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리에서 화랑포와 새땅끝쪽 풍경은 차로 둘러보고 그 다음에 마을은 한참 동안 천천히 걸어서 돌아다니며 둘러본 그녀와 나는 오늘 배를 타고 나가 완도 구경을 할 것인지, 아니면 청산도에서 하루 더 묵으면서 오늘 늦게까지 섬을 둘러볼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 고민 끝에서 나온 결론은 일단 항구로 나가서 형편을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를 몰아 도청항으로 향했다. 당리에서는 5분 거리에 있는 항구이다.
도청항엔 설을 쇠고 다시 육지로 나가려는 배들이 길게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끝에 붙으면 오늘 막배는 탈 수 있을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후 시간을 내내 기다림으로 보내야 한다. 그녀와 나는 청산도에서 하루 더 묵기로 하고 항구에서 펼쳐지고 있는 농악 구경에 나섰다. 농악대는 일단 바다 배경으로 한번 놀아주었다. 사진찍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주로 굿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라고 했다.
농악대는 청산도의 기념탑 앞으로 늘어서서 포즈를 잡아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청산도로 들어오던 어제도 보았는데 오늘도 또 본다. 어제도 도청항 주변의 이 가게 저 가게를 돌더니 오늘도 또 이 가게 저 가게를 돌면서 농악을 선물했다. 농촌이 아니라 어촌이니 농악이 아니라 어악이 되려나. 어쨌거나 가게마다 음악을 나눠주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농악도 참 낭만적이다.
일단 <봄의 왈츠> 촬영장에 계신 분이 알려준 돌담민박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그 민박집이 있는 지리는 도청항에서 아주 가까웠다. 길가에 있어 곧장 찾았으며, 그 집에 여장을 풀었다. 3만5천원에 묵기로 했다. 한창 성수기 때는 얼마나 하냐고 물어봤더니 그때는 7~8만원 한단다. 짐 들여놓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시 또 햇반과 컵라면이다.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민박집 안주인이 얼굴을 들이민다. 손에 돔이 한 마리 들려있었다. 에구, 어떻게 그렇게 먹고 다니냐고 한다. 졸지에 가난한 밥에 황제의 찬이 되어 버렸다. 뼈만 앙상하게 남기고 남김없이 발라 먹었다. 아마 뼈가 좀 물렀다면 우리에게 내준 생선은 뼈도 추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뼈는 상당히 단단하여 그 생선, 간신히 뼈는 추릴 수 있었다. 맛? 말해 무엇하랴.
늦은 점심을 먹고는 민박집을 나섰다. 낙조를 보고 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늦을 것이라고 말해 두었고 저녁을 좀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1인분에 5천원의 가격으로 백반을 제공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청산도 들어와서 가장 먼저 찾았던 진산리 해수욕장이다. 동네의 꼬리표는 해뜨는 마을이라고 달고 있지만 서쪽으로 한참 기운 해가 산그림자를 바다쪽으로 밀고 있었다. 해뜨는 마을에 저녁이 밀려오고 있었다. 산그림자가 바다를 기웃거리는 해변에서 아주머니들이 무엇인가 따고 있었다. 그녀가 뭐냐고 물었더니 파래라고 했다.
차로 가다가 경치가 좋아 보이면 차를 멈추었다. 상산포라고 불리는 포구이다. 멀리 보이는 섬은 항도라고 불린다. 달리 목섬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 같았다. 방파제가 있어 섬까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바다가 들락거리는 섬에선 높은 언덕에 자리를 하면 바로 아래를 보기 보다 섬을 파고든 바다를 건너 자꾸 멀리 맞은 편으로 시선을 두게 된다. 맞은 편의 풍경은 그곳으로 건너가고 싶게 만든다.
상산포구의 바로 뒤로는 다랭이 논이 포구쪽을 향하여 몸을 낮추면서 차곡차곡 쌓여 있다. 논의 꼭대기에 자리한 집에선 개들이 심하게 짖었다. 시간이 나면 눈앞에 보이는 산에 올라보는 것도 좋을 듯하였다.
상산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봐두었던 항도로 들어가기 위해 큰 길을 버리고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길가로 함지들이 잔뜩 놓여있다. 한창 때는 꽃이 가득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 꽃을 함지에 넣어서 키운 것일까. 궁금했지만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 물이 귀한 곳이니 비올 때 함지에 비를 받아 오래오래 꽃의 목을 축여줄 수 있기 때문일까. 안내 지도에 이 길이 들국화길로 되어 있다. 아마도 함지를 채웠던 꽃이 들국화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뻘인지 해수욕장인지 헷갈렸지만 이곳이 신흥해수욕장이라고 한다. 바다가 가장 깊게 들어왔다 나가는 해수욕장 같다.
방파제를 건너 섬의 아랫 자락에 차를 대고 숲속으로 난 길로 걸음을 옮겨본다. 전망이 트이면 길은 곧장 멀리까지 내빼지만 나무가 우거지면 길도 우리를 제켜두고 저 혼자 걸음을 재촉하진 못한다. 숲에서 걸음이 막힌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야가 길게 트이자 요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길은 나무 사이로 뱀처럼 몸을 비틀며 길을 재촉한다. 저만치 앞이 안보일 정도 내빼버린다. 스르륵 소리가 날 법할 정도로 날렵하다.
드디어 항도의 끝에 도착했다. 항도를 목섬이라고 하는 것은 항도의 항(項)가 우리가 흔히 항목이라고 할 때의 그 항자인데 그 한자에는 목이나 목덜미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원래는 목섬이었는데 그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항도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항도의 끝을 새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섬의 모양이 새가 앉아 있는 형국이라고 하며, 그러니까 새끝은 새의 목아지 끝부분이란 뜻이 될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이곳이 청산도에선 가장 고기가 잘 물리는 명당 낚시터라고 한다. 새끝의 바다 위로 배가 한 대 들어온다. 배가 들어오니 풍경이 또다르다. 배는 일을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지만 동시에 바다 위에 풍경을 그리면서 다닌다. 청산도에서는 대개가 그렇다. 일이 곧 풍경이 되곤 한다.
들어갈 때 보니 중간에서 길이 갈라져 있었다. 그래서 돌아나올 때는 들어갈 때와 다른 길을 택했다. 경사는 가파랐지만 길의 폭은 넓었다. 원래부터 있던 길 같지는 않았고 관광객을 위하여 내놓은 새로운 길 같았다.
길을 내려오자 곧장 바다가 나타난다. 벌써 다 왔다고 좋아했더니 그게 아니다. 우리가 차를 세워놓은 바다는 이곳이 아니었다. 바닷가의 돌 위에 푸른 바다풀이 덮여 있었다. 갯돌이 풀들의 거처이다. 이곳의 갯돌은 거처를 내주고 푸른 생명을 얻었다.
잠시 바닷가를 기웃거린 길은 다시 숲으로 올라간다. 바닷가를 따라 조금 오르락내리락 한 뒤에 드디어 우리가 차를 댄 바닷가로 나왔다. 잠깐 걸은 길이지만 섬에 와서 또 섬으로 들어간 그 길은 아주 좋았다. 다음에 가면 정말 새끝까지 가서 바다를 마주해볼 생각이다. 아마도 그곳이 새의 부리끝이 될지도 모른다. 그곳에 이르면 나는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 위를 날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