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구나 다 아는 조용필의 노래를 하나 알고 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이다. 그것은 부산의 노래이다. 사실 서울도 서울에 관한 노래를 하나 갖고 있다. <서울의 찬가>이다. 그 노래는 서울이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며 사람들이 밝게 웃고 다니는 곳이라고 노래한다. 물론 서울에 꽃도 있고 공원에서 가끔 새도 만나지만 그 노래가 서울과 얼마나 동떨어진 노래란 것은 서울에 사는 사람은 모두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서울에선 꽃이 핀다기 보다 다 핀 꽃을 화분에 담아 진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새들의 노래는 서울에서보다 서울을 벗어나야 들을 수 있다. 살기가 어려워 밝은 웃음도 그렇게 자주 만날 수가 없다.
조용필은 자신의 부산 노래 속에서 동백섬에 꽃이 피면서 봄이 왔지만 언젠가 부산항에서 연락선을 타고 떠나간 형제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 갈매기들마저 여전히 슬퍼하고 있다고 노래부르고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서쪽끝으로 바로 그 노랫말 속의 동백섬이 자리잡고 있다. 해운대에서 보면 노랫말 속의 오륙도도 보이고, 아마 부산 사람이라면 그 옆의 부산항이 주는 거리감도 무척이나 가깝게 피부에 와닿을 것이다. 해운대에 서 보니 조용필의 노래는 부산 사람에겐 정말 그들의 노래였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 노래가 부산에서 큰 인기몰이를 한 뒤에 서울로 올라온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 노랫말 속의 동백섬에서 동백꽃을 만났다. 그렇다고 조용필의 노래를 흥얼거리진 않았다.
섬이라고는 하는데 지금은 해수욕장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섬의 기억은 아무래도 오래 전의 기억인가 보다. 그렇다고 인공으로 섬과 육지를 연결해놓은 것은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퇴적 작용의 결과라고 한다.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동백섬으로 들어가자 동백꽃은 아직 마중을 나와주지 않았고, 대신 해변 풍경이 눈길을 끌어갔다.
산책로를 따라 조금 걷자 드디어 동백꽃이 나온다. 손을 모으고 있는 듯한, 흔히 보는 붉은 동백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것도 동백이 맞나 싶었지만 잎은 분명한 동백이다. 꽃의 색도 붉다기 보다 짙은 분홍에 가깝다. 사실은 이곳 동백섬에서 흰색의 동백도 보았다. 동백도 색이 붉은 색만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드디어 흔히 보던 동백이다. 밖으로 안나오고 거기서 뭐해.
너무 추워서 여기서 몸좀 녹이려고.
꽃을 펼치려 들다말고 잔뜩 움츠러든 동백이었다. 하긴 나도 추웠다.
그참 춥다니. 동백은 원래 추위에도 꿋꿋하게 가슴을 펴는 꽃이야. 우리가 가슴을 펴야 봄이 오는 거라구.
에이, 내가 보기엔 햇볕 잘드는 곳에 자리 잡아서 그런 것 같은데..
햇볕 잘드는 자리에 있다고 꽃이 피는 건 아냐. 우리는 햇볕이 잘드는 자리에서 봄을 외치고 있는 거야.
그래도 춥긴 추운 모양이네. 콧물흘린 거 보니.
바보야, 뭐, 콧물? 이거 콧물 아니라 꽃가루거든.
뭐야? 깜짝 놀랐잖아. 왜 얼굴을 성형하고 그래? 장미인 줄 알았잖아. 원래 얼굴도 예쁘기만 한데 비싼 돈주고 성형좀 하지마.
한창 피었을 때는 나무에 불붙을 것 같은 느낌이다.
넌 뭘 먹다가 이렇게 온통 가루를 흘렸니? 햇볕이 잘 버무려서 콩가루를 묻힌 인절미라도 네게 내밀었던 거니?
너는 꼭 이를 악물고 있는 것 같구나. 하긴 그 추운 겨울을 뚫고 봄의 앞으로 가장 먼저 서려면 어찌 이를 악물지 않을 수 있겠니. 동백꽃은 봄이 왔다는 환희의 노래가 아니라 이를 악물고 봄을 부르는 간절함인지도 모르지.
동백섬에선 한해 전의 동백이 불렀던 빛 바랜 노래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사람들에 따라 목이 부러지듯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의 낙화를 생각하며 동백은 질 때의 모습이 너무 처참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백에 따라 가지 끝을 온힘으로 부여잡고 한해 내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퇴락했지만 끝내 노래를 놓지 못하는 늙은 가수처럼. 부산의 동백섬엔 목청을 가다듬으며 지금 막 새롭게 붉은 노래를 시작하는 꽃들이 있는가 하면 한해 전의 빛바랜 노래를 여전히 고집하는 퇴락한 동백이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