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사과의 춤 ─2009년 가을 마니프 서울국제아트페어의 화가 이상열 그림을 보고

Photo by Kim Dong Won
이상열 화백 작업실에서

꽃을 본 사람은 많다. 나무를 본 사람도 많다. 만약 그 나무가 복숭아나무이고, 꽃이 피는 시기를 잘 맞추어 그 앞에 섰다면, 우리들의 눈은 온통 복사꽃으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나도 꽃피는 시절에 복숭아나무 앞에 선 적이 있다. 그때 내 눈은 복사꽃으로 가득찼다. 복사꽃은 언제나 내게 복사꽃만 잔뜩 보여주었다. 아름답고 화사한 꽃이었다.
꽃은 이중의 속성을 가진다. 꽃은 꽃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우리의 시선을 꽃에서 차단해 버린다. 즉 꽃은 꽃의 경계를 갖고 있다. 때문에 복사꽃은 항상 복사꽃이다. 그 경계의 안쪽에 있는 우리는 그래서 꽃에서 꽃만 보게 된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렇게 경계의 안쪽으로 갇혀 있다.
2008년 어느 날 나는 화가 이상열의 그림 앞에 서게 되었다. 그때 그는 나에게 꽃의 화가에서 나무의 화가로 변화를 보여주며 그의 화폭에 꽃과 나무를 담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 「꽃구름」이란 제목을 달고 있던 그의 그림은 화폭에 꽃을 가득 담고 있었으며, 그는 「복숭아 나무」란 부제를 통하여 그 꽃이 복사꽃임을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날 내가 본 것은 복사꽃이 아니었다. 난 그날 복사꽃이 핀 복숭아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꽃으로 부풀어 올라 제 몸을 그득 채우고 있는 나무를 보았다. 어떻게 그의 화폭에서 복사꽃은 그냥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풀어 올라 나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꽃의 꿈은 열매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꽃은 그냥 피는 것이 아니라 열매에 대한 꿈으로 피어날 것이다. 꿈꿀 때 우리들의 마음은 설렌다. 꽃이 마음을 갖고 있다면 열매에 대한 꿈으로 꽃을 열었을 때 우리처럼 설렐 것이며, 그럼 그 마음 또한 부풀어 오를 것이다. 이상열의 그림 앞에서 나는 열매에 대한 꿈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꽃의 마음을 보았다. 그의 그림엔 꽃이 아니라 꽃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복사꽃의 경계를 넘어가 한껏 부풀어 오른 그 마음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꽃을 보여주는 화가는 많지만 꽃의 마음을 보여주는 화가는 흔치 않다. 꽃의 마음을 본 그날 나의 마음도 설레었다.
과일 나무에서 열매를 본 사람은 많다. 만약 그 나무가 사과나무이고, 과일이 익어갈 때쯤 그 앞에 섰다면 모두가 탐스럽게 열린 사과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사과가 익어갈 때 사과나무 앞에 선 적이 있다. 그때 내 눈에는 온통 사과 뿐이었다. 사과는 언제나 내게 사과만 잔뜩 보여주었다.
꽃과 마찬가지로 사과와 같은 과실도 이중의 속성을 가진다. 그것 또한 사과나 배, 감과 같은 과일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우리의 시선을 그러한 과실에서 차단해 버린다. 그래서 사과나무 앞에 서면 우리의 눈에는 사과가 보일 뿐이다. 우리는 다시 경계의 안쪽으로 갇힌다.
올가을 다시 이상열의 그림을 마주했다. 그의 화폭 여기저기서 푸른 사과가 넘쳐나고 있었다. 때로 어떤 사과는 붉은 빛이었다. 붉은 감도 보였다. 꽃의 화가에서 나무의 화가로 변모를 보여주었던 그가 이번에는 열매의 화가가 되어 있었다. 특히 내 눈을 잡아끈 것은 그의 화폭에서 빈번하게 접할 수 있는 푸른 사과였다. 그러나 내가 그의 화폭에서 본 사과는 푸른 빛이 도는 덜 익은 사과가 아니었다. 난 그의 그림 속 사과에서 사과의 춤을 보았다. 생각해보면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결실의 기쁨은 항상 우리들에게서 춤을 부른다. 우리들은 이루고자 하는 것을 하나 둘 이루고 나면 언제나 그 결실의 기쁨으로 우리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세워 춤을 추려한다. 만약 그렇다면 사과는 단순히 열매가 아니라 사과나무의 춤일 것이다.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는 그렇게 사과가 춤을 추고 있었다. 푸른 사과에서는 아직 덜 익었지만 결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젊은 느낌의 춤이 보였고, 붉은 사과의 춤에서는 잘익은 완숙미의 춤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그림 속에서 사과의 경계를 넘어가 결실의 기쁨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푸른 사과의 역동적인 춤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사과를 보여주는 화가는 많지만 사과의 춤을 보여주는 화가는 흔치 않다.
화가 이상열은 꽃의 화가에서 나무의 화가로, 또 이번에는 나무의 화가에서 열매의 화가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화폭에 자연이 담기는 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그는 자연을 담는 동시에 그 자연을 넘어가고자 하며, 이는 그의 그림에서 항상 변함없이 접할 수 있는 그의 매력이자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자연은 사실 우리들에게 자연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우리의 시선을 그 자연에서 차단하고 우리들을 자연의 경계에 가두어 버린다. 화가는 그 차단된 경계를 넘어가고자 한다. 이상열의 경우 그가 그 경계를 넘어갔을 때 우리는 그의 화폭 속에서 열매의 꿈으로 부풀어 오르는 꽃의 설렘을 마주하게 되고, 결실의 기쁨으로 춤추는 푸르고 붉은 사과를 만난다. 화가의 꿈은 사과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과의 너머를 그리는 것이다. 올가을 이상열의 그림 속에서는 푸른 사과가 자신의 색을 일으켜 춤추고 있었다.
그 춤은 시선을 그림 가까이 가져가면 더욱 완연해진다. 두텁게 바른 물감이 사과의 춤사위를 싣고 화폭을 뛰쳐나올 듯이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며, 잎들도 잎이라기보다 차라리 불꽃에 가깝다. 그래서 잎들은 일렁인다. 시선을 멀리하면 둥근 사과의 형상이 화폭의 여기저기에 좀더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즉 좀더 현실적인 사과의 형태에 가까워진다. 멀리서 보면 과일 나무이지만 가까이 가면 춤이 완연해지는 그림, 그것이 올가을 그의 그림이 보여준 가장 특징적인 인상이었다. 내가 그의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는 지나가는 말로 ‘내 그림은 너무 가까이서 보면 추상이 되는데’라고 말했다. 추상이 되었을 때 그의 그림에선 춤이 완연해지고, 구상이 되었을 때는 과일 나무가 보였다. 그의 그림은 추상과 구상 사이를 오가며 동시에 춤과 과일 나무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사실 이상열의 그림에서 과일 나무를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의 느낌은 이번과는 달랐다. 그때 나는 그가 그린 사과나무에서 춤이 아니라 꽃을 보았다. 작은 점들로 흩어진 당시의 사과나무는 내 눈에 사과라기보다 꽃이었다. 그때 나는 그의 사과에서 열매를 꿈꾸었던 꽃의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사과는 더 이상 꽃의 추억을 더듬고 있지 않다. 그의 과일들은 이제 춤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잠시 꽃의 추억으로 내비쳤던 과일들을 왜 이번에 춤으로 일으켜 세운 것일까. 그의 그림 속 과일들은 희귀한 것들이 아니다. 항상 우리들 곁에 가까이 있는 친숙한 과일들이다. 너무 흔해서 흔하다는 말을 붙이기에도 민망하다. 그래서 특별하지 않고 일상적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일상도 대개의 경우 특별할 것이 없다. 많은 주부들은 매일 아침 남편과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여 출근시킬 것이며, 또 많은 사람들이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하루하루를 엮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자주 사다 먹는 흔한 과일처럼 우리의 일상도 거의 항상 똑같이 보이며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 속에선 그 흔하디 흔한 사과가 사과로 머물지 않고 푸른, 혹은 붉은 자신의 색을 일으켜 춤을 춘다.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는 사과나무의 일상이겠지만 그 일상 속에 사실은 결실을 향해 몸을 떠는 역동적인 몸짓이 있다.
그의 그림은 내게 속삭인다. 우리들의 일상도 마찬가지야. 반복되는 일상인 것 같지만 사과가 익어가듯 우리들의 하루도 그 반복된 일상으로 사실은 결실을 향해 익어가고 있어. 일상은 무료하게 굳어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매일매일 결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그러니 우리들의 일상을 기쁨으로 일으켜 세워 춤추게 할 수 있어. 네 삶을 한번 자세히 가까이 들여다 봐. 익는 듯 마는 듯 보이지만 사과가 익어가듯 너의 일상도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결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 그러니 사과가 익어갈 때쯤 너도 너의 일상을 일으켜 세워 사과와 함께 춤을 춰. 가끔 우리에게는 그렇게 사과와 함께 추는 푸른 춤이 필요해.
그의 화실을 찾았을 때 작업실의 구석에 사과 몇 개가 놓여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 가끔 사과를 만져보기도 하고, 향기도 맡아보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과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과가 되어 화폭 위에서 사과의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그림 앞에 섰을 때 갑자기 사과를 하나 먹고 싶었다. 한 입 베어물면 결실의 기쁨으로 온몸을 일으켜 세워 춤을 추던 이상열의 사과처럼 나도 무료하던 일상을 털어내고 춤을 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나의 일상이 모두 춤이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푸른 사과의 춤을 추고 나면 또다른 다음의 춤을 기약하며 한동안 힘겹고 무료한 우리들의 일상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화폭 위에서 그가 춘 푸른 사과의 춤이 나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사과를 한 입 먹고 싶은 날이었다.

**다음 전시회에서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전시회: 마니프 15!09 서울국제아트페어
-전시 기간: 1부 2009년 10월 14일(수) – 19일(월)
2부 2009년 10월 20일(화) – 25일(일)
-관람 시간: 오전 11시 – 오후 8시
-전시 장소: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관람 요금: 5000원

4 thoughts on “푸른 사과의 춤 ─2009년 가을 마니프 서울국제아트페어의 화가 이상열 그림을 보고

  1. 너무나 좋은 글 감사하고 또한 직접 전시회에 찿아 주셔서
    매우 반가왔습니다. 자주 블러그에 방문하겠습니다^^.

  2. 작품과 해설은 죽 보고 있자니 전시회 가고 싶은 맘이 급해지네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쉬운일은 아닌데 그 내면을 느끼고 표현하는거
    참 부러운 일이네요.
    사과맛을 보러 가야겠어요.

    1. 일요일의 마무리를 그림으로 장식합시다요.
      최근에 사진에 관한 책을 읽다가
      롤랑 바르트의 Camera Lucida라는 책을 조금 보았는데
      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시사를 하더라구요.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좋은 사진(good photography)과 잘 꾸며진 이미지(well-crafted image)로 구별을 하더군요.
      그림도 좋은 그림과 잘 그린 이미지의 두 가지 종류가 있겠다 싶었어요.
      일요일날 뵈요.
      입장권은 이상열 선생님이 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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