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보적산의 낙조 – 6일간의 설여행 Day 5-5

청산도를 돌아다닌 것은 단 이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이틀 동안 걷고 돌아본 것으로 섬의 지리는 거의 손 위에 얹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섬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나에겐 이틀이면 가슴 속에 들일 수 있는 섬이 청산도였다. 그렇다고 가슴 속에 들인 섬이 그렇게 작다고 할 수도 없다. 그 작은 섬에 많은 것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5일째 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보적산에서 낙조를 보는 것으로 잡았다. 하루 전 범바위에 올라갔다가 보아둔 산이었다. 그때는 산의 허리까지 갔었는데 오늘은 산꼭대기로 올라가 저녁해를 보내고 싶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상서리에서

항도를 나온 나는 빨리 보적산으로 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이곳 청산도에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이 있다며 그 마을에 들렀다 가자고 했다. 그 마을이 동촌리와 상서리이다. 항도에서 나오면 만나는 마을이다. 그녀는 돌담길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지만 내 눈길이 향한 곳은 원동리 방향이었다. 가을 걷이를 끝내고 빈 몸을 눕힌 논들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저녁빛이 마치 이불처럼 덮이고 있었다. 낮게 누운 논 위로 저녁해는 온다. 마치 오늘 저녁 따뜻하게 덮고 잘 포근한 이불처럼.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상서리에서

하지만 돌담길이 아름다운 마을에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 나도 상서리 동네로 몸을 돌려 돌담길을 걸어본다. 돌담길은 길옆을 막아서면서도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느낌이 나는 길이다. 콘트리트 담벽은 매끈하기는 하지만 그 매끈함으로 길을 밀봉해버린다. 돌담길의 길은 이 집 저 집을 기웃대며 길을 가는데 콘트리트 담벽의 길은 담벽 안으로 갇혀서 길을 간다. 밀봉된 길에선 또 삶들이 모두 그 벽의 너머로 웅크리고 숨을 죽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돌담은 그렇질 않다. 돌담은 돌담의 틈새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조금조금씩 흘러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의 걸음에 묻어나는 느낌이 난다. 아마도 설날 이 돌담길을 걸어 부모님댁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정말 말 그대로 이곳 사람들의 마음이 돌담을 새어나와 골목이 시작되는 어귀까지 마중을 나온 느낌을 더욱 확연히 느낄 것이다. 사람들의 체온이 집에서 새어나와 골목으로 흐르는 길, 그것이 돌담길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양지리에서

큰길로 나가기 위해 차를 몰아가다가 저녁빛에 물든 갈대밭에서 잠시 멈추었다. 갈대가 저녁빛에 물들어 있었다. 모든 것들은 빛에 물들면 투명해진다. 투명해지면 그때가 가장 보기에 좋다. 갈대가 투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그 아름다움을 즐겼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미리 봐두었던 길로 보적산을 찾아갔지만 중간에 길을 잘못들어 다시 돌아나오는 짧은 낭패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늦지 않게 보적산 중턱에 도착했다. 그녀는 범바위 전망대로 보내고 나는 산의 허리를 뚝 잘라 중간 지점에서부터 보적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가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멀리 길이 가늘게 폭을 좁히며 범바위 쪽으로 흘러간다. 그녀도 범바위 쪽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가끔 보적산 산꼭대기를 힐끗거리기도 할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 보니 돌담으로 아늑하게 거처를 마련한 무덤 하나가 보인다. 바람은 걸음이 급해지면 볕이 좋은 날에게도 따뜻함을 쓸어가 버린다. 돌담은 걸음이 급한 바람의 걸음을 막아세운다. 그리고 걸음이 느려진 바람의 손에 급한 걸음 끝에 길에 흘린 아늑함을 다시 쥐어준다. 돌담의 안쪽은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에도 아늑하다. 급한 걸음 끝에 잃어버린 아늑함을 바람이 그곳에서 잠시 손에 쥐었다 가기 때문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그냥 오르다 잠시 내려다보고, 또 오르다 내려다보고 하면서 산을 올랐는데 그렇게 오르다 보니 어느덧 보적산 정상이다. 330m의 산을 거의 정상 턱밑에서 올랐으니 사실 산을 올랐다기보다 언덕을 하나 올라온 셈이다. 정상이 넓고 펑퍼짐해서 어디로나 시야가 트였다. 한 30명 정도가 소풍을 와서 널널하게 앉아 놀다가 갈 수 있을 듯 보였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보적산 정상에서 바라본 낙조이다. 해가 이제 이마만 내놓고 있었다. 난 해와 이마를 맞대고 눈을 맞추었다. 산아래로 보이는 바닷가의 길을 이번 이틀 동안 모두 걸어보았다. 하루 종일 걸으면 섬의 절반은 걸을 수 있는 듯 보인다. 이 길에서 저 편 길이 보이고, 그 저 편이 이 편이 되고 나면 내가 걸었던 길이 저만치 바닷 물결 너머의 산허리에 걸려있는 길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정상에서 북쪽 방향의 풍경이다. 저만치서 길이 끊긴듯하지만 걸어가면 또 길이 나온다. 보적산은 정상에서 산지 사방으로 내려갈 수가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보적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본 풍경이다. 산허리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 장기미 해변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이 길을 따라 해변까지 가보려고 했지만 길을 잘못들어 결국 포기해야 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정상에서 바라본 범바위 쪽 풍경이다. 산은 높이 오를수록 세상을 아득하게 만든다. 세상을 아득한 그리움으로 바라보고 싶다면 산에 오르는 것이 좋다. 그리운 사람을 아래쪽에 남겨두면 더더욱 실감이 될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정상에서 서쪽 방향의 풍경이다. 청산도를 잘아는 사람이라면 손가락으로 구장리, 읍리, 당리란 이름의 마을들을 하나하나 짚어줄 수 있을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어제 묵었던 범바위 아래쪽의 권덕리 방향 풍경이다. 산의 정상에서 한바퀴를 돌며 청산도의 모든 방향으로 조망해본다. 오늘은 산의 허리를 잘라 산의 꼭대기로 올라왔지만 어제는 산의 허리에서 꼭대기쪽으로 눈길만 주고는 휘어지는 길을 따라 권덕리 마을로 내려갔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의 보적산에서

내려오다 보니 초승달이 떠있다. 산꼭대기서 조금더 버티다가 달을 찍고 내려올 걸 그랬다 싶다. 갈대들이 발돋음을 하여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승달은 등을 하늘에 깔고 누워있었다. 볼 것은 아래쪽이 더 많은 것 같은데 달은 어쩐 일인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2월 5일 청산도 지리의 돌담민박에서

보적산에서 나오는 길에 대학생 커플을 만났다. 우리 차를 보고 황급히 뛰어왔다. 하긴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으니 마음이 급해졌을 것이다. 남학생은 군대 갔다와서 복학한 대학교 4학년이라고 했고, 여학생은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청산도로 여행을 오다니 예쁘장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둘을 태우고, 우리가 장기미 해변을 구경하고 갈테니 그곳까지 잠시 같이 갔다가 오자고 했다. 둘은 자신들은 시간이 널널하니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나 길을 잘못들어 해변은 찾지 못하고 차를 돌려야 했다. 방을 구했다는 청도항에 둘을 내려주고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들어가자 곧바로 민박집에서 저녁상을 차려주었다. 된장찌게의 맛이 일품이었으며, 특히 젓가락이 자꾸만 향한 것은 참소라 반찬이었다. 나와 나이가 동갑이라는 주인 아저씨가 참소라의 껍질도 구경시켜 주었다. 미리 사가지고 들어온 막걸리 한 잔을 마셨다. 주인 아저씨는 술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묵고 가는 사람들에게 소감 한마디씩을 받아둔다고 했다. 받아둔 소감이 두꺼운 노트로 한권 분량이다. 마음을 주고 받으며 손님들을 맞고 보내는 집이다. 블로그를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안주인이 해보고 싶다고 한다. 그 바람에 민박집의 컴퓨터를 켜고 즉석에서 티스토리 블로그를 만들어주었다. 안주인이 내일 아침 전복죽을 쏘겠다고 했다. 블로그 만들어주고 전복죽 얻어먹는 재미를 챙기게 되었다.

7 thoughts on “청산도 보적산의 낙조 – 6일간의 설여행 Day 5-5

    1. 전복죽은 약간 초록색 기운이 도는데 소라죽은 그냥 흰빛으로 끓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구요. 전복죽은 배도 든든했어요.

  1. 내가 차린 밥상을 컴퓨터에서 보니 정말 신기하고 웃음이 자꾸나요. ㅎ ㅎ 지난번엔 이곳에서 답장을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하다가 결국 못하고 돌담민박 블로그에서 답장을 보냈는데 오늘은 해봤더니 되네요. ㅋㅋ 재미 있어요. 앞으로 자주 볼께요..^*^

    1. 이제 곧 청산도 풍경이 좋은 시절이 오네요.
      그곳은 시야가 트였다 가렸다 해서 좋더라구요.
      보통 육지가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잘 트이질 않다가 섬에 가서 그렇게 바다보면서 걸으니까 아무리 걸어도 다리도 아프지 않았던거 같아요.

  2. 컵라면에 햇반 드시다가 꿀맛이었을 것 같습니다.
    모르긴 해도 청산도 민박집 블로그로는 최초가 아닐까 하는데,
    아주머니가 잘 사용하시겠어요.

    1. 민박은 아주머니가 아주 전담하시는 거 같아요.
      컴퓨터는 주로 온라인으로 쇼핑할 때 사용하시는 거 같더라구요.
      아들이 군대가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들이 휴가오면 컴퓨터 사용법을 적극적으로 배워두시라고 했죠.
      청산도에서 민박만 전문으로 하는 집은 아주 독립적인 게시판을 만들어서 운영하더라구요.
      디카 사용법이랑 사진 보정 프로그램을 조금 익혀두면 그 다음부터는 잘 하실듯 싶어요.
      바깥에 나가있는 자식들이 많아서 스카이프같은 걸로 얼굴보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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