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랬어.
예전에 그건 에프킬라라 불리었었지.
그건 사실 매우 솔직한 이름이었어.
살인자 F 정도라고 할 수 있으니까.
아마도 F는 아주 성능이 좋다거나
효과가 강력하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붙여졌을 거야.
에프라는 말이 아주 어감이 강하잖아.
이제 정리를 하자면
에프킬라는 코드명 F라는 이름의 살인자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
파리 모기, 하나 남김없이 싸그리 다 죽여드립니다라고
그 이름 하나만으로 호언하고 싶었던 욕망이 그 이름에서 만져져.
그러니 그건 살인 본능에 얼마나 충실한 이름이야.
예전의 그 에프킬라는 뿌리면 냄새도 났었어.
지금도 향이 나는 제품들이 있더군.
레몬향인지 뭔지를 첨가했다고 쓰여 있었어.
어쨌거나 시인 황지우는
1983년 문학과지성사에 나온 자신의 시집
(자그마치 26년전,
그러니까 20년하고도 6년전에 나온 시집이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정확히 28쪽에 실린
「에프킬라를 뿌리며」라는 시의 가장 마지막 구절에서
그 향기 속에 살기가 있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었지.
파리 여러분!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황지우, 「에프킬라를 뿌리며」의 마지막 구절
그렇게 말하면서 시는 마무리 되었지.
아니, 파리한테 알려준 건데 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고 하냐구?
글쎄,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취급되고 있는 건
여전히 똑같은 거 아냐?
아마 그때 시인이 그 살기어린 향기를 조심하라고 한 건
사실은 파리들에게 건넨 주의가 아니라
목숨을 파리 목숨같이 취급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건네준 말이었는지도 몰라.
그래 그때가 그랬지.
그때가 바로 살인 정권의 시대였지.
그때도 이 땅에 대통령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를 대통령이라 불러주지 않았어.
우리는 언제나 그를 살인마 전두환이라 불렀지.
그리고 그 밑에서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기면서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며 죽였던 또다른 살인자들이 있었어.
광주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고 칼에 찔려 죽었지.
종철이가 욕조에 눌려 생목숨을 잃고
한열이가 최루탄에 맞아 젊은 목숨을 잃었지.
한마디로 에프킬라의 시절, 살인 정권의 시절이었지.
이제 그런 세상은 가고 좋은 세상이 왔나 싶었는데
사실은 세상이 더 교묘해졌어.
에프킬라를 사러갔더니 에프킬라가 아니라 홈키파가 있더군.
분명 예전의 그 살인자인데 이제는 가정을 지켜준다는 거야.
이번에 난 향이 첨가되지 않은 “냄새없는” 제품을 골랐는데
그 홈키파는 내게 말하고 있었어.
“냄새없이 한방에!” 모기와 파리를 모두 죽여주겠노라고.
오, 예전의 에프킬라는 살기의 향내를 풍기면서 왔는데
이제는 그 살기를 감쪽같이 숨기면서 오는 시대야.
파리들아, 조심해.
예전에는 살인자의 이름으로 에프킬라가 왔지만
지금은 그 살인자들이
마치 가정을 지켜주는 파수꾼처럼 만면에 미소를 띠고 우리를 찾아와.
그리고는 냄새도 없이 들이닥쳐 파리 목숨을 없애버리지.
강을 살린다면서 강을 죽이고,
서민을 지켜주겠다면서 서민을 죽이지.
요즘은 아주 언론을 죽이려고 난리도 아니더군.
지금은 그런 시대야.
지켜주겠다면서 죽이는 시대.
하긴 사람들이 좀 이상하긴 했었어.
거대한 콘크리트에 묻혀 뻗뻗하게 굳어버린 사체가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청계천이 살아났다고 좋아했었지.
조심해.
이제는 사체를 생명체로 포장하는 기술까지 생겼어.
목숨이 파리 목숨 같은 사람들은 특히 조심해.
가정을 지켜준다는 홈키파의 시대를 믿지마.
가정을 지켜준다는 그 달콤한 속삭임 속에 살기가 들어있어.
강을 살리겠다는 그 말 속에 살기가 들어있어.
좌우지간 앞으로는 우리를 위해 뭘 지켜주겠다는 사람을 믿지마.
그 달콤한 속삭임의 뒤에 숨겨진 살기를 의심하라구.
지금은 지켜주겠다며 죽이는 시대, 바로 이명박의 시대야.
얘기를 하면서도 아주 뒷맛이 씁쓸해.
아득한 80년대의 시 한편이
이 시대를 말하는데 아직도 이렇게 유효하니 말이야.
(덧붙이는 말:
아, 오해는 하지 말아줘.
에프킬라랑 살인마 전두환은 아무 관계가 없어.
상품의 이름이 그렇다는 뜻이지 뭐.
물론 홈키파도 이명박이랑 아무 관계가 없어.)
6 thoughts on “에프킬라와 홈키파 — 황지우의 시 「에프킬라를 뿌리며」를 읽다가”
에프킬라는 냄새라도 나서 뿌렸는지 아닌지를 알기라도 하는데
홈키파는 냄새가 없어 언제 뿌린지도 모르게 죽어갑니다.
에프킬라와 홈키파라는 이름이 시대와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에프킬라 시대엔 킬러가 눈에 띄였지만
홈키파 시대는 대문만 나가도 킬러들의 세상입니다.
옛날엔 아군과 적이 구별이 되었는데
요즘은 도통 구별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경계가 무너진 세상같아요.
어제 저희 아이들하고 심오한 대화를 나누었어요. 아이들의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였지요. ‘엄마, 전두…두분가? 누구지? 사람 죽여서 대통령 된 아저씨..’
전두환 이라고 했더니 아이의 질문은 그거였어요.
‘전두환이 나쁘냐, 이명박이 나쁘냐?’
자기 생각에는 사람을 죽인 전두환이 부자되게 해준다고 사람들 꼬드기고 속이는 이명박보다 더 나쁜 거 같대요. 그래서 제가 첨엔 엄마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갈수록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하는 말은 거짓말 밖에 없고, 너무 거짓말하고 거짓행동으로 살다보니 거짓이 사람을 삼켜버린 것 같다고, 그래서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어렵게 말해줬습니다.
아, 댓글 쓰면서 또 분노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네요.
에프킬라랑 살인마 전두환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느껴지고,
홈키파는 더더욱 이명박과 상관이 없다고 느껴지는 정말 기가 막힌 글이십니다. ㅋ
분노를 꼭꼭 눌러 담아서 선거 때 심판의 한표로 일거에 쓸어버려야죠.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갑시다.
아, 시 한 구절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중의적 묵상의 대가시옵니다.^^
날카로운 듯 하면서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력이 압권입니다.
오늘은 신문보다 보니
제 후배의 컬럼이 하나 실렸더군요.
시국에 대한 한탄으로
보내는 나날이 한숨과 술잔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저도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 듯 싶어요.
술마시며 전의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