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사람들에게 시는 그냥 읽기의 대상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의 몫이고, 독자들은 그것을 읽으며 그 읽기의 즐거움을 자신들의 몫으로 삼는다. 실제로 시를 읽으며 시쓰기를 꿈꾸는 사람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쓰기는 자신들로부터 너무 먼 나라의 일로 여겨지곤 한다.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이 나돌기도 하지만 그 말은 시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무마시켜 주려는 위로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오히려 시는 종종 타고난 시인의 자질을 요구하는 듯 보이고, 그것은 무너뜨리기 어려운 전제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시를 가운데 두었을 때 쓰기와 읽기밖에 달리 아무 것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시를 사이에 두고 쓰기와 읽기로 엄격하게 구역을 나누어 시인과 독자로 각각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여행기의 경우엔 얘기가 좀 달라진다. 물론 이 경우에도 여행기를 읽으며 좋은 여행기를 써보겠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시를 읽으며 시쓰기를 꿈꾸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경우와 유사하다. 그러나 여행기를 읽으며 여행을 꿈꾸는 사람은 아주 흔하다. 우리는 읽는데 만족하지 않고 여행기 속의 그곳으로 직접 가보고 싶어한다. 아니, 여행기의 경우엔 읽기보다는 그곳으로의 직접적인 여행이 더욱 강조되곤 한다.
그렇다면 혹시 여행기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여행은 가능하듯이, 시쓰기는 어렵더라도 시의 나라로 떠나는 여행은 가능하지 않을까. 여행은 여행기를 쓰는 행위는 아니다. 또 여행은 여행기를 읽는 행위도 아니다. 여행은 여행기 쓰기와 여행기 읽기의 사이로 위치하는 아주 독특한 성격의 것이다. 쓰기도 읽기도 아닌 몸으로 겪는 나만의 체험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은 쓰기가 아니어서 글은 못되지만 몸에 새겨진 느낌과 기억의 글로 남는다. 시의 경우에도, 쓰기도 읽기도 아닌, 시의 나라로의 여행이라는 아주 독특한 경우가 있지 않을까.
원고를 하나 쓰기 위해 이 시집 저 시집을 읽어 가던 중에 여러 시집 가운데 하나로 이문재의 시집 『제국호텔』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 시집 속의 한 시에서 읽기가 아니라 시로의 여행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로의 여행이라니,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일단 떠나본다. 시로의 여행을.
남쪽 창문을 열어놓는다
일요일 오전이 한바탕 집 안으로 들어온다
아마도 시인은 집에 있었나 보다. 시간은 일요일 오전이었음이 분명하다. 시인의 집으로 여행을 떠날 필요는 없다. 또 그것은 불가능하기도 하리라. 남의 집을 어떻게 불쑥 쳐들어간다는 말인가. 그러나 시인의 집이 여행지이므로 우리는 그냥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을 여행지로 삼으면 된다. 나는 지금 내 방에 있고, 그러니 나에겐 내 방이 여행지이다. 내 방은 창이 북쪽으로 나 있다. 지금은 시간이 일요일 오후이다. 이를 모아 그대로 옮겨보면 여행지의 풍경은 이렇게 바뀐다.
북쪽 창문을 열어놓는다
8월의 일요일이
한껏 달아오른 오후의 뜨거움을 몰고 방 안으로 몰려든다
창밖은 뒷집이 코앞을 막고 있다
뒷집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그 집의 마당에 심어놓은 포도넝쿨이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내 방을 기웃거리며
그 푸른 고개짓으로 자신이 여전히 그곳에 있음을 내게 알린다
방충망의 중간쯤에선 이제 많이 이완된 촘촘한 거미줄을
가끔 바람이 지나가다 가볍게 들었다 놓는다
그때마다 거미줄이 출렁거린다
나는 창을 여는데 그치지 않고 창밖의 풍경을 자세하게 살폈다. 여행을 여행기에 맞출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다. 이것은 시읽기가 아니라 시로의 여행이기 때문에 그냥 자신이 떠난 여행에서 보이는대로 나름대로 보면 된다. 여행을 계속해보자.
게으르게 펼쳐놓은 경전은
내 몸 속으로 진입하지 않는다
시인은 아마도 무슨 책인가를 펼쳐놓고 읽고 있었는가 보다. 그런데 책이 눈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고 있었다. 난 경전이 아니라 시집을 펼쳐놓고 읽고 있었다. 시인과 달리 그 시집 속의 시 한 편은 내 몸속으로 빨려들어온 느낌이었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이문재의 시집 『제국호텔』 속에서
시 한 편이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
요 정도는 책 한권을 눈앞에 펼치는 것으로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는가. 여행을 떠날 때 우리들이 챙겨야할 여행 도구들이 있듯이 이것 또한 시로의 여행을 위해 우리들이 챙겨야할 여행 도구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다시 여행은 계속된다.
바흐의 무반주첼로조곡과
쇼팽의 무언가 사이
멀리서 춘설이 내린다는 소식을 접한다
시인은 음악을 듣고 있었다. 바흐와 쇼팽인 것을 보니 클래식이다. 라디오 방송일 수도 있다. 두 음악 사이에 방송 진행자가 눈소식을 전한 것일 수 있으니까. 라디오가 있다면 음악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면 된다. 그런데 나는 라디오를 거의 듣지 않는다. 나는 그냥 음악을 틀었다. 대신 클래식을 잘 모르는 나는 내가 아는 노래를 틀었다. 날씨 얘기를 곁들여야 겠기에 노래를 듣다가 어머니께 물어본다. 이렇게 더우면 꼭 비가 뒤따르던데 내일 비가 오는게 아닐까. 어머니는 말한다. 목요일까지는 비가 없다더라.
코어스의 Everybody Hurts와
체리필터의 Happy Day 사이
어머니가 목요일까지는 비가 없을 것이란 소식을 전한다
라디오도 없고, 딱히 어떻게 음악을 들을 수도 없는 처지라고 해도 방편은 있다. 그냥 아는 노래를 흥얼거리면 될 것이다. 날씨는 어떻게든 챙기는 수밖에 없다. 기상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 것도 독특한 여행 경험이 될 것이다.
3월 춘설은 습설
건장한 산맥과 늠름한 해안이
심호흡하는 바다와 함께 힘껏 젖는다
젖은 바다에서 봄이 상륙한다
대관령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던 봄은
7번국도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고성 쪽으로 올라간다
상한 몸 고치려 평창으로 들어간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춘설에 막국수 한 그릇 말아놓을 테니
어서 달려오라는 것이었다
시인이 이 시를 쓸 때는 봄이었고 춘설의 소식이 있었지만 지금 나의 시간은 8월의 한가운데를 달려가고 있고 비소식마저 멀리 있다. 게다가 오늘따라 더위는 올해 들어 최고 기온을 갱신이라도 할 듯 기승을 부리고 있다. 때문에 이 부분에서 시의 풍경과 내가 떠난 여행지의 풍경은 크게 엇갈린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여행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먼저 다녀간 자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여행을 챙기는 것이.
8월의 더위는 염천의 더위
하늘을 지글지글 태우고
바람마저 혓바닥을 빼문채
거리에서 꼼짝을 않은채 헐떡거린다
여름 햇볕이 온통 거리를 휩쓴다
놀러간 사람들이 텅 비워놓은 골목과 거리를
손에 피 한방울 안묻히고 점령한다
휴가가 끝날즈음
사람들은 몰고 갔던 차들을 마치 장갑차처럼 몰고
잠깐 잃었던 고지를 탈환하듯 돌아올 것이고
그때쯤이면 굵은 빗줄기가 원병처럼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다
이 부분은 여행이라고 보기는 좀 어려운 듯 싶다. 거의 쓰기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하다 보면 누구나 짧게 여행기를 적게 될 때가 있는 법이다. 짧게 적어놓은 그 느낌은 여행기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니 이것도 쓰기라기 보다 좋은 여행에서 얻어진 여행의 부산물로 볼 수 있다. 시로의 여행은 그냥 여행을 넘어 쓰기에 가까운 부산물을 선물처럼 안겨줄 수도 있다.
두꺼운 경전을 베고 거실 바닥에 눕는다
강원도가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내가 연신 봄 속으로 들어간다
─이문재, 「입춘」 이상 전문
난 이 여행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을 따라하기로 작정한다. 간단한 일이다. 두꺼운 경전이 아니라 내가 읽고 있던 책, 바로 얇은 시집을 베고 거실 바닥에 누으면 된다. 더운 날씨는 선풍기 바람으로 적당히 무마시킨다.
얇은 시집을 베고 거실 바닥에 눕는다
집안으로 밀려든 한 여름이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한 여름의 그 깊은 속을 내가 뒹군다
여기까지가 바로 내가 이문재의 시 「입춘」을 읽다가 그 시를 따라 같은 행선지로 떠난 시로의 여행이다. 시인에겐 입춘 여행이었지만 나에겐 8월의 한여름 여행이 되었다.
여행이 여행기를 쓰는 행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기를 읽는 행위도 아니 듯이 이 또한 시를 읽는 것도, 시를 쓰는 행위도 아니다. 이는 한마디로 시로의 여행이다. 일반 여행에 비하여 좋은 점이 있다면 돈도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로의 여행은 쓰기와 읽기의 사이에서 시가 내 속으로 들어오는 독특한 체험일 수 있다. 아니면 여행이 여행기를 내 삶에 직접적 체험으로 펼쳐놓는 것이듯이 시로의 여행은 시를 내 삶에 직접적 체험으로 펼쳐놓는 것일 수 있다. 일반 여행이 매력적이듯이 시로의 여행 또한 그런 측면에서 아주 매력적이다. 몸으로 겪는 체험의 느낌처럼 확실하고 매력적인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종종 이렇게 시로의 여행을 떠나기에 좋은 시들이 있다. 시로의 여행은 한번에 그치질 않는다. 시기를 맞출 필요도 없다. 오늘은 더위가 아주 심한 8월의 중순에 떠났지만 가을에도 창을 여는 것만으로 언제든 같은 여행을 떠나 다른 풍경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맛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시로의 여행은 때로 시인이 창문을 열 때 그냥 앉은 자리에서 각자의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 시작할 수 있다. 창이 없다면 방문을 열어도 좋다. 어디 한번 떠나보시라, 이 독특한 시로의 여행을.
(2009년 8월 16일)
**인용된 시가 수록된 시집
이문재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
4 thoughts on “시인이 남쪽 창문을 열 때 내 방의 북쪽 창문을 열다 ─ 이문재의 시 「입춘」”
요즘 [혜초일기] (박진숙)를 보고 있는데 혜초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이 버겁습니다. 일단 육식과 술을 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처가 어머니요, 어머니가 부처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저는 어머니가 될 수 없으니 영영 부처의 맘을 모르겠습니다. 그냥 나마스테…인사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문재의 제국호텔이 또다른 부처의 길을 보여줄지도 모르겠어요. 삼보일배가 가는 것도 서 있는 것도 아니지만 길과 땅이 몸속으로 걸어들어오면서 이 땅이 부처란 것을 알려준다고 하고 있거든요.
언젠가 이문재님의 제국호텔에 실렸다던 ‘소금창고’란 시를 소개 하셔서
찾아 보았더니 참 인상적인 시였지요.
몇 일전에 대관령으로 휴가 다녀 오면서
여름인데도 시원한 경관에
강원도가 몸속으로 싸아~하니 들어 왔답니다.
이렇게 시 여행을 하는 것도 더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네요
저는 북쪽 창문을 열면 바로 조광조의 묘가 눈에 들어 온답니다…ㅋ
언제나 좋은 글을 맛보게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으로 제국호텔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는데 시가 무지 좋더라구요. 그래서 이문재 시집을 다 살까 생각 중이예요.
창문을 열고 조광조 묘가 눈에 들어오면 멀리 조선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읽어주신 거 고마워요. 좀 길게 써서 읽는 것도 수고가 따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