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는 시인을 찾아나선 것일까.
1975년에 나온 김현의 산문집은 <시인을 찾아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그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가 시를 읽는데 그치지 않고 시인을 직접 찾아나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책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시인을 찾아나서게 된 연유를 “마주치지 않고선 시를 읽을 수 없다”는 말로 대신한다. 그러면서 그는 시인을 직접 찾아나선 그의 글이 본격적인 시인론도 아니며, 그렇다고 그 자신의 수필도 아닌 그 중간쯤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김현의 욕망이 시 속을 거닐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바닷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바다에 몸을 담근다는 것은 유다른 것이다. 산자락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멀찌감치 두고 우리의 시선 속에서 그것을 즐기는 것과 햇볕이 쨍한 한낮에도 빛이 어둑어둑한 숲길을 걸어 그 속을 가는 것은 유다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시를 읽을 때 바닷가를 서성거리지 않는다. 시인이 바다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시를 읽는 것만으로 그 바다에 직접 몸을 담그는 생생한 체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그런 경험을 내 것으로 하려면 김현이 말한대로 시인과 나의 자아가 “마주치고 부딪치는 순간”이 그 시를 읽는 순간 내게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시인이 바다라는 단 두 글자로 이루어진 짧은 말을 한마디하는 순간, 그 짧은 한마디는 매우 함축적이어서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시어의 언저리를 맴돌뿐 그 속으로 걸음을 들여놓지 못한다. 그런 경우 우리들은 시 속을 거닐고 싶지만 그 곳으로 가는 소통로를 발견하지 못한다. 아마도 김현이 시인을 직접 찾아나서게된 것도 그 소통로의 실마리를 시인에게서 직접 찾아보려는 욕망의 끝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시인들은 대체로 말이 없기 때문에 직접 찾아나서지 않고는 그들의 시 이외에 그들의 말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다.
나에겐 그런 순간, 그러니까 시 속을 거닐었던 순간이 내게 찾아온 행복한 기억이 있다. 그 순간을 내게 안겨준 시는 정정심의 <추억>이었다. 그는 나와 함께 강원도 영월의 산골 마을 문곡리에서 자란 내 친구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시인의 재능을 보여주더니 결국은 시인의 작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건네준 40여편의 시 가운데 <추억>이란 시가 섞여있었고, 나는 그 시를 읽을 때 시 속을 거닐고 있었다.
자욱한 먼지 저희끼리 끓어 오르다 길을 나눠 헤어지는 삼거리 갈림길에 낡은 제무시 트럭 한 대 탄광쪽으로 달아나곤 하였다. 뿌리도 터전도 다 버리고 속살을 드러낸 채 실려가던 목재들 무참하게 잘린 뼈마디가 굵은 동그라미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지난날. 밤이면 지서앞 넓은 마당에 달빛처럼 아이들 우우 몰려나와 윤식이네 옥수수밭. 바람이 서걱대는 옥수수 대궁에 어둠이 열리는 소리를 숨죽이며 듣곤 하였다. 침묵의 갈피마다 은밀하게 숨던 금순이 동원이 영숙이들. 어쩌면 그렇게 이름자에 켜둔 불빛조차 남김 없이 지우는지. 전신주에 이마를 대고 어둠보다 두렵게 달려드는 외로움을 세고 있었다 나는. 길게 누운 망루의 그림자에 올라가 못 찾겠다 꾀꼬리 서러워 목이 메는 싸이렌을 울리곤 하였다.
-정정심의 시 <추억> 전문
시의 어디에도 이 시의 무대가 강원도 영월의 문곡리란 언급이 없지만 나는 시인과 같은 고향을 가졌다는 그 특권으로 인하여 이 시가 자리한 공간이 바로 나의 고향이란 사실을 곧바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그곳의 도로는 요즘과 같은 맵시나는 아스팔트 길이 아니었으며,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뽀얗게 이는 신작로였다. 나의 고향 마을은 평창과 영월, 정선으로 가는 길이 들어오고 나가며 한자리에 모여있는 삼거리 동네였다. 사실 어릴 때 우리들에겐 트럭이란 말이 없었다. 그 당시 우리들에게 모든 트럭은 제무시였다. 내가 그 제무시가 미국에 있는 굴지의 자동차 회사 GMC란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주 오래 뒤의 일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정선 쪽으로는 우리들이 접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하나 있었고, 그 산에선 벌목이 진행되고 있었다. 잘린 나무들은 트럭에 실려 우리 동네를 통과한 뒤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우리는 밤이 오면 지서 앞의 넓은 공터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그러나 시 속의 언급과 달리 그 지서는 사실 지서가 아니었다. 정선쪽으로 있는 마차에 탄광이 들어서면서 그곳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자 우리 동네에 있던 모든 관공서가 마차로 이전을 했고 그것은 지서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지서는 사실 우리들이 클 때만 해도 지서가 아니라 농협의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지서는 밤이 오면 불을 켜고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잠이 들었다. 아울러 밤늦게까지 그 앞에서 아이들이 놀아도 우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순경 어른이 그 지서에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 지서의 바로 옆으로 넓은 밭이 윤식이네 밭이었고, 항상 옥수수를 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밭에는 담배 아니면 수수나 옥수수가 자랐던 기억이다. 특히 옥수수는 바람이 훑고 지나갈 때면 바람과 농을 치는 소리가 가장 요란했다. 그리고 지서 앞의 넓은 공터엔 나무로 만든 망루가 하나 있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딱 한번 그곳을 올라갔던 나는 다시는 그곳을 올라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위태로움이 그때 내게 주었던 공포감이 상당히 컸기 때문이었다. 그 망루 위에는 사이렌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나는 처음 그 사이렌을 설치하던 날 그게 울리는 것을 보았을 뿐, 그 뒤로는 한번도 그 사이렌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망루가 생긴 것은 김신조란 이름을 대면 그 시대의 사람들 누구나가 알 수 있는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한 뒤였다. 숨바꼭질을 할 때면 항상 술레는 그 망루 옆의 전신주 기둥에 머리를 대고 하나, 둘, 셋, 넷을 세어나갔다. 시골의 밤에 아이들이 숨을 곳은 지천이었고, 때문에 한번 술레가 되면 그 술레라는 수렁에서 헤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나도 그때 그 밤의 어둠 속으로 몸의 흔적을 까맣게 지우며 숨어버리던 아이들 중의 하나였다.
나는 시인이 건네준 시의 현장에서 내가 그와 함께 자랐다는 그 이유로 그의 시 <추억>을 마주했을 때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혜택은 정정심의 일부 시 이외에는 거의 내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듯 시의 속을 거니는 행복이 나의 것이 아닐 때면 나는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의 속을 거닐고 싶다는 갈증에 시달리며, 나에게 있어 그 갈증은 시인을 찾아나서고 싶다는 욕망으로 전환이 된다.
그 욕망을 채울 수 없는 나는 대신 다른 방편으로 속초에 내려갈 때면 대포항을 거쳐 외옹치항을 빼놓지 않고 들리며(황동규의 <외옹치>가 그곳으로 내 걸음을 이끄는 이유이다), 시간이 한가할 때면 근처의 동서울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양평으로 나가 사나사를 찾곤 한다(그곳으로 내 걸음을 이끄는 자장은 조용미의 <불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걸음으로 시의 속을 거닐고 싶다는 내 욕망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시를 읽을 때나 소설을 읽을 때면 그렇듯 시인이나 소설가를 찾아나서고 싶다는 욕망에 자주 시달린다. 나는 시의 속을 거닐고 싶다는 욕망이 비평가의 올바른 태도라고는 보지 않으며, 그러한 태도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에 대한 팬들의 태도에 더 가깝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들의 비평가가 아니라 그들의 팬이 되고 싶은가 보다. 나의 자리가 어떻든 오늘도 시와 소설의 속을 거닐고 싶은 나의 마음은 여전하다.
<소설가 이인성의 웹사이트에 게재한 10월의 컬럼>
(2005년 9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