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사업에 반대하여 두물머리에서 매일 열리고 있는 생명평화미사가 1년을 넘겼다. 3월 27일은 404번째 미사가 열린 날이었다. 나도 오랫만에 시간이 내준 여유 덕택에 미사의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요즘은 일요일엔 항상 성남 단대동 성당의 이상헌(플로렌시오)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신다. 이 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람들마다 신부님에 대한 기억이 다르겠지만 이상헌 신부님은 내가 이곳 두물머리 미사에서 만나본 다른 신부님에 비하면 상당히 온화한 편이다.
처음 두물머리를 찾았을 때 신부님들의 말씀을 듣는 내 심정은 후련함이었다. 달리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일년에 한두 번 집 근처의 교회에 가야했던 나는 설교에서 우러나는 교묘한 이명박 정권 편들기에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두물머리 미사에선 이명박 정권과 그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이 직접적이었고, 신부님들은 그 사업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짚어주곤 했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교회의 편파적 설교에서 받았던 울화를 시원하게 날려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그 비판이 성경의 말씀을 빌리고 있었음은 다시 입에 올릴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동안의 신부님들에 비하면 이상헌 신부님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거의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고자 하는 반성의 말씀을 자주 입에 올렸고 그런 측면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기보다 상당히 중립적인 분으로 보였다. 신부님이 하는 중립적인 말, 그러니까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가운데 세워놓은 말은 듣기에 따라선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말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헌 신부님의 중립은 묘한 느낌을 풍기곤 했다. 미리 언급을 해두자면 그 중립적 말은 내가 듣기에는 아무 방향도 가르쳐주지 않는 듯하지만 슬쩍 밀어보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방향을 안내하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느낌이 묘하다고 한 것은 아무리 밀어도 오른쪽으로는 기울어지지 않고 언제나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신부님들이 말을 왼쪽으로 기울여서 우리에게 건넸다면 이상헌 신부님은 말을 가운데 세워두고 우리들이 왼쪽으로 기울여서 듣도록 했다. 그 말은 오른쪽으로는 기울이기 힘든 말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상헌 신부님은 상당히 독특한 매력을 지닌 분이었다. 404번째 미사에서 이상헌 신부님이 전해준 강론의 얘기도 나의 이런 느낌에서 빗나가지 않았다.
얘기는 요한 복음의 한 구절을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예수가 우물로 물을 길러 나온 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라고 한 말이 그 얘기의 가운데 놓여있었다.
읽어준 얘기의 끝에서 이상헌 신부님은 “갈증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이 목의 갈증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에겐 목의 갈증만이 아니라 또다른 갈증이 있는 것 같다”고 운을 떼더니 그 예의 하나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민중가요 하나를 손에 꼽았다. 그때 목이 타는 듯한 격한 갈증을 불러온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이다. 그것은 왕이나 권력자가 주인되는 세상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되는 세상에 대한 갈증이다. 그 예를 들면서 이상헌 신부님은 갈증을 성스러운 갈증과 몸의 필요를 채워주는 갈증으로 나누었다. 이상헌 신부님은 우리에게 몸의 필요, 즉 목마를 때의 물이나 배고플 때의 밥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갈증을 덜어주는 선을 넘어 오직 그것만을 우리가 해갈해야할 갈증의 전부로 보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를 물었다. 그러니까 성스러운 갈증은 사라지고 몸의 필요를 메꿔줄 욕망만 남아있는 것이 우리의 오늘이 아닌가라는 자문이었다. 신부님의 말은 좌와 우의 어느 쪽으로도 기우는 법이 없이 한가운데 서서 좌와 우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중립적 말씀으로 보였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나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챙기는데 그치질 않고 그 말을 슬쩍 밀어보았다. 그 방법은 물음 끝에 실어 신부님의 말씀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내 머리 속에서 고개를 든 물음은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과연 누가 몸의 필요를 자극하고 있는가 였다. 몸의 필요란 알고 보면 돈에 대한 욕망이며 더 쉽게 말을 풀면 부자가 되어 잘살고 싶다는 욕망이다. 부자가 되면 몸의 필요는 상당 부분이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극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욕망이다. 그런데도 자극하지 않아도 되는 그 욕망을 계속하여 자극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살게 해주겠다,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말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어찌보면 이명박 정권은 사람들이 가진 몸의 필요를 자극하면서 그것을 발판으로 들어선 정권이다. 신부님 말씀을 그대로 따르면 반성해야할 순서에서 가장 첫번째 순서에 놓이는 것은 바로 그 몸의 필요를 자극하면서 사람들을 온통 경제 논리 하나로 현혹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이다. 물론 그 자극에 넘어가서 그에게 표를 주고 여전히 그 자극에서 헤어나올줄 모르는 사람들도 반성의 두번째 자리에 서야할 것이다. 그러나 정권의 반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정권은 스스로 반성하는 법이 없고, 그런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도 요원하다. 민주주의란 어찌보면 정권의 반성을 정권 교체로 강제하는 체제이다. 반성의 성은을 기대하며 읍소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성하지 않으면 물러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래도 반성이 없으면 수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 완력으로 쫓아내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신부님의 말씀 끝에 던져본 질문은 몸의 필요에 대해 반성한 사람들의 선택을 자연스럽게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대로 이끈다.
신부님의 말씀을 가운데 두고 강을 살펴보면 두물머리에서 갈 길 또한 명확해진다. 우리는 묻게 된다. 과연 어떤 강이 성스러운 갈증에 답할 강이고, 어떤 강이 몸의 필요를 자극하는 강인지. 강을 지금의 자연 상태 그대로 두면 그 강은 성스러운 갈증에 답할 것이다. 강을 개발하고 그 강에 유람선을 띄우면 그때의 강은 몸의 필요를 자극하는 강이다. 신부님은 그 필요는 지금으로도 너무 과하다고 한다. 그러니 성스러운 갈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강을 지켜야 한다. 몸의 필요, 그러니까 돈벌이의 기회로 강을 바라보는 사람과 성스런 갈증을 풀어줄 하늘의 선물로 강을 바라보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갈라서게 된다. 몸의 필요를 자극하여 강을 죽이는 일마저 서슴 없는 무리들이 바로 이명박 정권이고, 그에 맞서 성스런 갈증으로 이 강을 지키자고 나선 사람들이 알고보면 두물머리 미사를 집전하며 4대강 사업 반대의 맨앞에 서 있는 신부님들이고 그곳의 농민들이다.
아마도 예수가 풀어주겠다고 한 것도 목을 축이는 몸의 갈증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또다른 갈증, 지상에서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일컬어지는 것에 대한 갈증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영원한 생명이 무엇일까를 고민하지 않고 우물의 물이 축여줄 눈앞에서의 갈증 해소만을 추구한다. 예수가 말한 영원한 삶이란 물리적 차원에서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는 생명이 아니라 알고보면 민주주의처럼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어떤 가치를 갖는 세상이나 잘 보존된 자연의 세계가 아닐까 싶어진다. 내가 죽어도 영원히 인간의 존엄을 지켜줄 것들이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그런 것들이 없다면 살아도 살아있는 생명이 아닐 것이다. 결국 영원한 삶이란 영원히 살고 싶다는 몸의 욕망을 자극하는 말이 아니라 알고 보면 지금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대까지 모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세상일 것이다. 영원한 삶을 주겠다는 그의 말은 알고 보면 그의 뜻을 따라 걸어가면 그런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신부님은 오늘도 말씀을 좌우의 가운데 세웠지만 내가 그 말씀에 물음을 던지자 그 말씀은 오른쪽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며 내게 왼쪽 길을 걸어가라고 했다. 그곳에 성스러운 갈증을 식혀줄 샘이 있다고 했다.
말씀이 끝나고 미사가 집전되는 비닐 하우스를 나왔을 때 눈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은 오늘도 아무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오늘은 내 속을 깊게 돌아나갔다. 강은 오늘 그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내 속의 샘이었다.
4 thoughts on “갈증과 필요 – 이상헌 신부님의 강론”
오호…. 그런 부드러운 중심의 강론을 하시는 신부님도 그 강론의
중심의 흐름을 짚어내는 김동원님도…짱이십니다^^
좀 찔리네요…미사때 ..저도 강론 더 열심히 새겨 들어야겠어요^^;;
카톨릭의 미사는 짧아서 좋은 듯 싶어요.
시처럼 짧게 끝난다는 느낌이거든요.
게다가 두물머리 미사는 민주화 운동이나 빈민 운동에 몸담고 있던 신부님들이 대부분이어서 그런지 들을 때 갈등이 없다는 게 가장 좋은 점인 듯.
인간다운 삶,, 역시 어떤 주장들도 뛰어 넘는 ‘삶의 조화’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칼로 선자 칼로 망하고 주장으로 선자 주장으로 망할 것입니다.
주장 뒤에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강을 파헤치는 완력을 행사하는 것이 큰 문제인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