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사가지고 내려온 햇반이랑 컵라면이 거의 다 떨어져서 그녀가 장을 보러 다시 항구로 나갔다. 그 사이에 나는 카메라를 짊어지고 마을의 바로 뒤쪽에 있는 범바위 쪽으로 향했다.
짐을 푼 권덕리의 민박집은 문을 열면 바다가 빤히 보였고, 창의 바로 앞으로는 산으로 가는 길이 하나 놓여있었다. 미리 봐두었던 그 길로 터덜터덜 걸음을 들여놓았다. 가다가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아래쪽으로, 하나는 위쪽으로 방향을 갈라선다. 아래쪽 길로 가다가 아무래도 이 길은 아니다 싶어 밭두렁을 가로 질러 위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디나 가면 길이 된다. 나중에 알았는데 원래 들어섰던 길로 가도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길은 올라가는 길이라면 내가 바꾸어탄 길은 일단 올라가서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이날 저녁의 길은 모두 일단 위로 올라가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걸음을 반복했다. 오르락 내리락한 길이었다.
조금 올랐더니 곧장 전망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말탄 바위라고 한다고 한다. 말의 잔등에 올라있는 기분이 드는 전망을 주기 때문이란다. 말탄 바위에서 내려다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의 저녁해는 말탄 바위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수평선 너머로 보낸다.
말탄 바위에서 위로 올려다 보니 커다란 바위 하나가 보인다. 범바위이다. 범처럼 생긴 것 같지는 않다. 요 위쪽에 우리가 민박집을 구한 권덕리가 내려다 보이는 좀더 작은 규모의 바위가 있다. 범바위 앞쪽에 마련된 안내에 따르면 그 바위쯤에서 호랑이가 어흥하고 포효를 했는데 그 울음소리가 이 범바위에 부딪쳐 되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호랑이는 그 반향에 크게 놀라 자신보다 더 무서운 짐승이 여기에 살고 있는 줄 알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안내는 그 뒤로 청산도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말탄 바위에서 보면 그 범바위로 올라가는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꼬불꼬불 휘어지면서 나를 유혹한다.
청산도의 길을 걷는 동안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말탄 바위에서 조망한 동쪽과 북쪽 풍경이었다. 해안선이 들쭉날쭉 거리며 흐르고 앞쪽으로 섬이 하나 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산허리를 따라 흘러가는 좁은 길이 보였다. 청산도에선 인가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언제 다시 청산도에 가면 이 산허리를 따라 하루 종일 걷고 싶다. 산을 두 개 정도 타넘으면 마을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듯하다.
범바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올라가다 보니 지는 해가 소나무 가지 아래로 걸려있다. 잠시 다시 눈을 맞춘다.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도 유난히 눈길을 끈다. 섬의 이름은 상도이다. 섬의 이름을 풀면 뽕나무 섬이다. 뽕나무가 많은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올려가다 아래쪽을 내려다본다. 내가 낙조를 마주했던 말탄 바위의 풍경이다. 올라가는 것 같지만 내려가는 방향이다. 하긴 바다가 보이니 당연히 내려가는 방향일 것이다. 올라가는 방향으로는 하늘이 보인다.
우리가 민박집을 구한 권덕리 풍경이다. 점심먹고 오후에 갔던 새땅끝 방향이 멀리 보인다. 저곳에서 이곳을 마주보다, 이제는 이곳에서 저곳을 마주본다. 자리를 바꾼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가끔 엇갈리게 걸어서 서로 정반대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은 나쁘지는 않을 일이다. 한마음, 한자리를 고집할 일은 아닌 듯하다.
범바위로 곧장 가질 않고 옆길로 걸어서 범바위 위쪽에 있는 고개로 먼저 올랐다. 올라가보니 넓은 주차장이 있다. 차로 올 수도 있는 곳이다. 차는 겨우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다. 눈앞에 보이는 산은 보적산이다.
고개를 돌리니 골짜기에 계단식 다랭이 논이 보인다. 멀리 해안으로 향하는 길도 보인다. 이 섬에는 차로 갈 수 있는 곳이 의외로 많다.
범바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작은 바위이다. 올라가보지는 않았다. 길이 많아 이렇게 저렇게 마치 얽힌 실타레 꿰듯이 걷는 맛이 있다.
범바위 전망대이다. 아직 사람이 남아있어 물을 한 병 사서 목을 축였다. 이곳에선 전복 라면을 판다. 한그릇에 8천원. 그냥 생수만 한 병 사서 마셨다.
전망대 앞쪽으로 자리한 범바위이다. 기어올라가면 올라갈 수 있을 듯보였지만 그냥 눈으로 보는데 만족했다. 낮이었으면 아마도 기어올라갔겠지.
범바위의 바로 옆으로 권덕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하지만 길을 돌아나와 다시 범바위 위쪽으로 고개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래쪽 권덕리 마을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카메라 가방을 열어서 전등을 꺼냈다. 어둠이 지운 길을 전등불로 밝히고 마을로 내려갔다.
고개에서 마을까지 내려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20~30분 정도 걸은 것 같다. 섬이 그다지 크지는 않아 길을 잃을 염려는 없는 듯하다. 오늘 하루 여기저기 걸어보니 한 이틀 주구장창 걷다가면 딱좋을 섬으로 느껴졌다. 중간중간으로 산으로 오르내리면서 파도 소리를 밀어냈다 가까이 했다하면서 걸을 수 있는 남다른 길이다. 마을로 내려오는데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지만 그 시간에 세상은 까많게 변해버렸다. 동네의 개들이 큰 소리로 짖었다. 나는 또 개들을 놀렸다. 짖으면 똥개, 안짖으면 진돗개. 아, 그런데 여기 그러고 보니 진도 아니네. 여긴 청산도인데.
그녀가 사온 햇반과 컵라면으로 속을 채우고 잠에 들었다. 처음에는 방이 따뜻하질 않다고 생각했는데 자다보니 상당히 따뜻했다. 이불과 요는 둘이 자기에는 넉넉하여 두툼하게 깔고 덮었다.
2 thoughts on “청산도 범바위의 낙조 – 6일간의 설여행 Day 4-4”
햇반과 컵라면 또 드시네요.^^
마을 밤 사진은 무슨 드라마 찍는 세트장 같아 보입니다.
호젓한 섬길과 산을 걸으며 구경하는 것도 좋은 여행 같은데,
저는 아직 엄두를 못 내겠네요.
사먹은 걸 곰곰히 생각해보니..
첫날 뼈다귀국, 그 다음 날 굴회, 그리고 청산도에서 성게알 비빔밥, 민박집 정식, 전복죽.. 올라오는 길에 먹은 고속도로 휴게실에서의 국밥이 전부인 거 같아요.
청산도는 너무 멀어서 충청도나 인천 정도의 섬을 물색해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