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여행의 5일째 오전을 권덕리에서 당리에 이르는 바닷가의 길을 걸으며 보낸 나는 당리에 이르러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영화 <서편제>에 나왔던 길을 걸어 내게로 왔다. <봄의 월츠> 촬영장을 잠시 기웃거린 우리는 당리의 언덕에서 바다와 마을 풍경을 구경한 뒤 차로 화랑포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당리의 언덕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섬의 산자락이 마치 팔을 뻗어 둘러쌓고 있는 듯한 아늑한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넓게 보면 바다가 섬을 품고 있는 것이겠지만 섬과 바다는 바다가 일방적으로 섬을 품고 있는 관계는 아니다. 청산도의 곳곳에서 바다는 섬으로 밀고 들어와 섬의 품에 안겨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바다와 섬은 서로 안고 있었다. 그러니 육지에서 서로 떨어져 소원했다 하더라도 섬에 가선 서로 부등켜 안고 다녀야 한다. 섬에 가선 섬을 닮아야 한다. 굳이 섬에 가서 육지를 고집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당리의 언덕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당리 마을이 아래쪽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보이는 마을은 읍리 마을이다. 마을의 집들은 옆집의 떠드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다. 섬에선 바다와 섬만 포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집들도 서로 등과 배를 비비며 가까이 붙어 있다. 섬에 가선 서로 가까이 붙어 다녀야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섬에선 섬과 닮아가며 지내다 나와야 한다. 육지에선 맛볼 수 없는 섬의 매력이 그것이다.
첫날 걸어서 갔던 길을 오늘은 차로 들어가본다. 차는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이어서 멀리서 차가 오는 것이 보이면 차를 서로 비킬 수 있는 곳에서 차 한 대가 서서 기다려야 했다. 대개 이곳에 사는 분들의 차가 우리의 차를 기다려주었다. 고맙기도 하고 또 부득부득 차로 밀고 들어가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차로 밀고 들어간 끝에서 이런 풍경을 만났다. 저 멀리 바다로 삐져나간 곳을 새땅끝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바닷가로 가려면 차를 세우고 걸어가야 하는데 바다와의 만남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 놓았다.
발로 걷던 길을 차로 한 바퀴 돈 뒤에 그녀와 함께 화랑포로 가는 길에 섰다. 혼자 왔을 때는 반대 방향의 바다로 갔었다. 오늘은 그녀와 함께 화랑포로 가는 길로 내려간다. 길의 끝에 파도가 꽃처럼 피어나는 바다가 있다고 하는 곳이다.
화랑포의 바다이다. 파도는 잔잔했고 파도보다 갯돌을 더 많이 만났다. 섬에서 우리에게 전한 얘기는 이곳을 일러 파도가 꽃처럼 반짝이며 피어나는 해변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갯돌밖에 보질 못했다. 하지만 그곳의 갯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파도가 꽃을 피우고 나서 남긴 어떤 결실 같았다. 동글동글한 갯돌들을 밟고 해변을 거닐며 잠시간을 시간을 보냈다. 갯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파도가 꽃을 피우고 나서 남긴 결실인지도 모른다.
화랑포를 둘러보고 난 뒤 다시 당리로 나왔다. 그리고 마을의 골목을 누비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냥 마을 자체가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벽의 한쪽은 콘크리트로 밀봉되어 있지만 또 한쪽은 온통 돌로 채우면서 성긴 틈새를 그대로 노출한다. 묘한 조합이다. 이곳 청산도의 사람들은 수많은 돌들이 하나하나 모서리를 맞대는 돌담의 매력을 잊지 못하면서도 현대적 콘트리트 담벽의 편리함을 잠깐 엿본 듯하다.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다. 돌담 일색이었다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졌을 것이다. 삶은 일색의 돌담에 있지 않다. 흔들리는 것이 삶이다.
가을쯤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쟁이 덩굴이 남긴 그 어지러운 삶의 흔적이 가을쯤 찾으면 무척이나 무성할 듯 싶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저렇게 잎들을 모두 버린 것일까. 가끔 푸른 생명의 한여름을 그 생명의 흔적이 모두 스러진 겨울에 꿈꾸는 것이 우리들이다. 때로 한해의 시간에 일어나고 스러지는 생명이 놀랍기만 하다. 정말 저 자리에 푸른 생명이 있었던 것일까. 기억해 두었다가 여름이나 겨울쯤 생명을 확인하러 다시 들리고 싶은 마을이었다.
마을을 기웃거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나는 할머니랑 얘기를 나누고 그녀는 할머니의 집 옥상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는다. 사람만나는 것이 요즘 여행의 큰 재미이다.
청산도 당리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얻어마신 커피이다. 사랑의 커피였다.
무슨 술도 아니건만 할머니와 나는 커피로 건배를 했고, 할머니가 나누어준 청산도의 정에 진하게 취했다. 할머니는 4남4녀를 두었다고 했으며, 밥을 해줄테니 먹고 가라고 했다. 그냥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는 그 시간만으로도 좋았다. 할머니가 살아온 얘기를 좀더 듣고 싶었다. 청산도 풍경의 많은 부분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할머니를 만난 것이 그 풍경의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큰 행운 같았다. 많은 얘기를 듣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마을을 돌아보다 보니 어느 집에서 초록이 지붕으로 올라가 있었고, 또한 그 초록이 집의 주변을 둘러싼 밭에 납짝 엎드려 있었다. 지붕에 올라간 초록은 햇볕에 바래고 있었고, 밭에 납짝 엎드린 초록은 봄을 마중하면서 더욱 푸르러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둘은 반목하지 않고 묘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청산도의 삶 속에선 초록이 지붕 위에서 둥지를 틀기도 했고, 밭에서 둥지를 틀기도 했다. 보통은 지붕 위에서 둥지를 튼 초록이 고립이 되곤 하는데 청산도에선 밭에 엎드린 초록과 잘 어울렸다.
2 thoughts on “청산도의 화랑포와 서편제 마을 당리 – 6일간의 설여행 Day 5-3”
당리와 읍리, 마을 이름도 예쁘네요.
얼추 봐도 백 호가 넘는 집들이 진짜 다닥다닥 븥어있네요.
지붕색이 섬마을 같지 않아 보입니다.
육지의 바닷가랑 좀 다른 것 같았어요.
마을이 확실히 예쁘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