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온 지 벌써 엿새 째이다.
오늘 딸의 일정은 하루 종일 꽉 차 있었고,
그 일정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원래는 오늘 딸이 가는 그곳으로 나도 가려고 했었지만
딸은 그냥 내일 하루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럼 나는 딸의 학교를 다시 한번 더 둘러보겠다고 했다.
도쿄에 온 것이 딸보러 온 것이었으니
딸과 관련된 곳이나 실컷 보고 가야 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물론 이미 딸이 다니는 학교를 한번 다녀오기는 했다.
하지만 사실 그때 학교를 다 둘러보진 못했다.
지난 번에는 학교에서 딸을 만나 잠깐 동안 함께 했지만
오늘은 나 혼자 가야 한다.
딸이 옆에 없어 아쉬움이야 있겠지만
하도 바쁘신 몸이라 딸의 시간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다.
내가 도쿄에 온 이래로
오늘 딸은 가장 일찍 집을 나섰다.
6시가 조금 넘어서 나간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깨워도 깨워도 서너 시간 개기는 것은 기본이더니
그래도 필요할 때는 알아서 일어나는 구나.
오히려 오늘은 내가 더 늦게 일어나 부시시한 눈으로 벌써 나가냐고 했다.
아이가 일찍 나가니 좋은 점은 있었다.
갑자기 나도 덩달아 일찍 일어나게 되고,
그러니 시간이 널널하게 남아 그 시간에 일을 할 수 있었다.
12시가 채되질 않아 집을 나섰다.
역으로 가다 어느 집의 주차장에 눈길이 머문다.
좁은 공간에 차도 절묘하게 세워 놓았지만
그 앞에 화분을 놓아둔 것이 더 눈길을 끈다.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치워야 할 것 같은데
그 귀찮음보다는 화분과 함께하고 마주하는 시간을
더 귀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귀찮으면 밀려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요즘의 삶인데
이 집에선 화분이 요즘의 그 추세를 이겼다.
주조 시장을 지난다.
자전거를 끌고 사람들이 서로 스친다.
아무도 나를 기억 못하겠지만
나는 이곳의 기억을 친숙하게 담아갈 것이다.
사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일상을
이곳 동네에 며칠 묵은 나그네는 친숙함으로 담아간다.
도쿄에 있는 동안 집을 나서면
언제나 출발점이 되었던 역이 바로 이 주조역이다.
다른 모든 역이 스쳐가는 역이었지만
주조역은 떠나고 돌아오는 역이었다.
역에서 내리면 항상 택시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도
이 역의 풍경 중 하나였다.
오늘 아침에는 택시 말고도 차들이 많은 것 같다.
나올 때 12시를 향하여 가고 있던 시간이
좀더 12시 가까이 가 있었지만
아직 12시를 채우진 못하고 있었다.
이틀 뒤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쿄는 전철이 복잡해서 열차를 제대로 바꿔타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항상 어딘가를 갈 때 딸이 바꿔타는 곳을 적어주곤 했지만
그렇게 알려주어도 마치 미로 속에서 길을 찾듯 고민을 해야 했었다.
그런데 돌아갈 때 공항까지 타고가야할 나리타 익스프레스가
열차를 바꿔타려고 내린 이케부쿠로역으로 들어온다.
한국갈 때 여기서 저 열차를 타고 가면 되겠구나.
살다보니 열차가 반가울 때가 다 있다.
한번 갔던 길은 역시 친숙하다.
지상의 전철은 노선이 아주 복잡한데 지하철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은 듯하다.
우리 나라는 이제 어느 역이나 거의 안전 차단문을 만들어 놓았지만
여기는 여전히 우리의 옛날 지하철 모습이다.
안전하게 밀봉해놓은 것이 우리 지하철의 오늘이라면
그냥 들어오고 나가는 열차를 날 것 그대로 내버려두었던
우리 지하철의 과거가 일본의 도쿄에 있었다.
도쿄가 우리의 과거로 뒤쳐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순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조금 흐뭇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밀봉해 두어야 안전하고
일본은 그냥 그대로 두어도 여전히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의 뒷끝은 씁쓸하다.
지하철의 풍경은 지난 번 이 노선의 지하철을 탔을 때나
또 멀리 바다 건너 한국과 비교했을 때나 거의 비슷하다.
다만 시간이 좀더 일러서 그런지 그 이른 시간이
사람들의 자리를 많이 비워놓고 있었다.
지하철이나 전철에선 시간이 사람몰이를 한다.
나는 오늘 그 시간의 사람몰이를 잘 피했다.
와세다역에서 나와 사거리를 건넌다.
원래 역에서 나와 사거리에 서면 사선으로 가로질러 신사 하나가 보인다.
지난 번에는 길건너에서 그냥 눈으로만 힐끔 훑고 와세다로 갔었다.
오늘은 그 신사로 가볼 생각이다.
건너편 횡단보도로 사람들이 건너간다.
자전거는 횡단보도를 걷는 사람들의 몫으로 내주고 그 바깥으로 건넌다.
차가 많지 않은 거리라 가운데 놓인 차들의 공간이 텅 비었다.
우리에게 신사라는 말은
그다지 기분좋게 다가오는 대상은 아니다.
한일병탄 시절 강요받았다던 신사참배가 그 주요 원인일 것이다.
신사라는 말이 가진 그런 어두운 그림자 때문에
걸음을 그곳으로 옮기면서도 한편으로 주저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본에 왔는데
도대체 그곳이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한번 해봐야 되지 않겠나 싶었다.
와세다 사거리에 있는 신사는 아나하치만 신사라고 하는 것 같다.
계단을 올라가니 문 하나가 나온다.
현판에 광머시기문이라고 되어 있다.
중간의 한자를 알 수가 없다.
소나무송자의 한 종류가 아닐까 싶다.
만약 그렇다면 빛의 소나무 문이 된다.
문 뒤쪽으로 소나무가 보이긴 보인다.
하지만 현판의 이름에 오르기에는 좀 빈약해 보인다.
문의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자신할 수가 없다.
가족이 나들이를 나왔나 보다.
가족의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딸의 애교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아나하치만 신사는
아이들이 무사히 자라기를 기원하는 곳으로 유명한가 보다.
아이들 데리고 나온 가족을 만난 것도 그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 곳 신사의 나무는
마치 뭉게구름이 내려앉은 듯했다.
구름이 나무를 꿈꾼 것인지,
나무가 구름을 꿈꾼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살다보면 내가 네가 되고 싶고, 네가 또 내가 싶어지면서
서로의 꿈이 뒤섞이는 법이다.
그 구름으로 피어오른 나무 밑으로 들어본다.
푸르른 무성함으로 보면 나무 밑은 가을이 아니라 한창 때의 여름이다.
초록빛은 여름엔 여름을 담는 빛깔이지만
가을이 밀려들면 그 가을을 막는 여름의 방패막이다.
잠시 한창 때의 여름 속으로 시간 이동을 한 듯한 느낌을 즐겼다.
원래 와세다 주변의 거리는 고서점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일본어를 몰라 서점에 들러 책을 뒤적거리는 시간은 갖지 못했다.
하지만 길가다 한 서점 앞에서 걸음이 멈추었다.
서점의 이름이 강원서점이다.
나 강원도 출신인데.
혹시 강원도 사람이 여기로 흘러들어 서점을 차린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서점의 문은 닫혀 있었다.
와세다 문학부 캠퍼스로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길을 잘못든 것 같다.
그래서 동네의 골목길로 들어섰다.
한 골목길에서 줄줄이 늘어서 있는 자전거들을 만났다.
모두 벽을 의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벽은 사람들의 걸음을 막아서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전거가 기댈 어깨가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벽과 어깨는 한끗 차이이다.
한끗의 마음으로 벽이 되기도 하고, 어깨가 되기도 한다.
4 thoughts on “아나하치만 신사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6-1”
거리와 건물들의 다소 흐린 색에 비해
신사의 빨간 색이 단연 눈에 띄네요. 좌우 대칭도요.
제게 동경 지하철은 책과 만화 보는 사람들로 기억돼 있습니다.
신문 보는 이들도 옆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신문을 여러 번
접어서 작은 책처럼 만들어 보곤 했지요.
제가 탄 지하철에선 다들 핸폰 꺼내들고 조물락조물락하는 사람들이 제일로 많았어요. 딸은 우리 나라가 더 그러지 않냐고 하는데 남의 나라라 유심히 봐서 그런지 다들 핸펀하고 너무 친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우리 지하철과 일본 지하철을 보고 약간 으쓱 – 조국애? ㅎ
강원서점
그 분명 강원도 분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만든 서점이겠네요… ㅎ 아닌가?
애들에게선 조국같은게 지워져 있는 거 같은데…
우리는 그거 지우기 쉽지 않은 거 같아요.
은근히 이것저것 비교하면서 울나라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강원서점은 처음에는 저도 분명 강원도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담날 어디서 강원으로 시작하는 간판을 한번 더 본 뒤로는 그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어요. 두번보니까 자신할 수 없어지더라구요. 이거 일본에서 흔한 명칭이 아닌가 싶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