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조에서 허리쯤을 뚝 잘라 들어간 뒤
이타바시의 사쿠지강을 따라 내려간 나의 하루 여정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진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걸어서 이루어진 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구글 어스에서 보면 사쿠지강을 따라가면
일본의 도쿄에 있는 커다란 강, 아라카와강을 만나는 것으로 나와 있었지만
나는 큰 강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곳까지는 너무 먼 거리였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어느 하루, 다리가 아프도록 걷는 동안
강변으로 사람사는 모습을 곁들여 내주는
사쿠지강의 풍경은 내겐 아주 좋았다.
그 강변의 사람들은 촌스런 구석이 많았다.
구경을 간 것은 나였지만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사는 평범한 주거지 동네이다 보니
오히려 그곳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사진찍는 나를 힐끗거렸다.
구경왔다가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었지만
나는 그 촌스런 느낌이 그래도 반갑고 좋았다.
나무는 항상 위는 환하지만
밑은 땅밑에 묻고 있어 언제나 어두침침하다.
하지만 가을에는 다르다.
화려한 가을빛을 잔뜩 머금은 단풍잎을 밑으로 내려 밑둥에 깔아두면
가을엔 나무의 밑도 환하다.
강변의 벤치에 누군가기 누워 자고 있다.
노숙자일 것이다.
이런 생활이 오래 되었나 보다.
한두 가지 지혜가 엿보인다.
벤치의 냉기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밑에 깔아놓은 종이가 그 중의 하나이다.
아예 침낭을 준비한 것도 그의 지혜에 속할 것이다.
옆의 요넥스 가방은
아마도 침낭과 종이를 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침낭, 그러니까 잠주머니에 들어가야 했기에
신발은 바깥에 벗어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면 살아지는 것일까.
간간히 벤치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노숙자들을 보았다.
내겐 사쿠지 강변의 가을의 정취가
한없이 걷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에겐 그냥 살을 파고드는 냉기가 잠을 방해하는
귀찮은 계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여름의 의자는 그냥 의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의자도 가을이 된다.
의자 밑에 가을이 깔리고, 의자 위에도 가을이 내려앉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엔 가을의 의자에 앉으면
누구나 가을에 젖어 가을을 앓는다.
가을 의자가 가을에 젖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발밑에 흙을 조금씩 묻혀 가면서
나무 뿌리가 가지처럼 땅 위로 드러나 있다.
뿌리는 나뭇잎에게는 출발점 비슷한 자리이다.
떨어져 나무 뿌리 곁에 누운 나뭇잎은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향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알고보면 유년의 삶을 키워준 곳이다.
나뭇잎은 사실은 가지끝에 자리했던 그 자리가 고향이다.
유년의 기억이 서려있지 못한 자리에선 고향이란 말이 잘 피부에 와닿질 않는다.
하지만 유년의 기억은 키운 사람이 더 많이 갖고 있을 때가 많다.
뿌리가 키웠으니 나뭇잎에 대한 유년의 기억도
뿌리에 더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 때문일까.
뿌리 곁을 뒹구는 나뭇잎에게서 고향에 안겨있는 느낌이 났다.
강변을 걷다
가지에 빵같이 보이는 것이 꿰어져 있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무엇이지 저건?
짐작으로는 사람들이 까마귀와 같은 새들 먹으라고 내준 모이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짐작에 불과했다.
까마귀가 쪼아 먹는 것도 보질 못했다.
일본어를 못하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상당히 여러 번 보았다.
담쟁아, 너는 왜 하필 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거니?
“나에게 설명이 필요한 질문은 하지를 말아.
내게 대답을 듣고 싶다면
내가 아무 말 안해도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질문을 던져.
그럼 서로 속 편하잖아.”
알았다, 알았어. 다시 물을께.
조금 전에 지나간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갔니?
아무 말없이 담쟁이가 바람이 간 방향을 가리켰다.
바람이 세 줄기였다는 것도 덧붙여 알려주었다.
“포크나 삼지창이 어떤 모양인지 아니?”라고 물어도
담쟁이가 충분히 답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한 아이는 유모차에 태우고,
한 아이는 이제 보조 바퀴를 단 자전거 정도는 혼자 탈만큼 다 키운 엄마가
두 아이를 데리고 강변길을 걸어 집으로 간다.
엄마와 아이는 종종 앞에 세워두면 함께 걸어가기만 해도
그림 같이 느껴지곤 한다.
담쟁이가 난간을 따라 살금살금 옆으로 걷고 있었다.
타고 올라가는 것이 숙명인 듯한 담쟁이가
왜 옆걸음으로 난간을 가로지르고 있을까 싶다.
난간은 걸음을 조심스럽게 하는 곳이다.
그곳에선 위를 쳐다보기보다 아래쪽 걸음에 조심하며
옆으로 살금살금 발을 떼게 된다.
담쟁이도 예외가 아니었으리라.
가끔 난간에 서면
위로 올라가는 것을 숙명으로 아는 자도
떨어질 것을 걱정하며 위에 대한 자신의 숙명을 잊는다.
이제 해가 기운다.
주조에 있는 딸의 집으로 돌아가야할 시간이다.
저녁 하늘의 구름이 좋다.
사쿠지강과 작별하기에 좋은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강과 작별하고 발길에 걸리는대로 동네 골목으로 슬쩍 스며들었다.
골목을 가다 보니 어느 집 문간의 화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차곡차곡 잘 모아 놓았다는 느낌이 든다.
문간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에게
일제히 인사를 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 같았다.
주차장 경계에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역시 감의 색깔 때문에 감이 맞나 싶었지만
잎은 내가 익숙하게 낯을 익혀놓은 감나무 잎이 분명했다.
길을 얘기할 때
큰 길에서 무슨 건물이 보일꺼야,
그 길로 들어오다 보면 감나무가 있는 주차장이 있어 라고 얘기할 수 있다면
길안내도 운치가 있을 것만 같았다.
주차장 이름이야 따로 있겠지만 내겐 감나무가 있는 주차장이었다.
또 골목을 가다 이 집을 만났다.
화분을 구명대처럼 두르고 있었다.
어쩌면 이 집은 화분의 부력으로 떠 있는 섬인지도 모른다.
자연이 없으면 도시는 침몰할지도 모른다.
그걸 알고 있는 도시의 사람들은
안간힘으로 작은 자연이라도 부여잡는다.
도시에서 화분은 그냥 화분이 아니라
알고 보면 도시의 침몰을 막아주는 구명대이다.
가끔가다 만나는 작은 화분 구명대들이
도시 전체의 침몰을 막고 있는 곳이 바로 도시이다.
화분의 부력은 강력해서
그 육중한 무게의 집채도 너끈하게 감당하고 있었다.
담과 집의 벽 사이는 사람이 몸을 집어넣을 틈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사이로 나무 한 그루가 몸을 들이밀고 서서 푸른 삶을 가꾸고 있었다.
틈새의 크기로 보면 답답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잎들의 색으로 보면 나무 때문에 겨우 집이 푸른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담밖으로 고개를 내민 나무는 잎들이 눈에 익숙했다.
철쭉으로 보였다.
내 눈을 끈 것은 담의 중간으로 삐져나온 가지였다.
바깥에 심은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의 담이 숭숭 뚫려
가지의 길을 바깥으로 열어주고 있었다.
집안의 철쭉은 벽에 뚫린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호흡하고 있었다.
담없이 살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 담에 구멍을 내놓는 것은 가능하리라.
그리고 그렇게 틈을 내주면 집안에 가두어 두고도
바깥 공기를 숨쉬게 할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을 찍은 사진인가 싶겠지만
내 시선을 끌어간 것은 사실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노란 은행나무였다.
그 노란 색은 그만큼 강렬했다.
건물은 거의 내 눈길을 끌어간 적이 없다.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그 나무는 노란빛 가을로
단숨에 내 시선을 끌어갔다.
사진은 그때 내가 보았던 순간처럼 은행나무를 강렬하게 담아내진 못했다.
딸이 사는 주조로 가는 길에 육교를 올랐다.
육교에 오르면 경관이 조금 트인다.
그게 참 이상하다.
도시라서 한국의 서울과 별로 다를바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심지어 교통 표지판 마저도 비슷해 보이는데
그래도 다르다는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표지판에서 보는 낯선 지명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과 달리 도시는 어느 곳이나 사람사는 것이 비슷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도시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뭉개버리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거의 주조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다.
나무 한 그루가 전신주 놀이를 하며 서 있었다.
전신주도 아니면서 어떻게 저렇듯 전선을 줄줄이 꿰차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무가 이 동네의 사람들에게 달려가는 전기와 전화를
감청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자연은 그런 몹쓸 짓을 하는 법이 없다.
세 시간 정도만 돌아보자고 했는데
적당한 시간에 딸의 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
조금 아쉬움이 남아 딸의 집 근처에서 동네의 골목을 잠시 엿보았다.
자전거 한 대가 벽에 기대어 서 있고
멀리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에 기대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자전거는 빠르지만 그 속도는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의 뒤에 온다.
지팡이는 느리지만 균형의 능력을 스스로 감당해준다.
균형의 능력을 갖고 있을 때는 자전거가 고맙지만
균형의 능력이 많이 감퇴되면 그때는 지팡이가 고맙다.
일본에서 받은 가장 흔한 인상 중의 하나는
작은 공간도 놀리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에겐 그게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가령 이 집은 담벼락 아래쪽의 담과 길 사이로 작은 관목을 심어놓고 있었다.
이 작은 관목들이 자연스럽게 이 자리로 터를 잡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집 주인이 그 틈새에서 이들 관목을 가꾸어낼 공간을 본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 틈을 발견해낸 눈에 경이로운 한 편으로
그 틈은 임의의 자연, 그러니까 바람에 날려온 풀씨에게 맡겨놓고
그렇게 임의로 만나는 자연과의 만남을
기대했어야 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알뜰한 공간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겐 임의의 만남도 중요하다.
알뜰한 공간은 때로 몸부림처럼 느껴지곤 한다.
일본의 이런 점은 경이로운 한편으로 일종의 몸부림으로 보여
조금 숨이 막히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오면 어떨까.
아마 지천으로 널려있는 빈 공간에 마음마저 텅비는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항상 바깥에서 고양이를 만났다.
집안의 고양이와 만난 것은 이 녀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눈을 45도 각도로 세우고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차피 창의 안에 있어 그런 경계는 얼마든지 풀어놓고 있어도 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녀석은 끝내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녀석과 헤어지며 씨익 웃어주었다.
고양이는 우리의 웃음을 이해 못한다.
녀석은 끝내 째려보기만 했다.
또 일본에서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2 thoughts on “사쿠지 강변을 걷다 주조로 돌아오다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4-3”
요넥스는 배드민턴 브랜드로 많이 알려져 있죠.
운동화도 낡긴 했지만 푸마를 신는 멋쟁이신데요.^^
노숙인들에게 연말에 침낭하나씩 선물하는 멋진 사람 나타나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