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딸이 다니는 학교에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도쿄까지 날아온 아빠에게 시간을 내주지 못하고 있던 딸은
오늘 오후에는 1시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다.
만나서 같이 점심 먹기로 했고 그래서 딸은 오늘은 도시락을 싸지 않았다.
오전에는 일을 했고, 만나기로 한 시간은 2시 30분이었지만
나는 그 시간을 오후 두 시로 착각을 했다.
딸은 1시간 정도 걸리니까 너무 일찍 나올 필요 없다고 했다.
지리를 잘 몰라 길을 나서면 약간 걱정이 앞서는 내겐
넉넉하게 여유를 두는 것이 그 불안을 어느 정도 잠식시킬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남으면
얼마든지 사진찍으면서 시간보낼 수 있는 것이 나이니까.
나는 넉넉하게 시간을 둘 요량으로 12시에 집을 나섰다.
딸의 집은
아침마다 햇볕이 창으로 몰려와
환하게 물결로 일렁이는 집이다.
햇볕이 물결치는 집, 그게 딸의 집이었다.
난 아침마다 두 개의 커튼 중 안쪽 커튼을 걷어
햇볕의 물결을 바깥의 얇은 커튼에 잔뜩 적셔두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도쿄에 와서 두번째 맞는 아침이었지만
그 햇볕의 물결을 오늘에야 처음 보았다.
딸의 집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의 한쪽 구석으로 과일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자리는 건물과 건물 사이여서 아주 옹색하다.
그 옹색한 자리를 비집고 들어서서
내가 문을 열기만 하면 초록을 선물하고 있는 나무가 바로 이 나무이다.
무슨 나무인지는 잘 모르겠다.
귤로 보이기도 하고, 오렌지로 보이기도 한다.
주변이 모두 콘트리트 건물이라 딸의 집에 있는 동안
이 나무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나가는 길에 나무 밑으로 가 열매 사진을 하나 찍어두었다.
전철타러 주조역으로 가다 보니
첫날 밤에 올 때는 보지 못했던 제단 같은 것이 보인다.
우리의 옛 성황당 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나이든 할머니가 이 앞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가는 것을 한 번 보았다.
도시는 이런 것들을 대부분 집어 삼키고 마는데
이런 것이 도시 한가운데 버젓이 있다는 것이 조금 놀랍기는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일본에서만 이런 것이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나는 동숭동 대학로의 뒷골목을 올라가다가 그곳에서
현대 문명을 비웃으며 여전히 건재하게 살아있는 백마장군을 본 적이 있다.
하나는 버젓이 드러나있고 하나는 다소 은폐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농촌에서 성황당을 다 없애버리며 쫓아내려고 했어도
쫓아내지 못한 옛영혼들이 도시에서도 살아남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도쿄에 와서 낮에 거리에 나온 것은 사실 오늘이 처음이다.
첫인상을 밤풍경으로 익힌 때문인지
이게 역으로 가는 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다.
가로등에 걸려있는 깃발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주조역으로 가는 길이 맞냐고 누군가에게 물었을 듯하다.
마치 생전 처음 가는 길인 듯한 느낌이었다.
밤풍경과 낮풍경을 한 골목에 익숙하게 겹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돔형 지붕을 얹고 있는 주조 시장으로 들어오자
이제 기억은 이곳이 아주 낯이 익다는 반가운 반응을 보였다.
첫날밤 이곳을 상당히 자주 드나 들었다.
밤이라고 해도 자주 드나든 곳은 낮에 보아도 낯설지가 않았다.
저 끝의 출입구를 나가면 곧바로 주조역이다.
형광등이 밝혀주던 시장은
이제 투명한 지붕으로 새어든 햇볕이
환하게 밝혀놓고 있었다.
자연 조명이 좋기는 좋다.
한 아주머니가 데리고 나온 개를
한 할아버지가 쓰다듬어 준다.
아주머니는 등을 돌리고 있다.
보통 이런 경우 개가 대화의 메신저가 되어 주는데
아직 이 개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보다 개와 사람이 더 친해진 세상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런 경우를 몇 번 보았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은 개를 먼저 반가워하고
그 다음에 사람과 얘기를 나눈다.
개가 없다면 대화의 물꼬를 트기가 어려웠을 사람들이
개 덕분에 인사를 나눈다.
개는 때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중간에 서서
대화를 서로 이어주며 잠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전철역의 건너편으로 건너가려면
역 안에 있는 육교를 이용해야 한다.
육교 위에서 보니 도쿄에 오던 첫날밤 내가 건너다녔던 건널목이 보인다.
이리로 가면 신주쿠로 가게 된다.
오고가는 철로만 있는 단촐한 역이다.
나는 헷갈리지 않아서 좋았다.
도쿄의 역은 대부분 매우 복잡하여 머리 속이 와글거릴 때가 많았다.
딸이 아침에 나갈 때 학교까지 가는 방법을 자세히 적어주었다.
무슨 보물지도처럼 소중하게 손에 들고 다녔다.
딸은 주조에서 신주쿠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두 정거장 간 뒤
이케부쿠로에서 내리라고 했다.
이케부쿠로에서 내린 뒤엔 5, 6번 타는 곳으로 가서
다시 신주쿠행 전철을 타고
또 두 정거장을 가서 다카다노바바역에서 내리라고 했다.
딸은 주조에서 이케부쿠로로 가는 전철은 영어로 안내를 하지 않는데
그 다음부터 타는 전철과 지하철은
영어 안내가 나오기 때문에 편할 것이라고 했다.
딸의 말대로 이케부쿠로에서 바꿔탄 전철에선 영어 안내가 나왔다.
다카다노바바에서 내리면 아예 와세다 출구라는 것이 있을테니
그걸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정말 와세다 출구가 있었다.
표를 내고 전철을 완전히 빠져나와 지하철로 바꿔타게 되어 있었다.
조금 미심쩍어 지하철을 타면서 이게 와세다로 가는 거 맞냐고 했더니
일본말로 안내를 한다.
내가 어떻게 알아들으라고.
나중에 딸아이에게 물었더니 1번 승장장에서 타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와세다는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이었다.
두 정거장 타고 내리고, 또 두 정거장 타고 내리고,
그 다음엔 곧바로 다음 정거장이었다.
2-2-1 시스템의 통학 코스라고나 할까.
지하철은 우리와 비슷한 듯 한데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옆 객차가 훤히 보이도록
사이의 중간문을 모두 유리로 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탄 지하철만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어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와세다역에 내리니
와세다 대학 방면 개찰구라고 되어있다.
딱 1시간이 걸렸다.
딸과 만나려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내가 약속 시간을 착각했기 때문에 사실은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1시간이라는 여유 시간을
학교를 간단하게 돌아보는데 이용해보리라 생각하고 역을 빠져나갔다.
지하철을 빠져나왔더니 사거리가 있다.
건너편에 신사로 짐작되는 곳의 입구가 보인다.
이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와세다 정문이고
왼쪽 방향으로 가면 와세다의 문학부 캠퍼스가 있다.
이 사거리를 중심으로 캠퍼스가 엇갈리게 나뉘어져 있는 셈이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정문으로 향했다.
딸은 문학부 캠퍼스에서 수업을 듣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와세다 정문으로 가는 길이다.
차가 많이 다니진 않았다.
나는 차가 없는 한가한 틈을 타 차로로도 좀 걸어 보았다.
가다 보니 와세다 학교 버스로 보이는 버스가 한 대 온다.
자주빛이 와세다의 상징적인 색깔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색은 내가 좋아하는 색이다.
나중에 버스의 색에 대해 물으니 그게 학교의 상징색이 맞다고 했다.
와세다역에서 와세다 대학의 정문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학생들이 한가한 시간인 듯 그렇게 붐비지도 않는다.
교문은 그냥 수수했다.
차는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는 듯하다.
차의 통로는 따로 마련되어 있는 듯 싶었다.
와세다 대학의 정문은 사람들 만을 위한 문으로 보였다.
하지만 내가 정문으로 착각한 이 문은 사실은 정문이 아니었다.
이 문은 와세다의 남문이었다.
달리 정문으로 생각할만한 문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이 문을 정문으로 착각을 했다.
나는 이 남문 앞에서 잠깐 동안 감회에 젖었다.
사람에 따라 누가 다닌 대학인지에 대한 감회가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내겐 내 딸 문지가 다니는 대학이었다.
2 thoughts on “주조에서 와세다까지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3-1”
저랑 긴밀하게 이야기 할게있어요
저도 사진을 많이 찍잖아요. 님에게는 물론 비교도 안되지만.
그……
로 인한 미간의 주름 좀 어떻게….그게 더 프로로 보이려나?
나….아직 시집못간 여잔데….^^
잘지내시죠?
님의 블로그에 저 진짜 잘 못들어와져요. 왜그런거죠
블로그에 가서 비밀글로 답남길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