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5일째이다. 5일째의 아침은 어제 저녁 해를 보낸 곳에서 시작되었다. 청산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인 권덕리는 뒤로 보적산이란 산을 하나 두고 있고, 그 산줄기는 바다로 흘러내리면서 범바위를 거쳐 말탄 바위로 몸을 낮춘다. 그녀와 나는 말탄 바위로 올라가 내가 어제 혼자 보낸 저녁 해를 오늘은 아침 해로 함께 맞기로 했다.
어제도 이 길을 똑같이 올라 갔었다. 걷는 여행길에서 콘크리트로 덮여있는 길은 누구에게나 썩 내키기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길이 콘크리트 길로 계속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 콘크리트 길은 마무리가 되고 흙길이 그 길을 이어받는다. 콘크리트 길이 가는 곳까지 밭들이 있어 그 길이 농사를 짓기 위해 터놓은 길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빨리 어디까지 가기 위한 속도의 길이 아니라 농사의 힘겨움을 덜어주며 농부의 노고를 헤아리고 있는 것이 청산도에서 만나는 콘크리트 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속도 경쟁의 콘크리트 길과는 많이 다르다. 멀리 산위로 범바위가 보인다.
길을 홀로 외롭게 간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둘이 다닌 길을 둘이 다시 가는 것보다 언젠가 홀로 간 길을 둘이 가는 것이 더 새롭다. 둘이 간 길을 둘이 다시 가면 단순히 추억을 더듬는 길이 되지만 홀로 갔던 길을 둘이 가면 그 둘이 길의 느낌을 새롭게 열어준다. 그것이 둘의 힘이다. 아울러 마치 먼저갔던 기억의 힘으로 길을 열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먼저간 사람은 어제의 길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함께 가는 사람을 위하여 그 길을 예비해 두었다가 그 앞에 열어줄 수 있다. 길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닫혀있다가 그 길을 가는 사람의 발끝에서 조금조금씩 열리게 되며, 누군가 그 길을 한 번 열고 나면 그 사람은 그 길을 다른 사람에 열어줄 힘을 갖게 된다. 고개를 올라 말탄 바위에 이르자 어제 저녁 보았던 말탄 바위에서의 청산도 바다 풍경이 새롭게 열려있었다.
어제의 해는 말탄 바위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보냈는데 오늘의 아침 해는 상도의 머리 위로 떠 있었다. 원래 해는 수평으로 그어진 가는 경계선을 헤치고 슬쩍 머리를 내민 뒤에 그 수평선에서 발목을 빼고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지만 오늘은 안개가 수평선을 지워버렸다. 안개가 수평선을 지운 바다에선 해가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처음에는 희미하게 얼굴을 내밀고 그 다음엔 서서히 선명하게 우리들 가까이 다가선다. 그러니까 맑은 날의 해는 위로 떠오르지만 흐린 날의 해는 우리를 향하여 수평으로 날아온다. 안개를 헤치고 수평으로 날아와 우리 코앞에서 드디어 우리와 눈을 맞춘 아침 해가 상도의 머리 위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안개를 헤치고 수평으로 달려오긴 했지만 해는 더 이상 우리 가까이 다가오진 못했다. 해에겐 그 만의 거리가 있는 법이다. 그때부터 해는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떠오르면서 이제 아침의 만남을 정리해야 하는 아쉬움을 해는 빛의 팔을 길게 뻗어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 달랜다. 그 빛이 지나는 길에서 상도가 바다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아마도 지금 상도의 아침보다 더 눈부신 아침은 없을 것이다. 상도의 그림자란 알고 보면 마치 시원한 바람이라도 호흡하고 있는 것인양 한껏 아침해의 눈부심을 받으며 뒤로 쓸어넘긴 섬의 머리카락인지도 모른다.
동네의 소들도 아침을 다정하게 맞고 있다. 알았어. 싸우지 않고 다정하게 서로의 얼굴을 부비며 사는 것이 좋기는 하지. 우리 너무 놀리지 좀 말어.
아침을 먹고 민박집을 나온 우리는 길을 나누어 가기로 했다. 그녀는 차로 산을 넘어 구정리와 읍리로 가기로 했고, 나는 바닷가의 길을 걸어 같은 방향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가 어제 길을 나누었던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내가 가야할 길은 바다로 내려가고 있었다. 바다를 향하여 열린 길, 그게 여행 5일째에 내가 걸어갈 길이었다.
또 교신에 문제가 생겼다. 막 바닷가로 나와 숲길로 접어들려고 하는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광각렌즈 하나 주고 가면 안되겠냐는 것이었다. 그러고마 하고 어제 묵으려 했던 민박집에서 내려가면 나오는 바닷가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기다려도 차는 내려오질 않는다. 할 수 없이 슬슬 올라가 보았다. 어디에도 차가 보이질 않는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녀는 이미 구정리 쪽으로 가 있었다. 어제 묵으려고 들어가 보았던 민박집이 세 곳이나 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녀가 말한 민박집은 내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머리 속에 떠올린 민박집이 아니었다. 차를 돌려서 온다는 것을 그냥 원래 약속한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는 낭길이라 불리는 바닷가의 숲길로 발길을 옮겼다. 낭길로 들어서기 전에 권덕리 해안의 풍경을 눈에 담아 두었다. 눈높이를 맞추고 담은 풍경이다.
낭길은 낭떠러지 길이란 뜻이다. 때문에 길이 산 허리로 아주 높이 흐른다. 아래로 바다가 아득하다. 좀전에 눈높이를 맞추었던 권덕리의 포구 풍경이 훨씬 넓게 펼쳐진다. 높이는 높이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담는 세상의 폭도 넓게 확대해준다. 우리가 높이를 가지려는 것은 사실은 높이 때문이 아니라 높이가 펼쳐주는 그 폭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서이리라. 그리고 폭이 넓어지면 더 많은 세상을 그 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눈에 담기는 세상이 넓어지듯, 높이를 가지면 심지어 갈등과 싸움도 둘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세상에 담길 수 있으리라. 난 오늘 높이를 갖고 세상을 넓게 열어주는 길을 걷고 있었다.
사실 청산도에선 거의 모든 길이 낭떠러지를 따라 흐르고 있다. 굳이 따지고 들면 낭길이 아닌 곳이 없다. 그러나 낭길이란 이름을 가진 이곳의 길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가 아래쪽으로 더욱 가파르게 느껴졌다. 멀리 어제 걷다가 남겨두었던 청산도 서쪽의 남쪽 새땅끝 부분이 보인다.
가파른 벼랑 위의 길이어서 폭이 그다지 넓지는 않다. 사람도 없어 호젓했다. 가끔 낭떠러지 아래쪽의 바다로 가는 길이 있었다. 어떤 곳은 아주 가파라서 밧줄을 잡고 내려가게끔 해주고 있었다. 다음에 한가한 시간을 마련하여 다시 오면 밧줄을 타고 바다에도 한번 내려갈 생각이다.
길의 나무들이 한껏 키를 세우고 바다 풍경을 막았다가 다시 바다를 보여주곤 한다. 파도 소리는 계속 귓전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숲을 파고든 길처럼 바다가 섬을 파고 들었다. 이 풍경에 취해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가 고개를 돌렸더니 왠 젊고 예쁜 처자 하나가 눈앞에 서 있다. “아이쿠, 깜짝이야!” 인기척 없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예의없이 당혹감으로 맞아들였다. 처자가 웃는다. 그냥 가려다가 사진찍는 동안 방해하지 않으려고 한참을 서 있었단다. 그 얘기 듣고 고맙다고 했다.
낭길을 빠져나왔더니 바닷가에 벽을 노랗게 칠한 민박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침에 파도 소리와 함께 눈을 뜰 수 있을 듯 보이는 민박집이었다. 청산도에선 바닷가로 접한 집들은 별로 보이질 않아서 그런지 아마도 민박이나 낚시만 전문으로 하는 집이 아닐까 싶었다. 구정리 바닷가의 자갈을 밟으며 계속 걸음을 옮겨놓았다.
2 thoughts on “청산도 상도의 해돋이와 낭길 – 6일간의 설여행 Day 5-1”
요즘 세대들보다 더 멋진 준말을 쓸 줄 아는 분들이 만든
낭길이란 이름이 재밌네요.
산에서 만나는 낭길도 아득해 보일 때가 많은데,
바닷가를 접한 산길에 나있는 낭길은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바다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의 유혹을 시간 때문에 그냥 지나친 것이 못내 아쉬워요. 이번에 이틀간 답사를 하면서 정말 섬에 대한 일주 계획을 세운 듯도 싶어요. 담에는 가면 머리속의 길따라 하루 종일 한번 걸어보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