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동생이 아이 데리고 어린이 대공원으로 놀러왔다. 아이 이름은 지빈이다. 집에 왔을 때 한번 같이 논 적이 있었는데 몇 달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놀랍게도 그때 아이랑 즐겼던 놀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아이는 그 놀이만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그 놀이는 별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인간 도미노 게임이었는데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다가 가운데 앉아 있던 아이가 팔을 벌리고 뒤로 넘어지면 옆에 있던 우리도 다 함께 뒤로 넘어지는 것이었다. 그 지극히 단순하기 이를데 없는 게임을 아이는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물론 우리는 나중에 침대를 자동차로 삼아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뒤 엄청난 질주를 감행했고 커브를 돌 때마다 일제히 한쪽으로 몸이 쏠리곤 했다. 일반 자동차는 속도가 자동차 자체에서 나오지만 침대 자동차는 속도가 우리의 몸과 입에서 나왔다. 심지어 그 날 침대는 배로 변신을 하기도 했다. 침대의 주변으로 온통 바다가 펼쳐졌고, 우리는 방에서 얼마든지 바다로 뛰어내릴 수 있었다. 몇 달만에 만난 아이였지만 아이는 그때의 놀이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몇 달만에 그 아이를 만났다. 놀이를 지켜보는게 즐거웠다.
후문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바람같이 뛰어온다.
너무 반가우면 우리는 그냥 사람을 맞지 않는다.
바람의 손을 잡고 함께 달려와 사람을 맞는다.
바람의 손을 잡고 달리는 것은 빨리 달리기로는 역시 바람이기 때문이다.
뛰어오는 걸음만으로 아이의 반가움을 알 수 있다.
뛰어온 지빈이보고 이제 조금 더 크면 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처음에는 기고, 그 다음에는 걷고, 그러다 뛰게 된다.
그 다음 순서는 당연히 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바람과 손을 잡고 뛰는 것이다.
뛰는 것은 바람과 손을 잡고 배우는 나는 것의 걸음마이다.
아이가 깔깔 웃었다.
일단 놀이공원을 찾았다.
가기 전에 나는 분수대를 보고 누가 수도공사를 잘못해서
물이 줄줄 센다고 걱정을 했고 지빈이는 그 얘기에 또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런 내 유머가 다 통하다니.
물고인 웅덩이 옆을 지나칠 때는 누가 실례를 했다고 코를 막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아이가 겁이 많아 아슬아슬하고 짜릿함이 넘치는 건 잘 타질 않는다.
아주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대체로 비싸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듯이 움직이는 전기 동물차를 탔는데
동물들은 기듯이 움직였지만 나는 그것에 치이기도라고 할 듯
황급하게 그 동물들을 피해야 했다.
빨간 단추를 누르면 후진을 했는데
아이는 가끔 그 빨간 단추를 누르는 즐거움을 가장 재미있어 했다.
공룡을 두 번 탔고, 강아지를 한번 탔다.
강아지를 탈 때는 왈왈 거리며 소리를 내자고 했지만 그 말은 듣지 않았다.
아무래도 개소리하기는 싫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개들은 자기 소리가 정말 싫겠다.
어떻게 소리를 내도 개소리가 되니.
관찰해보니 유난히 분홍색을 좋아했고,
동물로는 코끼리를 아주 좋아했다.
코끼리 비행기를 한 번 탔고, 코끼리 그네 또한 한번 탔다.
모든 코끼리가 분홍빛이었다.
놀이동산에 이어 동물원으로 향했다.
우리는 사자 우리 앞에서 사자보고 한 마디 했다.
사자, 쟤는 쇼핑광이야.
매일 사자고만 해.
우리 때문에 졸지에 사자는 지름신을 영접한 동물이 되고 말았다.
사자 우리 앞에서 지빈이랑 사진 한 장 찍었다.
사자가 바로 뒤로 보인다.
오래 간만에 찾았더니 우리(cage)가 유리로 바뀌어 있었다.
유리로 막혀 있어도 너무 확연하게 가까이 있으니 좀 무서웠다.
물론 아이도 가까이 가는 건 좀 무서워했다.
약간 떨어져서 찍었다.
걸음 하나가 무서움을 걷어내 주었다.
곰 아저씨가 운전하는 얼룩말 지프에서 가족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앞의 아이는 모르는 아이이다.
사진찍는다니까 좋아서 내려갈 생각을 않는다.
그냥 찍었으면 가족의 추억으로만 남았을 텐데
그 아이 때문에 한 번 더 웃을 추억거리를 장만했다.
나중에 사진보다 우리는 말할 것이다.
이 얘는 누구야?
몰라, 우리도.
그런데 왜 같이 찍었어?
우리가 사진찍으니까 아주 좋아하면서 떡하니 가운데 앉아서 같이 찍더라.
곰 아저씨도 그참 친화력 엄청나게 좋은 녀석이네 하는 표정이다.
우리의 사진 속에서 끝내 버틴 아이는
두고주고 우리의 얘기 거리가 되어 즐거움을 안겨줄 것이다.
지빈이 아빠는 아이가 혹시 넘어져서 다치지나 않을까가 걱정이다.
계단 내려가는 아이의 손을 황급히 잡았다.
걱정과 보살핌은 부모의 첫번째 책임이자 의무이다.
달팽이 앞에서 지빈이가 V자를 그렸다.
이 달팽이는 여자 달팽이가 분명한 듯하다.
이 사진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있었다.
건너 편 원숭이 우리의 벽에 뱀이 한 마리 그려져 있었는데
지빈이는 그걸 보고 도마뱀이라고 소리쳤다.
그게 맞다면 그건 세상에서 제일 긴 도마뱀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건 도마뱀이 아니라 분명 그냥 뱀이었다.
엄마랑 같이 낙타를 탔다.
낙타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이 파리채를 들고
열심히 파리를 잡아주며 낙타를 끌고 간다.
낙타가 워낙 예민해서 파리가 앉으면 견디질 못한단다.
하긴 사막에 살 때는 목의 갈증은 심했어도
파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겨울산을 즐기는 편인데
그건 겨울산은 춥기는 하지만 날파리와 뱀이 없기 때문이다.
여름산은 초록이 무성하여 좋기는 한데 날파리로 성가시기 이를데 없다.
그러니까 낙타는 사막은 좋아하고 나는 겨울산을 좋아한다.
날파리만 아니라면 낙타나 나의 기호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낙타를 타고 난 뒤 잠시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근처 식물원 화장실에 갔다가 저희 엄마보다 먼저 나온 아이가
낙타타는 곳에 아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로 달려간 것.
그 사이 나는 근처의 꽃밭에서 꽃을 찍고 있었고,
아이 아빠는 엄마랑 같이 들어갔기 때문에 안심하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이 하나에 어른이 셋이다 보니 다들 다른 사람을 믿고 방심했다.
그 방심의 사이로 아이는 미끄러지듯 새어 나갔다.
아이랑 같이 다닐 때는
어른이 셋이 아니라 넷이어도 모두가 아이에게서 눈을 떼선 안된다.
다행히 아이는 낙타타는 곳에 아빠가 없자 곧바로 식물원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아이도 놀랐는지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져 있었다.
셋이 있으면 아이를 놓치지 않을 것 같지만
서로 믿는 마음에 오히려 아이를 놓칠 때가 있다.
놀란 마음은 신나는 놀이로 잊어야 하는 법.
우리는 다시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는 그냥 노는 곳이 아니라 사실은 아이들이 놀이를 창조하는 곳이다.
미끄럼틀만 해도 그렇다.
아이는 그냥 미끄럼틀을 타지 않는다.
처음엔 엉덩이를 붙이고 얌전히 미끌어지는 정석을 즐긴다.
그 다음엔 거꾸로 기어올라갔다 내려오는 반전의 재미를 즐긴다.
이어 엉덩이를 붙이지 않고 한발은 뻗고 한발만 바닥에 대고는
몸을 반쯤 세워 보드 타듯이 미끄럼틀을 즐긴다.
어떤 녀석을 배를 대고 엎드려 타는 녀석도 있다.
미끄럼틀은 앉아서 미끄러짐을 즐기는 놀이기구가 아니라
온갖 종류의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광장이 된다.
아이를 놀리도록 하시라.
그럼 아이들이 놀이에서 창조력을 키울 것이며
그런 아이는 나중에 공부도 놀이하듯이 하게 될 것이다.
내 말은 공부가 지겨워질 때쯤
공부를 즐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낼 것이란 소리이다.
아이에게 공부의 정석을 강조하면 아이는 창조력을 잃고 공부를 지겨워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기르려 하지 말고
공부를 즐겁게 하는 아이로 기르시라.
그 첫걸음은 아이를 실컷 놀려 즐겁게 창의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스프링 오리를 타고 놀았다.
스프링 위에 오리가 놓여있어 타고 앞뒤로 끄덕거리는 놀이기구이다.
그런데 아이는 어디 숨을 곳도 없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숨바꼭질 놀이에 들어간다.
우리는 숨을 곳이 있어야 숨바꼭질을 할 수 있지만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우리가 보이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얼마든지 숨을 수가 있다.
지빈이가 고개를 숙인 그 순간
우리는 앞에 두고도 아이를 찾질 못한다.
아이 때는 고개를 숙일 공간만 있으면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다.
어느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아이들만의 능력이다.
아이가 어릴 때 그 신비한 능력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시라.
그네도 다양한 놀이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앉아서도 탈 수 있고, 서서도 탈 수 있음은 물론이고,
술취한 듯 옆으로 비틀거릴 수도 있다.
우리 지빈이도 앉아서 타고, 서서 타고, 옆으로 비틀거리면서
온갖 그네 놀이를 창조하고 나서야 그네에서 내려왔다.
집으로 가야 하는 시간.
카메라를 손에 들려주었더니 차의 앞창에 비친 세상을 찰칵찰칵 찍어본다.
사진보니 천호대교 건너 막 천호 사거리로 진입할 때쯤이다.
떨어지기 싫어했다.
자기네 집에 같이 가자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우리 동네 가서 놀아야 한다고 했다.
나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아서 ‘외삼촌 잘가’하고 해보라고 했다.
그럼 외삼촌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여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엄마가 해보란다.
아이 엄마, 그러니까 막내 동생이 “오빠 잘가”했고
나는 “그래 오늘 즐거웠다.
지빈이랑 가서 맛있는 거 먹고 더 놀아주거라. 안녕”이라고 답했다.
바로 이렇게 헤어지는 거야.
우리 지빈이도 해보자.
그랬더니 엄마보고 한 번 더 해보란다.
막내 동생과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더 헤어져야 했다.
물론 헤어질 때마다 대사는 바꾸었다.
그 세 번의 이별 연습 끝에서 지빈이는 내게 안녕이라고 말했다.
나도 안녕을 했으며, 손을 흔들어 아이를 보냈다.
아이들과 노는 것은 역시 재미나다.
아이는 놀면서 창조하고 또 배운다.
세상의 어른들이 아이들과 재미나고 즐겁게 놀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