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고 글을 쓴 최영선은 이 사진을 지리산 둘레길에서 얻었다고 했다. 그가 전한 얘기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 사진은 “창원마을로 넘어가는 등구재 밑 상황마을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그냥 눈앞에 보이는 언덕만 넘으면 되겠지, 그 정도야 금방넘을 수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지만 그의 걸음 끝에서 밀려간 시간은 두어 시간을 넘기고야 말았다. 어두운 산길에서 시간이 중첩되면 그 시간은 두려움을 함께 몰고 온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 길은 “예전 같았으면 둔갑한 여우나 호랑이도 만날 수 있을 법한 길”이었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보일 듯 말듯 어두운 시야를 집중하며 걷던 기억이 새롭다”고 했던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불도 밝히지 않고 그 길을 걸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내게 “언제 시간되면 밤에 등구재 한번 넘어보라”고 권했다.
아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의 둘레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같은 길을 가도 사람들이 만나는 풍경은 다르다. 시차가 벌어지면서 풍경이 미세하게 바뀌기도 하지만 시간을 겹쳐 똑같은 길을 함께 걸어도 눈을 두는 곳이 다르다. 같은 길을 간다고 같은 풍경을 보게 되는 여행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찌보면 여럿이 함께 떠나도 나만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여행이다. 그렇게 최영선도 그만의 길을 걸었을 것이며, 그렇게 홀로 길을 걷다 등구재를 넘어가면서 풍경 하나를 만났을 것이다. 그 풍경은 그의 걸음을 멈춰 세운다. 겉으로만 보면 그 풍경은 저녁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에 감나무에 붉게 익은 감이 몇 개 달려있고 가지 위로 초승달이 떠 있는 풍경이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그런 풍경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영선이 본 것은 그런 풍경의 겉이 아니었다.
깊은 가을,
초승달은 보름을 기다리고
해거름에 검게 익은 감은 겨울을 기다린다.
저 초승달이 한 번 자고 나면
이제 슬슬 시린 겨울을 준비해야겠구나.
─최영선, 「겨울로 가는 길」 전문
그의 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기다림이었다. 등구재를 올라가려는 그의 눈에 두 개의 기다림이 보였다. 두 기다림 중 하나는 초승달이 보여주고 있었다. 초승달은 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보름을 만나려면 매일 그 자리에 나와 며칠을 더 서성거리며 기다려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감의 기다림이었다. 감은 붉게 익어있었지만 저녁해가 지면서 밀려든 어둠이 감을 검게 채색해놓고 있었고, 이제 그렇게 하여 “검게 익은 감”은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기다림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지리산 자락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풍경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서 기다림을 만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풍경을 만나는 여행도 좋지만 그 풍경 속에서 기다림을 만나면 여행길은 훨씬 더 풍요로워진다. 풍경은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만 기다림이 모든 사람에게 열리는 것은 아니다. 여행이란 풍경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그 풍경의 품에서 열리는 또다른 무엇인가를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최영선에게선 그것이 기다림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겐 그것이 무엇이 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여행이 그냥 풍경에서 끝나지 않고 그 뒤로 넘어가길 바라는 소박한 바람으로 사진 한 장과 그 사진이 담고 있는 풍경 너머로 넘어간 글 한편을 실어놓는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풍경을 즐기는 한편으로 그 너머로 넘어가는 풍요의 시간을 보내길.
(2010년 11월 22일)
**인용된 시와 사진이 수록된 책
『성모기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성모기사회, 2010년 11월호, p.2
2 thoughts on “초승달과 감이 전해준 기다림 ─ 최영선의 시 「겨울로 가는 길」”
겨울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떨어진 감도 아까워서 그것을 모으고 잘라 말려서 저흰 ‘감또개’라는 곶감 비슷한 걸로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껍질채 잘라 만든 것이라 겉은 껍질의 식감과 안은 곶감처럼 쫀득이는 것이 묘한 질감의 맛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껍질의 약간 텁텁하고 약간 떫은 맛과 속의 쪽득하고 달콤한 맛을 잊을 수가 없네요. 특히 부모님이 꽂감을 정말 꽂감 빼먹듯이 빼먹는 아이를 위해 유인용 먹이?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곶감은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올려 놓고 밑에 광주리에 널어 말려 아이들은 먹이감에 걸려 들 수 밖에 없는… 갑자기 감보고 그 생각이 나네요.
담달에 지리산 둘레길 갈 일정이 생겼는데 그때 아마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좋은 추억들을 많이 갖고 계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