꽃으로 하얗게 밝혀 길의 시작을 알리는 나무이다.
그래서 그의 「꽃이 핀 배나무」 아래 서면 언제나 길이 시작된다.
붉은 집이 보이는 배밭
Oil on Canvas
53.0*41.0cm(10P)
2007
시인 오규원은 그의 시 「그림과 나 2」에서
캔버스에 그림을 하나 담아 우리에게 내민다.
그 그림 속에 그는 “허공에 크고 붉은 해를 하나” 그리고
“산 귀퉁이에는 집을 하나 반쯤 숨겨 그”린다.
그는 “그 집에 들어가 창을 드르륵” 연다.
그러자 “지나가던 새 한 마리가”
그를 “빤히 쳐다보다” 간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화가 이상열의 그림 앞에 선다.
그림의 제목은 「붉은 집이 보이는 배밭」 이다.
그림 앞에 서 있던 나는 어느 덧 그림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림의 한 귀퉁이로 반쯤 몸을 숨긴 붉은 집으로 스윽 들어가고 있었다.
집은 넓은 창을 앞으로 두고 그 창에 하얀 배밭을 가득 채워놓고 있었다.
그의 그림 앞에 섰더니
배밭 너머 그림 속의 집으로 걸음할 수 있었다.
새봄 – 벚꽃
Oil on Canvas
62.5*53cm(15F)
2007
벚꽃은 아마 우리에겐
가장 익숙한 새봄의 꽃이 아닐까 싶다.
벚꽃이 피면 사람들은 진해로, 여의도의 윤중로로
새봄의 나들이를 나선다.
그때면 벚꽃은 희디흰 빛으로 치장을 하고 사람들을 맞는다.
그러나 이상열의 벚나무 앞에 서면
짙은 푸른색을 저 깊이 두고 보라빛이 화폭을 가득 채운다.
저 보라빛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겨울을 넘긴 벚나무가
대지 깊숙한 곳에서 푸른 물을 길어올려 목을 축이고
하얀 벚꽃으로 새봄을 열 때
그 희열과 함께 내뿜는 보라빛 호흡이다.
원래는 푸른 호흡이었으나
새봄의 희열이 섞이면 보라빛 호흡이 된다.
강이 보이는 복숭아밭
Oil on Canvas
162.0*112.0cm(100P)
2007
강은 참 이상하다.
강은 곁에 두면 우리의 시선을 그곳으로 끌고 가는 힘이 있다.
강이 보이면 그 강가의 복숭아밭에서도 복숭아 나무들이
모두 시선을 강으로 둔다.
난 복숭아 나무와 나란히 서서 강을 바라본다.
강가에선 왜 복숭아 나무도 강으로 시선을 두는 것일까.
그건 강이 복숭아 나무의 시선을 싣고 아래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강가의 복숭아 나무는 알고 있다.
강으로 시선을 두면 강이 그 시선을 싣고 아래로 흘러간다는 것을.
우리는 강가에선 가만히 앉아서도 흘러갈 수 있으며,
강가의 복숭아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언덕 위의 복숭아 나무 – 과수원
Oil on Canvas
130.3*89.4cm(60P)
2007
강가와 달리 언덕에 서면
우리의 시선은 높이의 등에 엎혀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다.
언덕 위에선 복숭아 나무도 시선을 멀리둔다.
언덕 위에선 한자리에 붙박혀 살면서도
날개를 펴고 바람과 함께 멀리 날아갈 수 있다.
강과 언덕에서 복숭아 나무는
때로는 강과 함께 흘러가고,
때로는 날개를 펴고 멀리 날고 있었다.
복숭아 과수원
Oil on Canvas
53.0*45.5cm(10F)
2007
이상열의 「복숭아 과수원」에서 내 눈을 끌어당긴 것은
푸르게 뻗어나간 가지들이다.
왼쪽 위로 보이는 푸른 색채로 미루어
아마도 과수원의 위쪽으로 강이 있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그날따라 하늘이 강처럼 푸르렀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과수원의 복숭아 나무 가지는
강과 똑같은 색채로 물들어 있으며,
푸르게 가지를 뻗는다.
그러므로 이상열의 복숭아 나무에서 가지는 물의 길이다.
생명의 나무 – 복사꽃
Oil on Canvas
53.0*41.0cm(10P)
2007
복숭아 나무의 가지가 물의 길이라면
그럼 복사꽃은 그 물로 목을 축이고 피는 꽃이다.
그는 복사꽃이 피는 그 나무,
그러니까 복숭아 나무를 「생명의 나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나에겐 그게 생명감이 느껴지는 나무라는 뜻으로 읽힌다.
생명감이란 어떤 것일까.
혹 그것이 목이 말라 물을 한잔 들이켰을 때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시원한 물의 느낌과 같은 것은 아닐까.
이상열의 그림 속에선
가지가 물의 길로 퍼져나가고,
그 가지가 대지 깊은 곳에서 퍼올린 물로 목을 축인 복사꽃이
충만한 생명감으로 환하게 피어있었다.
나무의 주변으로 온통 강이 출렁 거렸다.
복사꽃의 생명감에 물들어 강이 보라빛을 띄고 있었다.
그의 그림 속, 이른 봄의 벚꽃에서 보았던 보라빛 호흡이 떠올랐다.
(2008 구상대전 이상열 도록의 해설)
**3일 동안 이어집니다.
**블로그에 그림 전시를 허용해주신 이상열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9 thoughts on “나무가 있는 풍경 – 이상열의 그림 세계 – 지상 전람회 첫째날”
다음주에 제 작업실로 초대해서
신작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연락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작업할 때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데 말만하고 기회를 잡질 못하는 군요. 다음 주에 뵐께요. 항상 봄을 선생님의 새로운 그림과 함께 여는 군요.
오늘 선생님 그림 전시는 오후 1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림보다 좋은 해설에 항시 감사한 마음입니다.
더욱 노력해서 좋은 그림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글을 모두 선생님 그림에서 얻은 걸요.
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계절에 인사동에서 처음 선생님 그림을 보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얼마나 흥분되고 좋았던지요.
아는 화가가 있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도록 해설을 강동원님께서 하셨다… 이건가요?
아님 강동원님께서 대서 하신건가요?
글을 읽어보니 이스트맨님 감상인듯 한데~~
이상열 선생님 저도 고맙습니다! 그림 잘 봤어요!!
도록의 해설을 제가 했어요.
그 유명한 강동원에게 이번에도 밀렸네.
전 김동원인디…
인건님이 매번 전인권에게 밀리더니… 저도 역시 ㅜㅜ
그러고 보면 서정적인 그림도 얼마든지 자연에 고립시키지 않고
우리의 바로 곁에 둘 수 있다는 얘기가 되지요.
그럼 그때의 예술 속에 있는 자연은 서정적 자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와 뜻을 함께 하며 깃발을 흔들어주는 지원군이 되구요.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예술가의 역량인 듯 싶어요.
고흐의 그림이 특히 그런 측면이 많은 것 같아요.
서정도 삶과 밀착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처음에 이상열 선생님의 개나리를 보고 많이 놀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문외한이지만 위의 그림은 그림 하나하나 마다 ‘참 좋다’라는 탄성이 올라 옵니다. 뭉툭한 붓질과 밝고 강한 색깔의 조화가 뭐랄까 생명력으로 꿈툴거린다고 할까요. 생명의 빛깔은 푸른색이 아닐까…
귀한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이상열 화백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동원님께서 고마움 전합니다.
자연에서 느끼는 생명감이 이상열 선생님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벚꽃에서 보라빛 호흡을 감지하긴 어려운 법인데 그걸 잡아내는 예술가의 감성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내일 올라오는 가을 배나무 그림들 보시면 더더욱 큰 매력을 느끼실 것 같아요.
전람회에 와 주셔서 고마워요.
내일도 기다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