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매년 마당의 작은 화단에서
비비추가 싹을 내민다.
어떤 녀석들은
돌멩이가 짓누르고 있는 가장자리의 틈새를 뚫고 나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봄을 호흡하기도 한다.
흔히들 대지를 가리켜 어머니의 품으로 비유를 삼지만
대지가 어머니의 품처럼 그렇게 따뜻한 것인가는
봄마다 의문이 든다.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품이면
그 품에 계속 머물지
왜 날씨만 따뜻해지면 싹들은 죄다 대지를 박차고
바깥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일까.
알게 모르게 그 어머니의 품은
평온한 안식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가둔 속박의 자리이다.
그 품에 머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뿌리이고,
언제까지나 씨앗이다.
엄마 품의 안식은 어찌보면
어둠 속의 안식일 뿐이다.
싹들은 그것을 안다.
그래서 엄마 품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고자 한다.
한발을 내딛으면 돌멩이가 짓누르고 있는데도
그 돌멩이 사이의 좁은 틈을 헤집고 세상으로 가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대지에 뿌리를 두고 싹을 틔우는 모든 것들은
대지의 품에 묻혀있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지의 품을 탈출하려고 안간힘이다.
그 탈출은 뿌리까지 뽑아들고 하늘로 훨훨 날고 싶을 정도로 강렬하다.
민들레의 씨앗은 그렇게
뿌리까지 뽑아들고 대지를 탈출하고 싶은 욕망의 대표적인 예이다.
대지가 어머니의 품이란 얘기는 알고 보면
그 품이 보장하는 싹들의 안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품으로부터 떠나는 싹들의 탈출에
눈물을 여행 경비삼아 쥐어주고(식물들은 대개 물을 먹고 자라니까)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겨주며(식물들은 흙속에서 영양소를 섭취하니까)
탈출을 방조한다는데서 찾아진다.
제 품의 탈출을 방조하는 품, 그것이 바로 대지의 어머니가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품인 이유이다.
대지는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떠나 보낸다.
우리도 그렇게 대지를 떠났고,
또 그렇게 대지가 되어간다.
봄마다 땅을 헤집고 나오는 비비추와
비비추의 탈출을 방조하고 또 부추기는 대지에서
우리도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곤 한다.
그 비비추가 이제는 화단의 여기저기서 꽃을 피우고 있다.
2 thoughts on “대지와 싹 – 마당의 비비추”
우리는 돌멩이를 치우고 시작했을 텐데 비비추는 그런 폐도 끼치지 않으며 출발을 해서 꽃을 피웠네요. 우린 돌멩이에 맞을 짓을 너무 많이 하고 사나 봅니다.
그래도 돌멩이들이 착한지 일어나 외치지도 않고 묵묵히 살아가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