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림산방의 바로 옆에 쌍계사란 이름의 절이 있다. 쌍계사란 절의 이름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이름이 환기시킨 지명은 진도가 아니라 지리산 자락의 경남 하동이었다. 이름은 유명세를 통하여 독점이 되는 경향이 있다. 여행은 그렇게 한 절이 독점하고 있던 이름을 그 이름을 가진 모든 절들에게로 고스란히 돌려준다. 우리의 여행 중에 만난 진도의 쌍계사도 그렇게 하여 그 이름을 돌려받았다. 운림산방을 돌다가 담을 타넘어가도 될만큼 바로 옆으로 붙어 있는 절이었다. 운림산방을 흘러나온 발길이 자연스럽게 쌍계사로 향했다.
그녀가 절로 들어가는 문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첨찰산 쌍계사라 적힌 현판 아래 “소통과 화합대신 고집과 갈등을 일삼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반대한다”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다. 우리 마음이기도 하다. 요즘은 부처님이 우리의 마음을 잘 읽어낸다.
진도 쌍계사의 이름은 절을 가운데로 두고 양편으로 흘러가는 계곡에서 얻어졌다고 한다. 절로 들어가는 길에 왼쪽으로 있는 계곡은 금방 확인이 되지만 오른편 계곡은 다소 멀리 떨어져 있어 절의 입구에선 보이질 않는다. 절 왼쪽의 계곡은 산에서 흘러내린 지류이고 보이지 않는 오른쪽의 계곡은 본류이다. 두 물은 합쳐져 아래쪽에 있는 사천 저수지로 흘러간다.
절안에서 동백꽃을 만났다. 지난 해 핀 꽃이다. 한해를 넘겨 여전히 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슨 아쉬움이 있어 철지나고 한해 동안이나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것이 지난 해 마주 했던 2월 어느 날의 햇볕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 햇볕을 못잊고 있다면 그 빛은 지난 해엔 꽃몽우리 속에서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꽃을 피웠을 때 눈앞의 빛은 다른 빛이었으리라. 이제 다시 2월의 햇볕이 한해만에 꽃앞에 서 있다. 한해를 기다릴만한 빛이었다.
동백나무 밑은 눈밭이다. 꽃필 때는 아마도 나무 밑에 눈은 없었을 것이다. 한해를 기다린 끝에 꽃은 나무밑에 깔린 눈속으로 몸을 던졌고, 눈속에서 핀 동백으로 다시 섰다. 꽃은 가지 끝이 피워내지만 때로 한해의 기다림으로 눈밭으로 몸을 던져 피워내기도 한다.
동백 한 송이는 아예 눈 속으로 제 몸을 묻고 살짝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고 들자면 꽃이 떨어지고 눈이 내렸을 것이니 눈의 품으로 뛰어든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그 시간의 순서를 뒤집고 싶어진다. 눈이 먼저 내리고 그 품으로 안겼을 때 세상이 달리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풍경도 홀로 보는 것과 누군가의 품에서 보는 것은 느낌을 크게 갈라놓는다. 아무리 둘이 함께 해도 우리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둘의 위력을 몰랐을 때의 얘기에 불과하다. 둘은 하나에 하나를 더한 단순한 수의 조합이 아니라 하나와는 다른 둘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마법같은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둘이 함께 보면 같은 세상도 달라진다. 동백 하나가 눈의 품에 깊숙이 몸을 묻고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홀로 볼 때와는 세상이 달랐을 것이다.
절의 한켠에서 개 한 마리가 늘어지게 아침잠을 즐기고 있다. 찍을 때는 몰랐는데 마루 위를 보니 경쟁이라도 하듯 고양이 한 마리가 함께 잠에 빠져있다. 개는 사진을 찍으려 다가가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잠깐 바라보긴 했지만 이내 들었던 고개를 내려놓았으며 눈꺼풀을 닫아 걸었다. 개와 고양이가 함께 잠을 자는 이상한 아침이었다. 머리를 둔 방향은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동백의 씨앗이다. 동네 아저씨가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새들의 먹이이기도 하단다. 새들의 식사거리인 셈이다. 땅에 묻고 15일쯤 지나면 싹이 나고 나무로 자란다고 했다. 실제로 나무 밑에는 떨어져 발아한 동백의 작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돋아 있었다.
동백 두 송이가 눈밭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지금은 소근대며 소리로 서로 오고가겠지만 곧 눈이 녹고 서로를 눈 속으로 들일 것이다.
다시 차를 세워놓은 곳으로 걸어 올라가다 길가에서 새 한 마리를 보았다. 길바닥에 줏어먹을만한 것이 있나 싶었는데 유심히 살펴봤더니 눈이 녹은 물을 쪼아먹고 있다. 저수지가 얼어붙어 갈증을 달랠 물이 없었나 보다. 눈은 녹으면서 새의 갈증을 달래준다. 겨울의 마지막 끝자락에서 좋은 일 하나하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