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이 채윤이와 함께 한 즐거운 우연의 순간들

거장들의 말은 좀 남다른 면이 있다.
가령 패션 사진의 거장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프랑스의 사진 작가 사라 문의 경우도 그렇다.
그녀는 사진을 어떻게 찍는가에 대해선 별로 말해주는 것이 없다.
사진 찍는 방법에 대해선 본능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자신은 사진은 그냥 찍고 있다는 얘기이리라.
그녀의 얘기 가운데서 인상적인 것은 자신의 사진 작업에 대한 견해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있어 사진은 ‘즐거운 우연’이 넘쳐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즉 무엇인가를 보고 찍는 것이 사진이 아니라
‘촬영하다 불현듯 찾아오는 이미지’가 사진이란 것이다.
그녀가 사진을 ‘즐거운 우연’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녀의 말은 내게 있어선 카메라의 정확한 작동법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그냥 일단 찍으면서 그 순간에 찾아온 뜻밖의 우연을
마음껏 즐기라는 얘기로 들린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그런게 어떤 경우인지 잘 체감이 되진 않는다.
11월 21일 토요일에 이웃의 현승이네 집에 놀러갔다가
사라 문의 말을 실감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현승이와 채윤이 손에 카메라를 쥐어준 것이 전부였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먼저 내가 현승이 사진을 한장 찍었다.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창의 빛 때문에
현승이 얼굴의 밝기를 기준으로 사진을 찍었다.
당연히 뒤쪽은 하얗게 날라가 버렸다.
아마 뒤쪽의 창문 풍경을 살렸다면
현승이 얼굴에 시커멓게 어둠이 덮였을 것이다.
카메라를 잘 알면 이렇듯 카메라를 들었을 때 기술적으로 반응한다.
그렇다 보니 사진은 그런대로 나오는데
즐거운 우연을 찾아내기는 어려워진다.
내가 그 즐거운 우연이란 말을 잘 실감하기 어려웠던 이유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현승이에게 니콘 D70을 쥐어주었다.
아이에게는 좀 무게가 무겁지 않을까 싶었지만
50mm 렌즈를 끼워 무게를 좀 덜어내 주었다.
수직 핸드 그립이 있어 좀더 안정되어 보인다.
다른 것은 가르쳐 주지 않고 셔터 누르는 법만 가르쳐 주었다.
다음에는 좀더 정밀하게 초점 맞추는 법을 가르쳐줄 생각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채윤이 손에는 나의 니콘 D700을 들려주었다.
와, 무겁다가 첫반응이었다.
그래도 넌 초등 학생이니까 이 정도는 들 수 있을 거야 라고 했다.
이건 갖고 다니다 운동 기구로 써도 돼 하면서
으쌰으쌰 들었다 놓았다하는 시범도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이것 저것 찍던 현승이가 나를 보고 한방 찍더니
갑자기 찍은 사진을 카메라 뒤쪽의 리뷰 화면으로 보고는 우헤헤 웃는다.
어떻게 찍었나 봤더니
이 털보 아저씨 머리를 뚝 잘라놓았다.
내가 말했다.
갑자기 머리 속이 텅빈 것 같아.
현승이가 그 말에 또 우헤헤 웃는다.
아마도 어른이 찍었다면 잘못 찍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는 그것을 보고 잘못 찍었다고 생각않고 우헤헤 웃는다.
그 사진은 아이에게 즐거운 우연의 순간이다.
즐거운 우연이란 이런 것이구나.
나도 잽싸게 그 즐거운 우연의 순간에 끼어들어 함께 즐기기 시작한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현승이가 재미 부쳤다.
나는 이제 앞도 안보인다며 손을 더듬거렸다.
우리는 또 우헤헤 웃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사진은 점점 더 극으로 달린다.
이번에는 앞이 안보이는데다가 머리 속 생각까지 흐리멍덩했다.
초점이 내 머리를 비켜가자 그런 현상이 발생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그러나 뒷걸음치다 뭐가 잡힐 때가 있는 법.
드디어 서로 마주보며 찍은 사진에서 내가 정확히 잡혔다.
그런데 내가 너무 밑으로 쳐졌다.
나는 이 사진 제목은
“카메라는 내게 너무 무거워”로 정했다.
현승이는 세 장의 사진을 연속으로 찍어놓고 있었는데
사진 속에서 내가 점점 아래로 쳐지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중간에 채윤이와 현승이의 렌즈를 바꿔주었다.
렌즈를 바꿔낄 때 카메라 앞부분이 그대로 드러나자
채윤이는 렌즈를 끼지 않고 그냥 찍으면 안되냐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빛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허옇게 나오는데라고 했다.
그래도 찍어보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사진이 탄생되었다.
나는 이 사진의 제목은 “빛의 범람”으로 정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현승이가 내 뒤로 가더니 한쪽으로 숨어서 나를 찍는다.
현승이는 이건 “감시 카메라”라고 말했다.
도시의 온갖 곳에 감시 카메라가 숨어서
우리를 찍고 있다는 걸 현승이는 알고 있다.
감시 카메라 앞에서 나는 나도 보지 못하는 내 뒷모습을
무방비로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믿기지 않겠지만 요것도 현승이의 작품이다.
남녀 차별한다.
여자는 이렇게 예쁘게 찍어주다니.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누나 사진도 한장 서비스.
사실 이날 채윤이가 카메라를 둘러맨 모습은 정말 간지났다.
카메라의 매력을 단숨에 눈치챈 채윤이는
우리도 이런 거 하나 사자고 졸랐다.
나는 카메라 가격이 카메라 스트랩에 써 있다고 했다.
카메라 스트랩에는 커다랗게 D700이라고 써 있다.
난 거기 써 있는대로 700원이라고 말했지만
채윤이는 그 말에는 넘어가질 않았다.
에이, 700만원이겠지.
사실 속으로 ‘후유’했다.
말해놓고 나서 그럼 1,000원 드릴테니 아저씨는 새 걸로 한대 사시구요
이건 제가 쓸께요.
300원은 안갖다 주셔도 돼요.
요렇게 나오면 좀 대책이 없을 듯 싶었기 때문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09년 11월 21일 명일동 현승이네 집에서

채윤이 사진도 내가 한 장 찍었다.
채윤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그렇지만 즐거운 우연은 아니었다.
사진이란 자유롭게 찍을 때 즐거운 우연을 즐길 수 있는 것인데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맡겨 보았더니
나는 많이 규격화되어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는 나도 카메라에 더 많은 자유를 주어야 할 듯하다.

아이들은 디카보다 DSLR를 유난히 더 좋아했다.
약간 의외였다.
요즘 아이들이다보니까
보이는대로 찍히는 디카를 더 좋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오히려 DSLR에 더 신나고 즐거워했다.
왜 그런 것일까.
디카는 즐거운 우연을 선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이는 순간이 그대로 찍히니까.
DSLR은 찍는 순간과 확인의 순간에 약간의 간극이 있다.
마치 필름 사진에서 사진을 찍고 인화하기까지 그 사이에 시간 차이가 있듯이.
DSLR은 사진과 인화 사이의 그 간극을 아주 짧게 줄여놓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찍고 리뷰 버튼을 눌러 확인을 해야 한다.
반면 디카는 대상을 찍는다기보다
움직이는 실시간 화면에서 화면 하나를 정지시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렇다 보니 중간의 처리 과정이 없다.
아이들은 짧지만 중간의 처리 과정이 있는 DSLR과
그 처리 과정의 뒤에서 만나는 의외의 결과에 즐거워한다.
즐거운 우연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아이들처럼 카메라 앞에서 오직 본능만으로 사진을 찍을 때
비로소 그런 우연의 순간들이 만들어지고 또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거구나.
사진의 거장 중 한 사람이 말한 그 즐거운 우연을 실감하는 순간들이었다.

13 thoughts on “현승이 채윤이와 함께 한 즐거운 우연의 순간들

  1. 챈이 사진 가져갈께요.
    오늘 제 블로그 대문에 걸겠습니다.
    (간만에 뽀대나는 포스팅 한 번….^^)
    감사합니다.

  2. 무식한 저는 디카로 찍은 사진들은 어쩜 그렇게 사실적일 뿐일까 생각하곤 했었어요.
    디카사진에서는 ‘우연’을 기대할 수 없는 거였군요.

    저 진심 이 포스팅 보고 DSLR에 욕심이 나요.
    그 날 이후로 챈이가 우리도 털보 아저씨 같은 카메라 사자고 하는데….
    700원짜리는 어렵더라도 어떻게 7원 정도 되는 걸로 하나 장만해볼까 싶어요.

    그리고 너무 감사해요.
    저는 그 날 애들이 카메라 떨어뜨릴까봐 손을 계속 허공에 대고 있었는데….
    오히려 두 분은 맘을 턱 놓고 내주시더라고요. 하긴 떨어뜨려서 망가지면 두 분이 손해볼 건 없으신거구나.ㅋㅋㅋ

    저 깜놀 포인트 벽지는 forest님 뒷배경이 되니깐 그나마 좀 봐줄만 한데요.

    1. 그 사라 문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즐겨 사용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커요. 필름은 결과를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속터지고 디카는 너무 곧바로 보여줘서 우연의 미학을 고갈시킨다는 얘기가 되거든요. 폴라로이드가 그 중간쯤 서 있는 카메라 같아요. 사실 저 사라 문 사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다만 그 생각만 수용할 뿐.

      음, DSLR은 한자리수가 제일 고급이구요, 두 자리수는 보급용, 세 자리 수는 중간급이예요. 네 자리 수는 더 보급용. 한자리수 적극 권장하고 싶기는 해요. ㅋㅋ

      사실은 저도 아이들 가려가면서 내준답니다. 제가 모든 아이들을 포용하는 사람은 못돼요.

  3. 정말 걱정이예요.
    그렇게 두바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던 분이잖아요.
    이거 뭐 나라를 절딴 내는게 신조이자 철학이 아닌가 공포스럽기까지 합니다.

    더 나은 나라가 되어 있을 거예요.
    우리는 자유를 호흡하며 크지 못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키우고 있으니까요.

  4.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맴돌면서 말로 나오지 못했었는데….
    ‘철학이라곤 없는 인간을 저런 자리에 앉힌 백성이라니…’
    그거였네요. 하다못해 개똥철학이라도 있어야지요.
    그저 머리에 든 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 밖에 없으니요.

    오늘은 아침 신문 보면서부터 계속 철학없는 한 인간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었어요.

    저 아이들은 이렇게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봐주시는 친구(죄송!^^; 헌데 친구로 보이는 건 어인일일까요?)가 계셔서 참 좋겠어요. 저 아이들이 자라났을 땐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어있을까요?

  5. 그건 뭐든 그렇잖아요.
    철학이 없으니 나중에 이상한 글을 내지르게 되는게 아닌가 싶고, 철학이 없으니 오직 돈된다는 이유로 강이란 강은 죄다 파헤치게 되고… 있는 듯 보였지만 나중에 보면 전혀 없었던 듯 의심스럽게 되는 것이 철학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세상은 바뀔 거예요. 자유를 맛보면서 자라는 아이들이 있거든요.

  6. 일단 나를 예쁘게 찍어준 현승이에게 감사~
    나를 예쁘게 찍어줘서 이런 말 하는 건 저얼대 아니구…
    채윤 현승, 넘 예쁘당~ ^^

    현승의 저 눈빛, 참 사랑스럽지 않수?^^

    1. 조 눈빛에서 나는 자유를 본다우.
      그런데 그게 좀 남다른 자유야.
      현승이의 자유는 자유를 아는 부모가 그 자유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키워낸 자유이거든.
      가끔 자유가 부모의 억압에 대한 반항으로 자라나는 경우도 있거든.
      현승이는 그렇질 않고 자유가 자유를 키웠어.
      현승이가 남다른 이유이지.

    2. 요기 동원님의 댓글을 읽는데 동원님 말투가 막 저절로 너무 선명하게 들려와서 놀랐쟎아요. 바로 옆에 계신줄 알고 ㅋㅋ

      현승이가 털보부인을 증말 이쁘게 찍었네요, 뽀샤시하니.
      이게 뒷배경탓인가?ㅎㅎ

    3. 이게 살아보니까 예술이 예술적 재능으로 크는게 아니라
      그 예술적 재능을 알아봐주는 눈에 의해 큰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그래서 가급적 아이들에게서 반짝거리고 있는 재능을 봐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예요.
      우린 그런 혜택은 거의 받지 못한 거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김현 선생도 어릴 때 책을 읽고 있으면
      어머니가 항상 책을 읽으면 밥이 나오니 떡이 나오니 그랬다고 하더라구요.
      밥과 떡의 위세는 지금도 여전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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