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를 볼 때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생각난다.
하지만 폐렴으로 죽어가던 존시가 담쟁이 덩쿨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고 말했다던 대목은 담쟁이 앞에 설 때면 오히려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것이 콘크리트 장벽이건, 아니면 벽돌담이건 그에 상관없이
담쟁이가 타고 올라간 그 벽이나 담의 어디에 손잡을 만한 변변한 구석이 있던가.
담쟁이가 아무리 섬세한 손길을 가졌다고 해도 그 벽의, 혹은 담의 어디로도 손끝을 집어넣기는 어려워보인다.
그런데도 담쟁이는 그 담을, 혹은 벽을 조금씩 조금씩 기어 올라간다.
그리고는 기어코 그 벽과 담을 온통 담쟁이 덩쿨로 뒤덮고는 하늘을 보고야 만다.
처음 벽을 오를 때 그 느린 보행의 담쟁이에게서 누가 그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때문에 교각 하나를 완전히 뒤덮은 담쟁이 덩쿨의 오늘을 보고 있노라면 꺾이지 않고 계속된 그 작은 보행이 만들어낸 담쟁이의 삶은 그 자체가 놀랍고 경이롭다.
어디 변변하게 손내밀 곳 하나 없는 어려움에 부딪쳤다면,
그리하여 <마지막 잎새>의 존시처럼 삶의 의지가 스러지는 느낌이 완연하다면
담쟁이 덩쿨 앞에 서 볼 일이다.
아마도 담쟁이 덩쿨이 그저 약간의 비빌틈만 있어도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온몸으로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