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에 다시 찾은 선자령 – 내려가는 길

선자령을 올라간 것이 이번까지 포함하여 세 번이다.
이 전의 두 번은 모두 올라간 길로 내려왔다.
1월 16일 선자령에 오르는 길에
길목에 서 있는 등산지도를 보니 예전에는 없던 길이 보였다.
정상에 올랐을 때도 예전에는 보지 못한 방향으로 안내판이 서 있다.
“바람마을 의야지”라고 되어 있고,
그 길로 가면 거리는 5.3km가 된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올라갈 때 간간히 아래쪽의 계곡으로 산길을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 길이 내려가는 길이 아닐까 싶어진다.
올라온 길을 버리고 그 길로 들어섰다.

Photo by Kim Dong Won

멀리, 언젠가 우리가 비행접시 착륙장으로 명명했던 곳이 보인다.
최초로 착륙하는 비행접시에게는
착륙장 이용료를 면제해준다는 표지판이 있을 거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확인은 못했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무들 사이로 눈이 다져진 길이
요리조리 몸을 비틀며 내려가고 있다.
이런 길은 엉덩이 밑에 비닐하나 깔고
야호, 소리지르면 썰매타고 내려가야 한다.
어릴 적의 그 재미, 이번에도 역시 놓치고 말았다.

Photo by Kim Dong Won

그냥 손으로 떠서 덜어내기만 하면
김이 설설 오를 것 같은 백설기 느낌.
먹을 수는 없었지만
보고만 있어도 깨끗한 느낌이 역력했다.
눈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씻을 수 있을 듯하다.
맑은 물로만 마음을 씻을 수 있는게 아닌 듯하다.

Photo by Kim Dong Won

우리가 막 빠져나온 숲.
아마도 우리가 내려가는 길로 산을 올라온 사람은
턱밑까지 와서 다리의 힘이 많이 풀렸을 때쯤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숲속 소로를 만났을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내려오는 사람은
바로 요 위라고 힘을 부추겨 주었을 것이며
그러면 사람들은 마치 심해에서 서서히 물밖으로 떠오르는 잠수부처럼
소로를 헤쳐 정상으로 나아갔을 것이며
그 끝에서 마침매 엄청난 바람이 일렁이는 정상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반대였다.
엄청난 바람의 물결을 뒤로 하고
숲의 소로를 따라 심해로 잠수했다.
숲의 심해로 내려오자 갑자기 바람이 잔잔해졌다.
숲의 심해는 다시 위로 올라가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내려가면서 옆으로 벗어난다.

Photo by Kim Dong Won

바람개비와 나무는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 것은 같지만
바람을 맞는 자세는 서로 다르다.
바람개비는 빙글빙글 도는 자세로 바람을 맞는다.
바람개비의 자세가 바람을 맞는 반가운 마음에서 나온 춤인지
바람을 맞았을 때의 어지러움인지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나무는 꿋꿋하게 바람을 견디는 느낌이다.
아니면 가지 사이로 바람을 들여 속속들이 재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시 잘 판단이 서질 않는다.
다음에 오면 바람개비와 나무가
이제 얼굴이 좀 익었다고 알려줄지도 모른다.

Photo by Kim Dong Won

폴 발레리는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 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바람개비는 “바람이 분다. 돌아버리 겠다”고 말할까.
쉼없이 바람이 불고 있었고,
거대한 바람개비도 쉴사이 없이 돌고 있었다.
나무들이 나란히 서서 바람개비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나무가 안되어 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나무가 많이 여유있어 보였다.
아님,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날개에 시선을 빼았겨
바람을 이기고 겨울을 나야 하는 고단함도 잊고 최면에 빠져든 것인지도.
가끔 우리는 더 고단한 삶을 보며 나의 고단함을 잊는다.

Photo by Kim Dong Won

여기서 이렇게 일년내내 똑같은 자리 지키며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게 지겨워.
저 하늘로 날고 싶어.

그러려면 비행기 앞에 가서 붙었어야지.
근데 하늘을 날려면 지금처럼 돌아선 어림도 없을 걸.
아마 눈깔 튀어나오게 돌아야 했을 거야.
그럼 날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의 여유는 없었을 거야.
때로 꿈이란게 이루는 순간 후회로 돌변하기도 해.
내가 보기엔 시선만 푸른 하늘에 두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 절로 들 것 같어.
여긴 뭐 높이도 상당히 높아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군.
알고보면 넌 좋은데 살고 있는 거야.

Photo by Kim Dong Won

능선을 타고 선자령으로 오를 때는
계곡을 내려다보는 것이 재미였는데
계곡을 타고 내려갈 때는 능선을 올려다보는 것이 재미이다.
겨울이라 나무들이 가지 사이를 비워두어서 가능한 듯하다.
저 소나무, 올라갈 때 항상 보게 되는데
매번 머리 위를 내려다 보며 지나쳤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턱밑을 구경하며 내려간다.

Photo by Kim Dong Won

왜 이렇게 하늘을 어지럽혔어?

걱정마.
여름오면 푸른 잎으로 깨끗이 도배해 놓을테니.

Photo by Kim Dong Won

겨우살이.
나무에 기생해서 겨우내 겨우겨우 살아가는 식물.
그래도 그렇게 넘긴 삶이 질겨서 그런지 약효가 있다고 하는 식물.
겨우겨우 살고 있다고 주눅들지 마시라.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좋은 약효를 가질 수도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구름인가,
아니면 저 나무가 우리 안보는 사이에
하늘을 슬쩍 쓸어 빗질해 놓은 자국인가.
나는 사람의 무게가 실린 빗질 자국을 참 좋아하는데
저 구름도 나무의 무게가 실린 빗질 자국이라면 좋겠다.
만약 그렇다면 청소는 아주 깨끗이 한 것 같다.
먹구름 한 점 없이 아주 깨끗이 쓸어놓은 하늘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사람들은 정상으로 올라와선 뿔뿔히 흩어진다.
때문에 올라올 때 줄줄이 줄을 지어 올라왔다고
내려가는 길까지 줄을 서진 않는다.
올라올 때는 계곡의 사람들만 간간히 점선을 그리며 길을 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들도 점점이 점선을 그리며 가고 있다.
사람들 위로 하늘이 높고 푸르다.
능선의 사람들이 머리에 인 하늘이
계곡에서 올려보는 눈엔 산 너머에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으아아, 구름을 잡고야 말겠어.
나뭇가지가 실구름을 향해 일제히 손을 뻗었다.

Photo by Kim Dong Won

빵구똥구는 계속된다.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선자령 계곡의 눈 위에서도.
바람을 견디며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눈치였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무가 눈밭에 제 그림자를 눕힌다.
그리고 속삭인다.
너의 실핏줄이 되어줄게.
그럼 오들오들 떨면서 지내야 하는 싸늘한 네 몸에
따뜻하게 온기가 돌지도 몰라.

Photo by Kim Dong Won

부러진 나뭇가지야,
앞으로 눈밭에는 떨어지지 마라.
희고 연약한 살갗에
네가 떨어지니 무슨 회초리 자국처럼 깊이 박힌다.
눈이 무슨 잘못이 있겠니.
핏자국 새겨지도록 때리고 싶거들랑,
어디 다른 놈을 찾아보거라.
이 세상에 맞을 놈, 정말 많단다.

Photo by Kim Dong Won

내려가다 종종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무들이 모두 가지 끝을 푸른 하늘에 걸쳐놓고 있었다.
가지끝이 백색으로 빛이 나는 듯 했다.
눈이 부신 그 느낌이 아주 좋았다.

Photo by Kim Dong Won

나무치고 뚱뚱한 나무는 거의 없는 듯하다.
숲에 가면 살이 빠진다.
운동이 되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들 하지만
암암리에 나무를 닮는 것인지도 모른다.

Photo by Kim Dong Won

같이간 일행 넷이서 사진 한 장 찍었다.
나는 어디에 있냐고?
서재석 선생님, 머리에 뿔 두 개 달고 내 목을 밟고 계시다.
에고, 켁켁.

Photo by Kim Dong Won

그래 뭐하려고 눈을 한움큼 움켜 쥐었어?
눈의 시원한 감촉을 느껴보려구.
으, 시원해.

Photo by Kim Dong Won

중간쯤, 어디에도 물은 보이지 않는데
계곡을 덮은 눈밑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좀더 내려왔더니 드디어 흘러가고 있는 투명한 물이 보인다.
그것도 얼음의 밑으로 흘러가고 있다.
봄이 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Photo by Kim Dong Won

눈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토끼도 있다.
토끼가 만들어놓고 갔는지는 모르겠다.

Photo by Kim Dong Won

같이 간 서재석 선생님,
저만치 앞쪽에서 손을 들고 계시길래 뭘 하나 했더니
멀리 나무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향해 손흔들고 계시다.
나도 한번 해보았다.
땅에 끌려다니기만 했던 그림자가
후다닥 계곡으로 내려가더니 가뿐하게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몸을 똑바로 세우고는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이번 선자령의 산행은 하얀 눈꽃 나무를 꿈꾸며 떠나서
까만 그림자 놀이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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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다시 찾은 선자령 – 올라가는 길

9 thoughts on “3년만에 다시 찾은 선자령 – 내려가는 길

  1. 뚱뚱한 나무가 없다굽쇼…
    뚱하고 배 나온 나무 1인 추가요~~~
    산에는 길이 없을거라고, 더군다나 눈이 내린 산에는 없는 줄 알지만
    수 많은 대사님들이 발자욱을 지우지 않고 지났나 봅니다.
    산에서는 길이 또렷한데 정작 하산하면 길을 잃는지 모르겠습니다.

  2. 빗질자국 구름과 나무의 밀고 당김의 꽤 힘있어 보이네요.
    그 각도가 절묘해서..
    바로 앞에서 찍었는데 사람을 다 잡고도 옆공간을 그만큼 또 잡으시니
    광각렌즈가 묘하긴하군요.
    전 눈토끼말고 곰방대 할아버질 만났거든요. 기대하시길.

    1. 곰방대 할아버지는 전혀 짐작이 안가요.
      궁금해서 곧바로 다녀왔는데 아직은 없군요.
      나는 곰방대 할아버지가 올라올 블로그의 그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테요. ㅋㅋ

      빗질 자국은 한 시인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거였어요.
      사실 별로 좋아하는 시인은 아니예요.
      너무 보수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래도 빗질 자국에 빗질하는 사람의 무게가 실린다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 구절은 꽤나 마음에 들더라구요.
      골치아프죠. 이런 경우가.
      그 시인의 이름을 밝혀두자면 조정권이랍니다.
      그 시인의 이름을 밝혀두자면 조정권이랍니다.
      한 구절은 마음에 드는데 시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있거든요.
      대개는 시도 버리고 시인도 버리는데 그냥 이 경우엔 시인 이름만 버리고 싯구절은 챙겨둔 경우였어요.
      싯구절 하나를 취하는데도 고민이 되는 더러운 세상. ㅋㅋ
      그 시인의 이름은 밝혀두어야 할 것 같은데 조정권이예요.
      좋은 시인인데 마음에 안드는 골치아픈 경우예요.

    2. 포레스트님의 나무사진에 기가 죽어 사진을 더 올려야하나 마나 생각했는데 곰방대 할아버지를 기다리신다니…

      그리구요 그 시인의 이름을 사실은 잊고 싶지 않으신거죠?
      여러번 반복하시는거 보면.

  3. 백설기 느낌 좋은데요.
    공교롭게도 통나무 의자가 하나 모자라 화면에 안 나오셨네요.
    재치있게 앉은 위치 바꿔주신 거, 주효했네요.^^
    얼음 밑으로 흘러가는 봄의 소리 듣습니다.

    근데, 자꾸 선상님 소리 하시니까 이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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