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공항에서 한국으로 – 9일간의 도쿄 여행 Day 9-2

구름 위를 날아 일본으로 떠났고,
또 구름 위를 날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떠나던 날은 날이 잔뜩 흐려 있었다.
밑에선 구름의 위쪽이 보이질 않고,
구름의 위쪽에선 또 아래쪽의 지상이 보이질 않았다.
내내 구름만 보면서 일본까지 날아갔다.
구름의 위쪽이 산맥으로 내달리며 높이를 오르내리는 지상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던 날, 도쿄의 날씨는 아주 좋았다.
구름의 사이로 지상이 내려다 보였다.
일본으로 갈 때는 구름만 보고 갔지만
올 때는 구름과 지상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갈 때 구름의 위쪽에 묶여 있던 내 상상력이
이번에는 구름과 지상을 오르내렸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비행기가 뜬다.
발을 내딛고 아흐레를 보냈던 일본에서 나도 이제 발을 뗀다.
지상에 발을 딛고 있을 때는 골목과 골목을 미세하게 헤집고 다녔다.
비행기가 뜨면서 지상의 풍경을 아래쪽으로 멀리 밀어낸다.
그러자 사람들이 가꾸어내는 섬세한 삶의 풍경들이 모두
비행기의 작은 창으로 몰려들어 응집이 된다.
풍경은 멀어지면 응집되며,
거리를 버리고 가까이 가면 다시 흩어져선 섬세한 삶의 속살을 드러낸다.
응집된 풍경 속에선 섬세한 삶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가까이 갔을 때는 삶이 있었으나
멀어지면서 삶은 모두 풍경의 일부로 응집되어 비행기의 창에 담겼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비행기는 점점 더 높게 날아오른다.
아래쪽으로 강 하나가 길게 몸을 비틀며 지상을 유영하고 있다.
지상에 있을 때 우리는 강을 유영했으나
하늘에서 내려다 보니 강이 지상을 헤엄쳐 가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강을 유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상을 유영하고 있는 강의 등에 잠시 업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 호수도 하나 보인다.
빛을 잔뜩 머금고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다.
호수는 언제나 물을 잔뜩 품고 있었으나 위로 멀어지자
그 품에 품은 것은 물이라기보다 구름 사이를 뚫고 쏟아진 햇볕이다.
지상에서 강을 거닐고, 지상에서 호숫가를 돌 때는 느낌이 달랐다.
지상에서 멀어지면서 그 느낌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니면 다행스럽게도 비행기를 탈 때,
내가 지상의 느낌을 지상에 모두 내려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뭐든 고집하면 그 다음에 와야할 것들이 자리를 찾지 못한다.
지상으로부터 멀어지고, 풍경이 응집될 때 지상의 느낌을 버리면
거리가 새로운 느낌을 열어준다.
그것이 거리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거리는 멀어지면서 세상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세상을 새롭게 열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멀리보는 지상과 가까이 발을 딛고 걸어다녔던 지상을
나중에 잘 이어서 붙이긴 해야 하리라.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오늘은 구름이 마치 유빙처럼 하늘을 떠돌고 있다.
오래 전 아주 어렸을 적에
봄날이 가까워 오면서 뜯겨져 나온 개울의 얼음 조각에 냉큼 올라
막대기로 개울 바닥을 밀며 물 위를 둥둥 떠돈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렸을 적이라 얼음 조각이 내 몸무게를 충분히 감당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얼음 조각은 갈라지고 말았고,
갈라진 틈 사이에서 나는 그대로 물에 빠지고 말았었다.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았으나 물은 아프지 않았다.
마치 물은 누군가의 품처럼 아늑하게 나를 받아주었다.
오늘 유빙처럼 떠도는 구름이
그보다 더 오래 전의 기억 하나를 일으켜 물의 아늑함에 겹쳐주고 있다.
그래, 기억에서도 까마득하게 지워질 정도로 아주 오래 전,
나는 원래 구름의 유빙을 타고
이 구름에서 저 구름으로 뛰어다니며 이 하늘에서 놀았었다.
구름의 유빙은 얼음과 달라 그 품으로 뛰어들면 물처럼 아늑했었다.
그러나 얼음 조각을 타고 놀다 물로 빨려들던 그날처럼
어느 날 발을 헛딛으면서 나는 유빙과 유빙 사이의 틈 사이로 떨어져 버렸다.
떨어진 나는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누군가의 눈에도 띄지 않은 투명으로 세상에 날렸고,
한 남자의 몸으로, 또 한 여자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뜨거운 욕망이 그 두 남녀의 등을 밀던 어느 날 밤,
나는 남자의 몸속에서 가끔 우유빛으로 흐르는 간헐천의 수로를 타고
여자의 몸속 깊은 동굴로 건너가 지상으로 떨어질 때 흩어졌던 나를 만났고,
나는 그때 나와 하나가 되었다.
그 동굴은 마치 물 속처럼 아늑했다.
나는 그 물속에서 열 달을 살았다.
몸은 무거워졌고, 구름 위를 뛰놀던 기억은 까마득하게 지워졌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날씨 덕택에 오늘은 땅과 구름이 동시에 모두 보인다.
땅은 저 아래 가라 앉아 있고 구름은 그 위에 둥둥 떠 있다.
구름의 유빙 사이로 미끄러진 내가 구름을 잊어 버린 것은
내가 열 달을 보낸 그 여자의 자궁 속이 마치 구름 속 같았고,
또 그 세월을 보내고 세상에 나왔을 때
세상에서도 그 옛날 구름의 향취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 기억할 수 있다.
구름이 가라앉아,
그것도 수만, 수천만을 빗방울로 뭉쳐 가라앉아 땅을 만들었다.
땅은 구름 위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낯선 세상이 아니었다.
종종 지상의 무게를 털어내고
다시 구름 위로 돌아가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그냥 지상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땅 위에서 살기 시작했다.
지상에선 종종 구름의 향기가 났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구름은 지상으로 가라앉으면서 두 가지를 얻었다.
하나는 원래부터 있었던 위쪽의 하늘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래는 없었던 지상이었다.
구름은 원래는 하늘의 아래였지만 이제는 하늘과 땅의 중간으로 떠 있었다.
하늘은 늘상 그 자리에 있었지만 정붙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변함없는 낯빛처럼 다가서기 어려운 표정도 없으리라.
구름 위의 하늘은 언제나 변함없이 푸른 기가 돌 뿐이었다.
얼굴 표정에 한번도 변함이 없었다.
구름의 마음은 지상의 것이 되었다.
가라앉은 지상 또한 제 높이를 들어올려 구름 가까이 발돋움을 했다.
높은 봉우리가 눈으로 하얀 것은
구름의 높이로 발돋음하려는 땅의 꿈 같은 것.
높은 산에 구름처럼 하얗게 눈이 깔려 있었고,
구름은 또 그 높이까지 다시 내려가 있었다.
정이란 무서운 것이다.
땅이 가라앉을 때 몸에 축적된
그 육중한 지상의 무게를 뿌리치고 발돋움하게 만들며
구름이 아득한 높이를 버리고 지상으로 몸을 낮추게 만든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높은 산에 내린 눈이 잘 녹지 않는 것은
산봉우리가 춥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이 구름에게 좀더 가까이 가려는 지상의 꿈이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의 꼭대기는 구름처럼 하얗게 빛을 낸다.
지상이 품은 구름의 꿈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름이 종종 산꼭대기에 그 몸을 걸치는 것은
산봉우리가 높기 때문이 아니다.
서로를 확인하는 마음이 그 지점에서 읽히기 때문이다.
산이 하얗게 솟아 있었고, 구름이 산 주위에서 발을 멈추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지상에선 마음을 구름에 두고선 살아갈 수가 없다.
지상에서 살아가려면 모두 지상으로 낮게 엎드려야 한다.
구름의 세상에서 미끄러진 자들에겐 그게 가장 곤혹스런 지상의 숙명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상으로 낮게 엎드린다.
지상에 낮게 엎드려 살수록 지상의 마음을 읽어 내기가 어렵다.
여름은 지상이 가장 낮게 지상으로 엎드리는 계절이다.
초록이 무성해지는 것은 지상이 온통 지상으로 엎드렸다는 징표이다.
그러다 우리는 한 계절, 삶을 잠시 내려놓는다.
구름을 꿈꾸기 좋은 계절, 바로 겨울이다.
우리는 그 계절에 우리들이 살았던 구름의 높이를 꿈꾼다.
비행기가 날아가는 구름 아래 저편에서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산들이 꿈에 젖어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비행기 창으로 바라본 하늘이 하늘반 구름반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희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푸른 색과 흰색으로 표정을 가른 둘은
얼굴을 맞대고도 정을 붙일 수 없었으리라.
표정없고, 그래서 정도 붙이지 못하는 동거란 얼마나 삭막한 것인가.
구름이 몸을 아득한 저 밑으로 내려 지상으로 가라앉히고,
그 지상과 정을 붙인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될 일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예전에는 나의 세상이었으나
이제는 구름의 세상으로 가려면
날개와 그 날개를 밀어줄 강력한 엔진을 가져야 한다.
오늘 나는 그 날개와 엔진의 힘을 빌어
아주 오래 전 기억 속의 세상을 날아간다.
의자 앞 안내 모니터에선 지금 바깥의 기온이 영하 40도라고 일러준다.
예전에는 그 기온에서 살았으나 지금은 곧바로 얼어죽을 것이다.
구름은 더 이상 우리의 세상이 아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지상에서 살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일본을 떠난 비행기가
이제 내가 사는 나라의 하늘 위로 접어들었다.
아마도 남해안 어디쯤일 것이다.
내 나라는 정말 온통 산으로 이루어진 나라구나.
난 지상에서도 유독히 잔정이 많은 땅에서 살고 있었구나.
한방에 구름으로 치솟아 오르는 높은 산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이 산과 저 산이 모두 자잘자잘하게 솟아 올라
오래 전에 잊혀진 구름의 세상을 꿈꾸며
몸살이라도 앓듯 살아가는 나라였구나.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구름이 잔정 많은 이 땅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어디선가 스윽 몰려들었다.
비워둔 한쪽 귀퉁이로 지상의 풍경이 보였다.
이제 내려가면 풍경 속에 응집되었던 삶들을 좀더 유심히 살펴보며 살아야 겠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한국오는 비행기 속에서

비행기는 인천 공항으로 착륙하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 걸린 저녁 해가 서해 바다의 섬 사이로
붉은 노을을 펼쳐주었다.
섬들이 구름처럼 바다에 떠 있었고,
붉은 노을은 섬으로 가는 길만 같았다.

Photo by Kim Dong Won
2010년 11월 16일 인천 영종대교를 건너며

그녀와 공항에서 만나 포옹하고 싶었다.
하지만 출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왔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내 전화를 받고는
아예 차를 몰고 공항의 버스 승강장 쪽으로 곧장 올라왔다.
집으로 향하는 길의 영종대교가 마치 구름의 나라로 가는 길 같았다.

“나는 말야,
어느 날 내게 그런 일이 가능해진다면
어디 육지에 맞붙은 섬까지 다리를 하나 놓고 싶어.
다리의 바로 앞에서 팔을 벌리고 길을 막은 채
섬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며
충혈된 눈으로 그 돈을 세는 재미로 다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또 섬에 사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다리를 놓으며
내 착한 마음을 세상에 뽐내려고 다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문뜩 아득한 기억을 일으켜 세워 구름의 세상을 기억해낸 사람들이
마치 구름의 세상으로 가기라도 하는 듯 그 다리를 건너 섬으로 가고,
섬에선 구름을 거닐 듯 섬을 거닐며
구름 위로 거닐 수 있었던 잃어버린 우리의 옛세상에 대한 꿈을
그곳에서 잠시 만났다 올 수 있도록 말야.
그렇게 나는 한번 만들어놓으면 돈이 샘처럼 솟는 좋은 돈벌이 도구나
세상 사람들에게 내 착한 인간성을 뽐낼 도구가 아니라
그냥 구름의 세상에 대한 내 꿈을 뭉쳐 다리를 만들고 싶어.
난 그렇게 저녁놀이 붉게 밝혀주었던 서해 바다 어딘가에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그 저녁놀의 물결을 따라
섬으로 가는 다리를 하나 놓구 싶어.
지상을 살면서도 구름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구름의 세상을 꿈꾸지만 여전히 지상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문뜩 언젠가 그녀의 몸 위에 내 몸을 싣고
그녀의 몸을 다리처럼 건너
섬으로 간 적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섬에서 한 아이를 만났다.
아득하고 오랜 옛시절,
유빙처럼 흐르는 구름 조각과 구름 조각 사이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며 놀다
허방으로 발을 디디며 지상으로 떨어져 산산히 흩어지고,
그때 절반은 내 몸으로, 절반은 그녀의 몸으로 들어온 아이였다.
아이에게 내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딸에게 가서 아흐레의 날들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꿈의 다리를 건너 구름처럼 떠 있는 섬을 다녀온 것 같았다.
그곳에 내 꿈의 아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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