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를 진도 아리랑 노래비가 서 있는 첨찰산 자락의 주차장에 세워놓고 걸어서 운림산방으로 내려갔다. 원래는 입장료가 있는 곳인데 설날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문은 열려 있어 둘러보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운림산방은 화실이다. 말하자면 그림의 방이다. 방의 주인이 화가이면 그 방은 동시에 그림의 방이 된다. 사람의 방에선 사람이 살지만 그림의 방에선 그림이 잉태된다. 이곳 화실의 주인은 추사 김정희가 가장 아꼈던 제자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시대 남종화의 마지막 불꽃이라 일컬어지는 소치 허련이었다. 우리는 그의 그림은 보지 못했지만 대신 그가 말년의 작업실로 삼았던 운림산방은 둘러볼 수 있었다. 화가의 그림 구경이 아니라 화가의 작업실 구경이었다.
출입구를 들어서자 잔디밭에 정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림자가 만들어낸 그늘의 경계를 가운데로 두고 완연히 다른 두 세상이 있다. 아직 겨울이 걷히지 않은 계절 탓이다. 그 두 세상의 모습이 봄이나 한여름 때와는 느낌이 완연히 다를 뿐 아니라 색도 다르다. 그늘의 경계 바깥은 아침 햇살을 한껏받아 따뜻함이 녹아난다. 그늘의 경계 안쪽은 겨울 추위가 서릿발을 하얗게 세우고 있다. 햇볕의 위력이 엄청나다는 생각이 든다. 햇볕의 위력을 등에 업고 봄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늘 속은 여전히 겨울이다. 밀려드는 봄 때문에 그늘 속에서 겨울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듯했다.
햇볕은 따뜻함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연못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의 그림자를 물 속으로 밀어 한 폭의 그림을 만든다. 화가의 작업실에선 햇볕도 붓을 든다.
땅이 녹으면서 누군가가 딛고 간 진흙땅에 발자국이 남았다. 알고 있나요. 당신의 발자국이 땅을 안정되게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고 있다는 사실을.
수로를 타고 바닥에 납짝 엎드려 흘러간 물이 연못으로 떨어진 뒤에는 동심원으로 헤엄을 쳐 연못의 가운데로 나간다. 중간쯤 헤엄치던 동심원의 물결이 희미하게 물결을 놓으며 연못 속으로 잠긴다. 나머지는 잠수하여 나무 그림자로 향했을 것이다. 수로를 기고, 물결로 헤엄치고, 잔잔한 수면 속으로 잠수한 끝에 도달하여 맞잡은 것이 그림자라면 슬플 것 같지만 무엇이든 그림자의 뒤에 그것의 실제가 있는 법이다. 겨울에서 풀려난 물은 그렇게 하여 먼저 그림자에 닿고 그리고 그 다음엔 나무의 뿌리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 만남이 키워낸 나무 한 그루가 연못의 한가운데 있었다.
얘, 뭘 가리고 그래. 그렇게 가리고 있으니 그곳이 어디 부위인줄 더 잘 알겠다.
나랑 같이 여행간 여자. 나는 운림산방을 들어서서 연못 왼쪽으로 가며 사진을 찍었다. 그녀는 나와 달리 연못의 오른쪽으로 갔다. 같은 곳을 갔지만 간 길은 달랐고 본 것도 달랐다. 그러다 나는 그녀를 보았고, 그녀는 나를 보았다. 우리는 각자의 길에서 각자의 세상을 보았고, 그리고는 만나서 서로를 보았다.
마당 깊숙이 들어온 햇볕이 마루의 갈라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마루 아래쪽의 짙은 그늘을 송송 썰어놓았다. 설날이라 떡썰기 놀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다.
원래 덩굴 식물은 기어 올라가는 것이 숙명인데 담장을 다 기어올라간 이 송악은 허공으로 발을 짚었다가 아래쪽으로 휘어졌다. 송악은 남쪽에서만 볼 수 있는 덩굴성 상록수이다. 담쟁이 덩굴이 잎만 가진데 비하여 송악은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그러니까 꽃과 열매까지 송악의 삶을 모두 마주하려면 한 해에 세 번은 때를 맞추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오늘은 송악이 잎으로 엮어낸 푸른 삶만 스친다.
햇볕이 잘드는 좋은 자리에 목련이 한 그루 서 있다. 가지끝에 잡힌 목련의 꽃몽우리들이 모두 쏟아지는 햇볕을 마음껏 호흡하고 있었다. 햇볕을 호흡하며 목련은 하얀 꽃의 꿈에 젖는다. 그 꿈의 아래에 서 있는 동안 나도 잠깐 몽롱했다.
덩굴 식물 하나가 굵은 나무 둥치를 타고 오른다. 마치 내가 너의 뼈가 되어줄께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나무는 속의 가운데를 비워두었으나 덩굴 식물이 타고 오르며 겉으로 드러나는 투명한 뼈를 얻었다.
운림산방은 말뜻을 그대로 풀면 구름의 숲이지만 오늘 구름은 없고 화창한 햇볕만 가득하다. 햇볕이 그려낸 나무와 산 그림자가 연못의 속을 채우면서 좋은 그림 하나를 보여주었다. 연못이 나무와 산과 하늘을 안고 오전의 시간을 고요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들어오는 길의 정자를 보니 뒤쪽은 여전히 눈이 하얗다. 겨울이 정자의 뒤통수를 차디찬 손으로 잡아당기고 있다.
앞으로 오니 정자의 지붕 앞쪽은 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따뜻한 봄이 햇살로 반짝이는 빛나는 이마를 정자의 지붕에 맞대고 있었다. 겨울과 봄 사이에 우리가 있었다.
4 thoughts on “진도의 운림산방 – 6일간의 설여행 Day 3-2”
따스한 볕이 녹아 든 대청마루의 한가로운 오후
몽치미를 베고 누워 한 잠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얼었던 땅이 녹아 여기저기 질퍽할 정도로 따뜻했어요.
남도의 유명한 화실 운림산방이 진도에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소치, 남농, 허백련 선생에 이르는 남종화 대가들의 작품이 있다는데,
바깥 풍경만 봐도 운치가 흐르는 문화공간이네요.
첫 번째 잔디밭 사진은 무슨 그림 같아, 시선을 잡아당깁니다.
저는 여기가서야 알게 되었어요.
그 이름은 텔레비젼 프로그램 진품명품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거 같아요.
박물관이 있어서 문을 열었더라면 그림도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설날이라 공짜로 구경하는 대신 그림은 못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