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로 가는 먼 길 — 강윤후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

강윤후 시집『다시 쓸쓸한 날에』의 표지

시집 속의 구절들에만 의지해보면, “눅눅한 내 서른두 살도 그렇게 마르는 것일까”(p.88)를 묻는 그의 얘기로 미루어, 강윤후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다(강윤후의 나이에 관한 현실적 정보는 그러나 이와 유리되어 있다. 시를 읽는 오늘의 시점과 시가 씌어진 과거 어느 날의 시점이 갖는 시각차 때문이리라. 그는 실제로는 1962년생이라고 한다. 올해로 서른네 살인 셈이다). 그 서른두 살의 삶이 서 있는 곳은 서울이란 도시이다. 시집의 첫머리에서 그가 ‘너’(p.11)를 기다리고 있는 「성북역」이 그것을 일러준다(이번에도 현실적 정보는 시의 구절을 더듬어 행보를 삼은 나의 시읽기와 간극을 보인다. 그는 대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서울은 곧 그의 시에서 도시의 대명사인 셈이다). 마지막 자리에서 그가 타고가는 열차의 종착역 또한 ‘성북’(p.94)이다.
강윤후에게 있어 그 서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신이 끊긴 단절의 공간이다.

발 아래선 수도관과 가스관과 전관들이 神經처럼 뒤엉켜
이 도시의 모든 집들을 연결시키지만
그 수도관의 한 끝에서 충혈된 눈을 씻고
그 가스관의 다른 한 끝에서 아랫입술 깨물며 물을 끓이고
그 전관의 또다른 한 끝에서 쿨럭거리며 편지를 써도
우리는 모른다, 분명 어딘가에 아가리를 쩍 벌려
우리의 傳言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는 거다
─「성냥팔이 소녀에게」에서

우리의 도시란 것이 그렇다. 도시는 우리들이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신호등으로” 그 통로를 열어주면서도 우리들로 하여금 “이 도시에서 횡단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은 또 몇이나 될까”를 회의하게 만든다. 도시는 열려있고 이어져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굳게 닫혀있다. 그런 측면에서 도시의 느낌은 사막과 아주 흡사하다. 사막에도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전해받는 메마르고 건조하다는 느낌과는 정반대의 문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물결의 문양이다. 바람이 등을 떠밀 때 모래 알갱이들은 이리저리 무리를 지으며 높게 또는 낮게 자리를 잡아 호수에서와 똑같이 물결의 문양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막에서 전해받는 느낌은 그러한 물결의 문양에도 불구하고 역시 메마르고 건조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사막이 생명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느낌도, 표면적으로 도시가 보여주는 삶의 물질적 풍요나 화려함과 달리, 따뜻함이나 밝음과는 거리가 멀다. 도시는 도대체 무엇을 결핍하고 있는 것일까. 강윤후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회의한다. 이 도시에서 “정녕 사랑은 감지될 수 있을까”를. 사랑은 서울이란 도시에서 ‘빈사(瀕死)’의 상태이다. 그리고 그 결핍으로 인하여 이 도시의 채색은 춥고 어두운 빛깔로 가라앉는다. 그런 어두운 공간에선 “어쩔 수 없”이 “꿈을 꾸어야 한다.” 그곳의 추위로 인하여 우리들은 “곱은 손 부비며 꿈을 꾸어야 한다.” 그러나 도시는 시인에게 그런 꿈의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시는 “우리에겐 성냥 한 알 밝혀 찾아볼/환한 세상”이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시인을 참담하게 만든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카바이드 불빛에 펄럭거리는 포장을 걷고 들어가” “소주를,” “아니” “쐬주를 마”(pp. 16~17)시는 시인의 쓸쓸한 한 순간이 그렇게밖에 감당할 수 없는 참담한 도시의 현실이다.
강윤후는 바로 그 도시에서 자신의 연인을 떠나보내는 실연의 아픔을 겪는다.

그리하여 너는 떠나고 나는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남고 너는 떠나게 되었다
─「너는 떠나고, 나는」에서

“돌아선” 그 연인은 여자였음에 분명하다. “뾰족구두”가 그것을 일러준다. “뾰족구두의 뾰족한 그 끝”에 실린 “뾰족한 기억”은 “아주 아프게”(p.18) 그를 찌르고 있다. 강윤후에게 있어 그 실연의 아픔은 예상 외로 오랜 시간을 끈다. 우리들의 흥미를 끌어당기는 것은 그것이 왜 예상 외로 느껴지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도시에선 “모든 게 건성이”(p.49)이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가보라. 시인의 말대로 “내딛는 발걸음마다 포석(鋪石)들”도 “잔뿌리가 들떠 덜컹거”(p.14)리지 않던가. 그러니 “생각해 보면 그대 잊는 일/담배 끊기보다 쉬울지 모르고/쑥뜸 떠 독기(毒氣)를 삭이듯 언제든 작심하여/그대 기억 모조리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p.64) 그는 이 도시에 팽배한 그 가벼운 사랑의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한다. 때문에 실연의 상처 앞에서 그는 아프고 힘들다. 힘든 순간은 쉽게 넘기기 힘든 법이다. 때문에 우리들의 관심은 그가 보여주는 실연의 다음 행보로 쏠린다. 우리의 관심에 대하여 그는 “바다로 가야 한다”고 반응한다. 바다? 왜일까? 그는 자신의 말을 이렇게 잇고 있다. “거기서 나는/미리 보아야 한다/갇힌 물들이 세월처럼 풀리는 것을”(p.19)이라고. 그 바다는 도대체 어떤 바다일까?
그 바다를 보려면 강윤후의 나이 “스물몇 해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 그곳에 전북 고창군 해리가 있다. 그가 자신의 시에 붙여놓은 주석이 그것을 일러준다. “송사도 답사도 없이” 끝난 ‘졸업식’과 “학생 다섯이 마저 떠나자” “실신한 듯 비틀거”리고 있는 ‘교사(校舍)’, 그리고 “조무래기들이 여섯 해를 밟아도 어딘가/발길 닿지 않은 데가 남아 있을 운동장”(p.40) 등은 그가 그곳에서 이제는 문을 닫게된 어느 국민학교의 교사로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스무살 시절은 그렇게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라던 매운 다짐”으로 서울을 멀리하고 “저무는 생애처럼 쓸쓸한” “빈 개펄의 고요”(p.36)와 함께하고 있었다.
강윤후가 자신의 스무 살 시절을 들추어 보여주는 해리는 우선 염전의 풍경으로 우리의 시선을 채운다. 그 염전의 풍경은 매우 황폐하다. 비가 내리거나 겨울이 찾아와 있기 때문이다. 염전의 비와 겨울 추위는 사막의 바람에 방불한다. 비와 겨울 추위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삶에 대한 막막한 중압감을 올려놓거나 “막소주 한 잔에도 목이 쉬던 사내들”을 “모조리 실업(失業)의 계절로 흩어”(p.33)놓는다. 그곳은 소금구이로 바쁜 활기찬 생활의 터전이 아니라 인부들이 잠시 손을 놓았거나 아예 인적을 상실하고 시름을 앓는 장소이다.

아무 기별 없이 경수산을 내려온 비안개는
일을 놓은 三養社 鹽田에 반듯하게 깔리고
鹽庫 처마 아래 모여 무작정 비를 긋는 인부들
그 白苔 낀 시선은 물러간 바다에 이르지 못한 채
매운 콧날 담배연기로 나른하게 풀리지만
騰落을 점칠 수 없는 비바람의 市勢에
숙명처럼 챙겨야 할 세간살이 셈할 즈음
그저 벌어지는 아가미
─「海里에서」에서

오래 전에 멎은 水車 슬그머니
고갈난 기억의 바닥을 긁는다
더 바랄 것 없어서 絶望인지
바닷물을 잘게 빻아 소금을 구워내던 햇살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눕고
은박지 같던 지난 여름이
텅 빈 鹽庫에 스산하게 구져져 있다
─「겨울 염전」에서

그 황폐한 바닷가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레 실연의 아픔이 힘겨울 때 그의 발걸음이 바다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의 스무살 시절에 바다는 어떤 경험을 안겨준 것이었을까.
도시는 화려하고 풍요롭다. 때문에 도시의 사랑은 “번쩍대”고 “질”기며 “미끈한 사랑”이며 “한 번 붙으면 지글지글 불타”오르지만 “그러다 감쪽같이 사그러들 사랑”이다. 강윤후는 그런 사랑을 일러 “플라스틱 그 사랑”(p.56)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알고 있다. 그 화려함과 풍요로움이 계량화되고 겉으로 드러난 표피적 측면에 그칠 뿐 깊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 껍질 사랑의 도시에선 “마음의 나라”(p.14)를 볼 수 없다. 강윤후에게 있어 사랑은 어떤 측면에선 그 “마음의 나라”를 보여주는 힘이다. 도시에서의 오랜 삶은 바로 그 힘을 앗아가 우리들을 골병들게 한다.

벌써 세월에 골병이 들어 아무도
강 건너의 삶과 강에 그림자를 누인 산의 깊이를
가늠하려 하지 않았다
─「春川, 그 흐린 물빛의 날」에서

대상의 표피를 핥는데 그치는 도시의 시각은 그저 염전을 “한 치의 소금”으로만 재려한다. 그런데 그런 시각 속에서 보면 황폐함으로 우리를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비내리는 염전이 오히려 어떤 생명의 느낌을 전해준다. 그 느낌은 처음엔 어렴풋하다.

어김없이 하루에도 네 차례나 뒤바뀌는 해안선
그 파행선의 골골마다에도
한 치의 소금만으로 다할 수 없는 생명은 서려 있는지
돌아보면 첩첩하기만 하고
굵어진 빗줄기로 인해
內陸으로 통하는 길이란 길은 모조리 끊겨
날 개어 비안개 걷히면
앞바다에 새로이 섬 하나
무슨 腫瘍처럼 돋아날 것 같다
─「해리에서」에서

풍요의 뒷편으로 사랑의 고갈을 보여주는 도시와 달리 그렇게 바닷가의 염전은 그 황폐함의 저편으로 오히려 생명의 징후를 보여준다. 어렴풋한 느낌으로 와닿던 그 생명의 징후는 “마른 갯흙에 희끗하게 번지는 소금발 따라/키 낮은 갈잎 날리며 방죽으로 나서면” 겨울의 염전에서 보다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우리앞에 드러난다.

완강하게 닫힌 무쇠 水門
몰려온 바다의 잦은 발길질에
퍼렇게 멍이 든다
─「겨울 염전」에서

겉으로 드러난 풍경만으로 보면 겨울 염전에선 햇살이 그 열정을 꺾은 적요함이 만져질 뿐이다. 그러나 이제 시인의 눈에 바다가 보여주던 어렴풋하던 생명력은 “퍼렇게 멍이”들 정로로 “무쇠 수문(水門)”을 두들리고 있는 파도를 통하여 하나의 살아있는 움직임으로 구체화된다.
실연의 가슴 만큼이나 스산하고 황폐한 풍경의 염전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끊이지 않는 생명력의 징후를 시사했던 바다는 이제 실뱀장어잡이를 통하여 가장 구체적인 잠언을 발한다. “해남 목포에서 날아온 실뱀장어잡이 풍문에 물때를 맞춰 거룻배를 띄우는 겨울 끄트머리에서 봄의 처음까지 바닷말 한 달. 꽃소식이 육지를 타고 북상(北上)하며 웅크린 반도(半島)의 물줄기를 일으켜 세우듯 실뱀장어떼”가 “서해의 겨울을 걷으며 나란히 오”를 때 그 실뱀장어잡이는 이루어진다. 바다는 우선 그에게 “물이 들어온다고 하여 실뱀장어떼가 몰려오는 건 아니”란 사실을 이른다. 사랑도 그렇다. 모든 만남이 모두 곧 사랑으로 영그는 것은 아니므로.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쓰는 중공군(中共軍)처럼 미련하게 몰려와 첨벙대는 실뱀장어를 잡기란 어렵지 않다, 염전이 바닷물을 가두는 것만큼.” 그러나 문제는 “수만 마리의 실뱀장어떼가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오듯 바람이 불어도 목 좋은 물골을 골라 깔아놓은 그물에 찢긴 해태(海苔) 한 자락 걸리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강윤후는 알아차린다. “다만 견디기 힘든 건 기다림이”란 사실을. 그런데 바다는 그 기다림에 대하여 도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래 비어 있는 그물일수록 기다림으로 터져나갈듯 하지만 그 기다림이 다시 체념으로 비워지는 건 아니다. 잡힌 실뱀장어는 양어장에 팔려 쏠쏠한 벌이도 되고 기름진 飼料로 디룩디룩 살이 쪄 한 접시의 장어구이로 자라기도 할 테지만 실뱀장어가 바닷말에 들르지 않고 비껴가도 앞바다가 체념으로 묽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해안선을 따라 陣을 친 그물들의 기다림을 개펄에 눌러 묻으며 용케 더 위쪽으로 올라가는 실뱀장어가 있을 테니까. 장산곶을 돌아나와 먼바다에서 깡마른 自由로 자라날 실뱀장어가 분명 있을 테고 봄은 올테니까……
─「실뱀장어를 기다리며」에서

실연 앞에서 도시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삶의 태도는 체념이다. 체념은 포기이다.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눈앞에서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들은 그 사랑을 잊고 지워버린다. 거기에 기다림이란 없다. 도시의 우리들은 성급하며 기다림을 모른다. 도시가 체념을 키운다면 바닷가의 삶은 강윤후에게 체념으로 묽어지지 않는 기다림을 보여준다. 그가 그것을 본 것이 실뱀장어잡이에서이다.
바다는 실뱀장어잡이를 통하여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란 사실을 가르친다. 도시의 사랑이 체념으로 금방 옅어지는 것은 그와 달리 사랑의 대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아주 모호하지만 실뱀장어잡이에서 그 비유를 빌면 명징하게 그 뜻을 드러낸다. 실뱀장어가 내 그물을 비켜갔다고 하여 실뱀장어 자체가 없어진 것이거나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장산곶을 돌아나와 먼바다에서 깡마른 자유(自由)로 자라날 실뱀장어”는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봄은” 어김없이 오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과 사랑 자체는 그런 것이다. 사랑의 대상은 우리 곁을 떠나거나 사라질 수 있어도 사랑 그 자체는 소멸될 수 없다. 도시의 우리들은 실뱀장어 자체가 모두 소멸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체념으로 그물을 걷어버리고 봄을 믿지 않는다. 도시가 춥고 어두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곳에선 아주 위험하게도 사랑 자체가 죽음 직전의 “빈사(瀕死)”(p.15) 상태에 처해 있다.
사랑 자체에 주목할 때 기다림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며 그것은 우리들의 사랑이 얕은 표피적 측면의 풍요나 화려함을 넘어 내면으로부터 영그는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빛은 「백제 그릇」이 보여주고 있다.

모름지기 초벌구이로 참아야
손때가 지워지지 않는 법
미움을 시간에 개어
사랑을 빚던 그 마음
은밀하게 불과 살을 섞나니
긴 세월 흘러도 다사로움 식지 않고
안으로 삼킨 빛깔 밖으로 흘러
봄날이 환하다
눈 부시다
─「백제 그릇」

백제 그릇의 빛깔은 그렇듯 세월을 “안으로 삼킨” 오랜 기다림을 통하여 영근 사랑 자체의 채색이다. 기다림을 사랑의 다른 이름으로 내면화한 그의 시선은 이제 대상의 겉이 아니라 속을 보는 힘을 갖기에 이른다.

눈 개인 아침
산은 굵은 뼈를 하얗게 드러낸다
─「눈 그친 산」에서

도시의 우리들은 겉, 즉 눈이 가져다주는 눈부신 하얀 빛깔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강윤후의 시선은 그러한 겉이 아니라 산의 속을 파고드는 깊이를 얻고 있다. “곧게 일어서는 햇살 따라” 눈은 녹아 사라지지만 그는 그 사라짐에서 이제 사라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짙은 뼈를 안으로 녹여 들”이는 내면화된 삶의 전형을 본다. 그 순간 이제 사라짐은 없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이번엔 우리들 삶이 놓인다. 죽음은 하나의 단절이고 소멸이지만 그는 삶 속으로 죽음이 내면화되는 현실을 본다.

동구밖 느티나무가 쓸어담았던 어둠
슬슬 풀기도 전에
죽음의 길은 돗자리처럼 둘둘 말릴 테고
사람들은 또 밥을 먹고 땅을 파고
새끼들을 기를 텐데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슬픔도 괴로움도 희망도 그리고
미련마저도
다 살아 있는 날의 몫인데
─「바닷말 輓歌」에서

해리의 바다에서 사랑 자체에 주목하는 삶의 진정성과 그것을 통하여 이룩되는 내면화된 삶의 깊이를 배운 강윤후는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다. “대처(大處)로 난 발령장”(p.40)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 건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
열차가 한강을 건너고 있다
변기에서 물이 빠져나가듯
스무 살이 수월하게 멀어진다
─「서울」에서

그리하여 “열차가 서울역에 닿”았을 때 “매춘부처럼 호객하며” 그를 따라 붙은 “서른 살”(p.45)의 삶과 함께 이제 그는 다시 서울에 서 있다. 서울은 여전히 사랑과는 거리가 먼 도시이다. 때문에 이 도시에선 “무정(無精)의 홀씨”가 “분분히 날려”(p.50)갈 뿐이며 사랑의 수정이 이루어지질 않아 “바구니에 담긴 아이들”이 “한결같이 무정란(無精卵)처럼 보”(p.92)일 뿐이다. 이런 도시에서 “희망이란 삶에서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는 것”(p.49). 그러나 그는 해리의 바닷가 삶이 보여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서 기다림을 묽게 희석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p.62)어하며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알려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쓸쓸한 날에」에서

그러나 도시는 사막이다. 때문에 그곳에서의 기다림이란 쉽지 않은 법이다.

올곧게 세월을 견디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다시 쓸쓸한 날에」에서

사막을 갈 때 우리들이 시선을 주는 것은 모래 알갱이들이다. “모래 언덕들 사슬처럼 맞물려 흐르”(p.18)며 끝을 보여주지 않는 사막에서 우리의 시선이 모래에 집착할 때 목의 갈증은 깊어지며 걸음걸이는 다리의 무게를 이길 수 없다. 우리와 달리 낙타를 몰고 사막을 가는 대상(隊商)들은 고개를 들고 시선을 지평선에 둔다. 그들은 모래에 시선을 앗기고 초조해하며 목의 갈증을 부여잡는 것이 아니라 지평선을 바라보며 하늘의 별이 이르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강윤후는 그 걸음걸이를 “시”의 이름으로 익혀놓고 있다.

끝간 데가 도로 처음에 닿아
사막의 바깥이 다시 사막인들 어떠랴.
그저 타박타박 걸어
신발 밑창이 닳고 발바닥이 문드러지고
발목으로 견디다 무릎까지 깎여나가고 그러다
몸통만 남더라도 시선은 어차피 지평선인 것을.
─「라마단」에서

그리하여 그는 모래 속으로 묻히지 않는다. 이 도시의 건조하고 깊이없는 삶 속으로 함몰되지 않는다. 그는 “가루로 흩날리”며 사막의 “지루한 침식을 견뎌”(p.85)간다. 그리고 기다린다. 이제 그의 기다림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 대한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 속에 서면 사랑은 이미 그와 함께 있다. 「성북역」이 바로 그 기다림의 구체적인 공간이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다가
나는 알게 되었지
이미 네가
투명인간이 되어
곁에 서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불어 기다리기로 한다
─「성북역」

강윤후는 말한다. “이제 열차는 종착역에 닿아 멎”겠지만 “성북/거기에 가면 기약없는 내 기다림 아직/우두커니 남아 기다”릴 것이며 “어리석은 내 기다림/거기서 또 다시/시작”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믿’(p.95)음이 그의 시를 받치고 있는 힘이다.
도시의 우리들에겐 체념으로 쉽게 잊고 다시 시작하는 길이 아주 낯익은 길이며 또 가깝다. 그러나 강윤후가 ‘너’에게로 가는 사랑의 길은 그와 달리 기다림으로 걷는 가장 먼길이다.
(강윤후, 『다시 쓸쓸한 날에』, 문학과지성사, 1995, 시집 해설)

**이 시집은 현재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다.
집에 한 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없었다.
중고 서점에서 어렵게 구하여 다시 갖게 되었다.

2 thoughts on “‘너’에게로 가는 먼 길 — 강윤후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

  1. 우왁..제가 드디어 이렇게 긴 서평(맞나요?)을 다 읽었습니다.
    다시 읽어봐야 할 부분이 몇몇몇개^^되지만 좌우지간 다 읽었고
    비내리는 염전 얘기는 완전이해 했습니다.
    지금 제 머리를 쓰담쓰담 하고 있습니다.
    오래 살고 볼일입니다.
    예전에 이렇게 긴 서평을 보는 순간 헠 하면서 도망갔거든요
    읔 뭐라는지 도통 모를 골치아픈얘기 하면서..
    오래살고 볼 일입니다.

    1. 요건 서평은 아니고 시집 해설.
      시집 뒤에 실리는 거예요.
      서평은 그냥 문학 월간지에 쓰는 것들이예요.
      둘이 구분은 잘 안가는데 시집 뒤에 실려있으면 해설이나 발문이라고 보면 되요.

      시집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찾아보니 없더라구요.
      중고 서점에도 없구… 그러다 그녀가 교보에서 책주문해놨다고 결제하라고 해서 들어갔다가… 김소연이란 이대흠 시집도 함께 하고 생각난 김에 중고 서점에서 강윤후라고 검색을 했더니 이게 한 권 있다고 나오는 거예요. 책값은 3500원이라고 나와 있는데 우송료까지 8000원이나 들었어요.
      시집 구한 기념으로 올렸다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따 봐요. 3시니까 잘 맞춰서 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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