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의 품으로 돌아온 사과 – 2011 이상열 초대전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3월 11일 서울 역삼동의 TJH 갤러리에서
화가 이상열 선생님, 작품은 「사과나무」

종종 시를 읽을 때면 시가 단순히 세상의 풍경을 전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상은 시인의 앞에 놓여있는 세상과 똑같지만 시인의 시로 인하여 세상은 비로소 열리곤 한다. 가령 시인 이정록은 「지금 저 앞산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뒤집어지는 이유는」이라는 긴 제목으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갓 태어난 새들과 시소 놀이 해봤냐고/어린 나뭇가지들이 우쭐거리기 때문이다”라고 답한다. 짐작해 보자면 아마도 앞산 중턱쯤에 늦은 오후로 기운 햇살이 걸려 있었고, 그 햇살을 받아 나뭇잎들이 반짝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반짝반짝 거리며 뒤집어지고 있었다고 했으니 햇볕과 함께 바람이 다소 강하게 불면서 나뭇잎을 뒤흔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풍경이 바로 우리 앞의 풍경이다. 대개 우리는 그 풍경 앞에서 멈춘다. 그러나 시인은 그 풍경의 너머로 넘어가 바로 그 자리에서 어린 나뭇가지들이 갓 태어난 새들과 시소 놀이를 하고 있는 장면을 그려낸다. 그 순간 똑같은 풍경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열린다. 바로 그렇게 세상을 새롭게 열어주는 것이 시의 매력일 것이다.
그림도 이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림은 단순히 세상 풍경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화가가 새롭게 열어놓은 세상으로 우리들을 안내한다. 이상열 선생님의 초대전에 다녀왔다. 그 자리에서 받은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사과나무」였다. 그러나 그의 사과나무는 우리들이 항상 보던 사과나무가 아니었다. 잎들은 희열에 들뜬 듯 방사형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마치 나무가 반가움으로 팔을 벌리거나 앞으로 뛰쳐나오며 사과를 맞아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과나무의 열매는 나무에 매달려 있지를 않고 사과나무의 품속으로 깊이 들어가 박혀있었다. 사과라기 보다 옹이처럼 사과나무의 품에 깊이 묻혀있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내가 누군가의 품에 내 머리를 묻고 있다면 바로 그러한 느낌이 날지도 모른다. 왜 그의 사과나무는 희열로 들떠 있는 것이며, 그 와중에 사과는 사과나무를 품삼아 그 속으로 깊이 박혀있는 것일까.
몇해전 똑같이 사과나무를 주제로한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을 한 점 본 적이 있다. 그때의 사과는 열매라기 보다 꽃의 느낌이 강했다. 그때 나는 사과나무의 잎들 사이로 점점히 떠있는 붉은 사과에서 열매를 본 것이 아니라 꽃을 보았고, 그래서 나는 그의 사과를 꽃의 기억으로 읽었다. 모든 열매는 꽃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며, 그때 그의 사과는 그 기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의 사과나무를 본 적이 있다. 그때의 사과나무에서 사과는 푸르게, 혹은 붉게 춤추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사과나무에서 결실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의 희열을 읽었다. 우리 모두 결실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들뜨고, 가슴은 흥분으로 가득차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이번은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에서 내가 마주한 사과나무로는 세번째이다. 볼 때마다 그의 사과나무가 달랐듯이 이번 사과나무의 열매들도 내게는 다시 다른 느낌이다. 왜 그의 사과는 꽃의 추억을 거쳐 결실의 환희를 노래하다 이번에는 사과나무의 품으로 깊숙히 안긴 것일까.
문득 머리 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은 혹시 사과나무에 꽃이 피고 그것이 열매로 결실을 맺는 한해의 과정이 내가 나를 찾아가는 긴 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종종 나를 떠나고자 한다. 누구도 나를 떠날 수는 없으므로 우리에게 그것은 내가 사는 곳, 그러니까 나의 집을 떠나는 여행으로 나타나곤 한다. 하지만 나무는 한자리에 붙박힌 존재이지 않은가. 어떻게 자신을 떠나는 여행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번 이상열 초대전에서 나에게 나무의 여행은 꽃과 열매로 읽혔다. 자기 자리에 붙박힌 나무는 꽃으로 길을 열어 여행을 떠나고 열매가 다 익어갈 때쯤 그 열매로 다시 나무의 품에 귀환한다. 꽃은 사과나무에게 있어 자신을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며, 열매는 그 여행의 먼길에서 돌아온 귀환의 순간이다. 그의 이번 사과가 사과나무의 품에 깊이 박혀있는 것은 여행에서 돌아온 자가 발견한 내 집의 아늑함 같은 것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작 중에는 사과나무의 꽃을 그린 작품이 한 점 있었다. 흰색에 약간의 분홍빛이 서린 그 나무의 사과꽃은 나뭇가지에 박혀있지를 않고 정말이지 여행을 떠난 자의 설레는 마음처럼 가지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나는 꽃을 볼 때는 여행을 떠난 느낌이었으며, 나무의 품에 깊이 박힌 열매에선 긴 여행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아늑함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정리를 하자면 그의 이번 초대전에서 꽃들은 여행중이었고, 열매는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상열 선생님의 사과나무 앞에 섰을 때, 세상이 새롭게 열리곤 했었다. 어느 날의 사과나무에선 꽃의 추억이 보였고, 어느 날엔 결실을 눈앞에 둔 우리들의 환희가 보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집의 품에 안겼을 때 맞보는 아늑함이 보였다. 사과나무는 잎들을 모두 일으켜 여행에서 돌아온 열매를 반겨주고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조도를 낮추어 오랜 여행의 피로에 지친 사과 열매들이 그 품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고 있었다. 사과나무 앞에 섰을 때, 그래서인지 내 마음은 평화로웠다. 여행의 끝은 세상이 아니라 알고 보면 우리의 집인지도 모른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3월 11일 서울 역삼동의 TJH 갤러리에서
화가 이상열 선생님과 함께

**이상열 초대전은 다음과 같은 일정으로 열린다
-전시회: 이상열 초대전
-전시 기간: 2011년 3월 9일(수) – 3월 31일(목)
-전시 장소: TJH 갤러리(강남구 역삼동 테헤란 오피스빌딩 3층)

2 thoughts on “사과나무의 품으로 돌아온 사과 – 2011 이상열 초대전

  1. 너무나 주옥같은 글에 감사합니다^^
    아트프라이스 4월호에 자료로
    올렸습니다 책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1. 간만에 얼굴봐서 좋았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많이 부러웠어요.
      처음 만나서 그렇게 얘기 많이 나눈 분도 없는 거 같아요.
      4월 구상대전 때 그림 보러 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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