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몹시도 오던 날,
그 빗속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 날은 마음이 울적했거든요.
그래서 내 마음의 우울을 비에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이 우울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하고 말이죠.
처음엔 빗발이 가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여유가 있었죠.
우산을 받쳐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천천히 길을 걸었습니다.
걷다보니 논뚝에서 강아지풀이 고개를 숙이고
코끝에 물방울 하나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길가의 분홍빛 꽃한송이엔
분홍의 꽃몽오리가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그 끝엔 또 물방울이 투명하게 영글어 있었습니다.
무궁화도 비에 젖어 있더군요.
이상하게 비에 젖으면
꽃은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햇볕이 화창한 날
우리가 보는 꽃의 색은 겉의 색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비에 젖으면
꽃이 가진 내밀한 속의 색이 물에 녹아나오고
그래서 비에 젖은 꽃은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느낌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비오는 날 비로소
꽃이 그 내면에 고이 간직해둔 속의 색을 볼 수 있는 거겠죠.
습지생태공원의 연꽃잎 위에도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려 꽂히고 있었습니다.
빗줄기의 등쌀에 어찌나 심하게 볶였던지
연꽃잎의 한가운데 모여 잠시 휴식을 가지려던 빗물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한순간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물이 흘러들던 곳에서 오히려 물이 솟아 오릅니다.
물은 평상시엔 그곳으로 몸을 감추고 소리없이 지하로 길을 가지만
비가 굵은 오늘, 더 이상 지하에선 못살겠다며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하수구의 한귀퉁이에서 퐁퐁 솟고 있는 물이
그런데로 맑은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원래 길은 오가는 방향을 분명하게 갖고 있지만
이제 빗물은 그 길의 방향을 따르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땅이 꺼졌다 싶으면
그곳은 빗물의 차지가 되고 맙니다.
길의 한가운데를 뚝 잘라 누런 황토물을 끌고 길을 횡단합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비로소 얼굴을 내밀고 도로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가 있습니다.
평상시 궁금증 많은 풀잎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던 철망 사이로
오늘은 물줄기가 작은 폭포를 이루며
도로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비가 퍼붓는 날,
비로소 얼굴을 내민 그 물줄기를 보고 있노라니
그게 마치 우리들 인간의 잠재의식처럼 보입니다.
잠재의식이란 평상시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의 의식 저 아래편에 웅크리고 있는 의식을 말하는 거죠.
가령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가끔 자식이 속을 썩이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으이구,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속상하면 못할 말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그 말이 일종의 피해의식에서 나온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피해의식은 평상시엔 잠재의식으로 우리의 의식 저 밑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게 있는지도 모르죠.
사실 따지고 들면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왜 없었겠어요.
아마 그냥 아이가 방긋 웃어주는 순간만으로도
하루가 내내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을 거예요.
말하자면 부모로서 아이한테서 얻었던 행복을 곰곰히 꼽아 두었다면
그 행복은 부모로서 아이에게 해준 그 많은 것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컸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이를 키울 때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면서
사실은 아이를 키우는 행복감으로 이미 그 보상을 챙깁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도
실망감이나 서운함은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준 것만 기억하고 자신이 챙긴 행복감을 잊어버리면
그 망각이 어느덧 우리의 내면에서 피해의식을 키웁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잠재의식으로 우리의 의식 저 아래편에 쌓이게 됩니다.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사랑함으로써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합니다.
짝사랑이 아닌한,
그 사랑의 상당 부분은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채워줍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우리는 자꾸만 내가 손해보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상대방이 주었던 그 행복감을 서서히 잊어가는 거겠죠.
그러다보면 해준 것 없이 얄미운 것이 아니라
해준 것이 너무 많아서 얄미워지게 됩니다.
나는 그게 피해의식으로 우리의 의식 저 아래쪽에 잠재의식으로 쌓인다고 봅니다.
아마도 그러다가 비가 심하게 오는 날 도로로 터져나온 물줄기처럼
둘의 사이에 갈등이 심하게 빚어진 날,
그 피해의식이 바깥으로 터져나올 수 있겠죠.
그러면 둘의 사이는 아주 심각해지고 맙니다.
물은 지형의 높낮이를 귀신같이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길에 아무리 가야할 길의 방향을 엄격하게 그어놓아도
결코 그 방향으로 길을 따라가는 법이 없습니다.
지형의 고저에 따라 물은 횡단보도가 없는 곳에서도
막무가내로 길을 가로지릅니다.
우리의 잠재의식도 한번 터지면
가야할 길의 방향은 완전히 무의미해집니다.
그리고 물의 기세가 거세지면
아예 길을 잘라내 버립니다.
이번 호우로 강원도 곳곳에서 잘려나간 길들을 보니
문명의 이름으로 길을 닦으면서
자연에 내재한 잠재의식의 무서움을 생각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폭우 속에서 자연의 잠재의식이 거센 물줄기로 터지면
그 물줄기는 길을 따라가지 않으며,
종종 길의 허리를 뭉텅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물줄기가 거세지면 조용히 순서를 기다리지 못합니다.
통로가 비좁아 미처 빠져나가질 못하자
물줄기는 아예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아마도 처음 빗줄기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을 때,
그것은 목의 갈증을 식혀주는 청량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센 물줄기로 흐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것은 생명을 짓밟는 무지막지한 발길이 되고 맙니다.
그 앞에서 벼들이 모두 다 쓰러져 수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평상시 다니던 길은
물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나는 물을 철벅거리며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오는 날의 버스 정류장은 버스를 기다리는 곳이라기보다
비를 피할 수 있어 더욱 반가운 곳입니다.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들어가 잠깐 비를 피했습니다.
버스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고,
그냥 비를 피할 수 있는 여유가 그곳에 있었기에
우산을 접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비를 피할 수 있는 이런 곳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아주 당혹스럽습니다.
비오는 날은 모든 것이 비에 젖습니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바지는 거의 무릎 위까지 물에 젖었고,
우산이 가려주지 못한 잠깐의 사이에 빗줄기가 등을 파고들어
등쪽도 축축한 기운이 역력했습니다.
물길을 오다보니 신발 속에서도 물이 질퍽거리고 있었습니다.
신발을 벗어 양말을 벗고, 그리고 양말의 물을 짜냈죠.
물은 두번이나 짜내야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벗어놓은 신발에서 모락모락 솟아오른 하얀 김이었습니다.
오호, 신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신발 속엔 나의 체온이 따뜻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쉬며 신발을 벗어놓고
물에 젖은 양말의 물을 짜내는 동안
신발 속에서 솟아오른 하얀 김은
내가 그 빗속을 걸으며 온통 비에 젖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내 온기로 비에 젖은 옷과 신발을 말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내가 비를 말릴 체온마저 잃는다면 그때는 정말 큰일이겠지요.
하지만 이제 보니 빗줄기에 아무리 젖어도
내게 그것을 조금씩 말리며
해가 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체온만 있다면
비오는 날도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마음 한쪽의 우울이 조금 걷히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음 번 비가 올 때 다시 빗속을 걸을 수 있도록
신발을 잘 말려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