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을 1시간이나 남겨두면
그건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 되기 마련이지만
자리를 지켜야 하는 기다림이 아니라면
주변을 돌아보면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
더구나 딸이 다니는 대학의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일찍 도착한 시간을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으로 쌓아놓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일찍 도착하여 남는 시간을
혼자 여유있게 와세다 캠퍼스를 돌아보며 보냈다.
남문으로 들어가자 건물들 옆으로 은행나무가 늘어서서 반겨준다.
건물은 사람을 가로막는 느낌이 드는데
나무는 걸어가면 함께 걷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는 땅 위로 걷고 나무는 땅 속으로 걷는 신공을 가졌다.
교정에 나무가 상당히 많았다.
설립자인 오쿠마 시게노부의 동상이 있는 곳이다.
일종의 광장 구실도 하는 듯싶다.
학생들이 모여있어서 무얼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가까이 가보니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다.
대학 다닐 때 교정의 잔디밭에서 도시락 까먹어 본 적은 있어도
라면을 끓여먹어 본 기억은 없다.
라면도 컵라면이 아니라 아주 휴대용 가스 버너로 봉지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학생들이 많아서 연신 끓여대는 것 같았다.
나중에 딸에게 얘기했더니
자기도 그곳에서 라면 끓여먹는 아이들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일본에서 와세다를 2년이나 다닌 딸도 못본 광경을 보았다.
은행나무가 아주 곱게 물들어 있다.
멀리 보이는 건물은 오쿠마 강당이다.
설립자 이름이 오쿠마여서 그런지 그의 이름이 붙어있는 건물이 상당히 많다.
남문으로는 차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되어 있는 듯했고
이 오쿠마 강당의 앞으로 나있는 길을 타고 와서
교정으로 들어오는 듯하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곳을 정문이라고 하는 듯했다.
달리 문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서
한 남학생이 책 속으로 깊이 빠져있다.
노란 가을이 그의 책속에 어른거리고 있을까.
벤치에 누워 잠자는 학생도 보았다.
그의 꿈이 지금 노란 빛깔로 일렁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쿠마 강당의 앞쪽 계단에서
학생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싸온 도시락같지는 않고 어딘가에서 사온 것 같았다.
여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점심을 먹는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도서관 앞의 야외 로비에서 먹고 있는 경우도 보았고,
심지어 주차장에서 먹고 있는 학생도 보았다.
주차장에서 먹고 있는 경우는 좀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좋고 아름다운 곳도 많은데 하필 쫓겨난 듯이 저기서 먹을까 싶었다.
그래도 누구에게도 개의치 않고 꿋꿋하게 먹었다.
유니 카페 125이다.
유니 카페는 단 하나의 카페란 뜻이 아니라 대학 카페란 뜻이다.
125라는 숫자는 2007년의 와세다 개교 125주년을 기념하여 붙인 것이다.
문을 열기는 2002년에 열었다고 한다.
대학 상점을 겸하고 있다.
나중에 여기서 티를 비롯하여 열쇠 고리 같은 기념품을 여러가지 샀다.
특이한 것은 티 셔츠 같은 기념품이 미국제였다는 것.
일본 사람들도 미제를 좋아하나.
카페 옆의 길을 따라 들어가 보니
정원이 하나 나온다.
입구를 찾을 수 없어 계속 들어갔다.
정원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를 찾았고
그곳에 청춘남녀가 앉아 데이트 중이시다.
나중에 딸에게 여기 정원에 들렀다고 했더니
거기가 국제학부 학생들의 데이트 장소라고 했다.
나는 그렇잖아도 그곳에서 연애 중인 남녀를 보았다고 했다.
와세다에서 국제학부는 영어로 강의를 한다고 한다.
오쿠마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
원래 앞쪽으로 정식 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닫혀있고
깊숙이 아래쪽으로 들어오자 작은 쪽문이 열려 있었다.
연애 중인 청춘남녀의 바로 앞으로 놓인 돌다리를 건너 정원으로 들어갔다.
정원의 나무들 여기저기에
가을이 붉게, 혹은 노랗게 찾아와 있었다.
붉은 가을이 더 눈에 띄었다.
이렇게 야자수가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이 남쪽 지방인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그다지 남쪽은 아닌 듯 야자수의 키가 아주 작았다.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는 인상도 받았지만
한편으로 나무들이 참 빡빡하게도 밀집되어 있다는 느낌도 든다.
붉은 단풍의 자리가 많이 좁아 보였다.
오쿠마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낙엽을 쓸고 있는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무어라고 일본어로 말하는데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일본어를 이해못한다고 영어로 말했다.
자연은 제 스스로를 가꾸고 키워가지만
정원은 그러고보면 노동의 산물이다.
정갈한 이 정원도 알고보면
쓸고 다듬어주는 손길 끝에서 그 아름다움을 얻었을 것이다.
자연이 아름답다고 말들하지만
일본의 정원을 보니 사람 손길이 많이 간 티가 난다.
자연의 아름다움도 때로 노동이 만들어낸다.
그 노동 앞에서 말이 통하질 않아 그냥 웃음 하나 나누었다.
정원은 인공으로 가꾸어진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연의 냄새가 난다.
정원 뒤로 우뚝 솟은 건물과 나란히 세워보면
정원이 선물하는 자연미는 더욱 확연해진다.
건물들은 위압적인데 정원은 그렇질 않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내가 학교 다닐 때 학교 뒤로 있었던 산이 생각났다.
산의 이름이 배봉산이어서 우리는 흔히 그 산의 이름을 놓고
남녀가 저 산에만 올라갔다 내려오면
여자애 배가 봉그랗게 되는 통에 배봉산이 되었다고
농담을 하며 낄낄거리곤 했었다.
와세다처럼 잘 가꾸어 놓은 정원은 없었지만
자연그대로를 공원으로 지닌 셈이었다.
뒤로 산을 두었다는 것이 학교 다닐 때 가장 좋았던 점이기도 했다.
혹시나 도쿄가 산이 드물어서
공원이나 정원이 많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파랑, 하양, 초록, 빨강, 황갈색이 층층으로 쌓여
색의 지층을 이루었다.
색이 고르기로는 하늘의 파랑이 제일이었고,
눈길을 끌기로는 역시 단풍의 붉은 색이 제일이었다.
뒤로 보이는 지붕 위에서는 누군가가 일을 하고 있었다.
이 가을, 나는 도쿄 오쿠마 정원의 가을을 즐기고
그 시간에 누군가는 지붕 위에서 일을 한다.
노동과 휴식이 나란히 놓이면 종종 휴식이 미안해진다.
하지만 아마도 지붕 위의 그 사람이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 휴식을 취할 때면
나는 그 시간, 집에서 맥북을 펼쳐놓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휴식과 일을 교차시키며 우리는 살고 있다.
오쿠마 정원에서 나와
카페가 있던 곳으로 걸어나가는 길이다.
들어올 때 보았던 청춘남녀는
여전히 정원 입구의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데이트 중이었다.
좋은 데도 많은 데 하필 그 자리인가 싶었지만
둘이 연애할 때는 외진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인 법이니까.
둘은 내가 나올 때는 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이 길은 왔다 걸으며 데이트하면 아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젊은 날의 연애 시절에는
온통 상대에게 시선이 뺐겨 이런 길의 아름다움이 눈에 잘 들어오질 않는다.
상대와 길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려면 나이가 필요하다.
오쿠마 강당의 옆에는 와세다 갤러리가 있다.
그 갤러리를 지나다 보니 창의 디스플레이가 마음에 들었다.
작품들을 작게 축소하여 꾸민 듯했다.
나는 외국말을 곧잘 우리 말인양 알아듣는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다.
이 집을 지날 때도 그랬다.
집은 자자 오피스라고 되어 있었다.
물론 나는 아직 벌건 대낮인데 자자고 드냐고 했다.
와세다 남문으로 갈 때와 달리
다시 딸을 만나러 와세다역으로 가며
뒷길을 택한 걸음 끝에서 만난 사무실이었다.
안쪽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자는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딸이 기다리지 않게 여유있게 역에 도착했으나
나중에 딸을 만난 뒤에 내가 약속 시간을 착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착각했다는 것을 모른 나는 혹시나 약속 장소가 따로 있나
지하철 역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다.
딸이 약속 시간에 늦는다는 생각이 들자 불평이 고개를 든 것이 아니라
내가 기다리는 곳이 맞는지 슬그머니 의심을 하게 된 것이 나였다.
우리의 지하철역은 대개가
들어가는 곳과 지하철 타는 곳이 층을 달리하여
들어가는 곳에선 지하철이 보이질 않는데
와세다역은 들어가고 나오는 곳과 열차를 타는 곳이 똑같은 층이어서
표사는 곳에 서 있기만 해도 그냥 서고 떠나는 열차가 다 보였다.
그 때문에 들어가고 나오는 거리가 우리보다 훨 짧아 보였다.
4 thoughts on “와세다 캠퍼스와 오쿠마 정원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3-2”
예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미라보다리’라고 전설의 다리가 있었습니다.
이 다리가 철제로 만든 출렁거리는 5미터 남짓한 다리인데 연인들이 이 다리를
쇳소리를 내지 않고 건너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도 안되는 전설?에 따라
아주 천천히 걸어 건너는 것을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은 출렁!
괜히 건너고 괜히 뻘쭘해지는 연인들…
배봉산이 훨씬 안전한데요.
근데 전설은 전설일 뿐.
제가 실험해 봤는데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ㅋㅋ
자자오피스,를 지나가다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안자오피스,네요.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잔디 밭에서 밥 먹고, 가끔 데이트도 하고
학교 앞에서 술도 더러 마시고
그때가 최고였는데….
술에서 깨지 않으려고 일단 약간 마셔서 알딸딸해진 뒤
깰만하면 한잔하고 깰만하면 한잔하고 하면서
하루 종일 취해서 보냈던 시절도 있었죠.
종로에서 학생증 맡기고 술도 마시던 시절이었으니…
참 대학생이 믿을만 했던 시절이기도 했던 거 같아요.
요즘 대학생들 낭만이 없다고 하던데 여기 이국의 대학은
좀 낭만적으로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