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어떻게 그의 화폭으로 가게 되었는가 – 2011 한국구상대전 이상열 전시회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5월 11일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오른쪽이 이상열 선생님

화폭에는 사과나무가 줄이어 서 있었다. 사과나무의 발목 밑으로는 보라색 제비꽃이 뿌려져 있다. 사과나무엔 붉은 사과가 그 품에 깃들어 있다. 사과는 나무의 품속으로 깊이 박혀 있다. 화가 이상열은 내게 그 그림이 「사과나무 숲」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사과나무는 푸른 잎으로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화폭에는 그 사과나무 숲이 담겨 있었다.
화폭은 경계이다. 그 경계 안에 사과나무 숲이 담겨 있으면 우리는 사과나무 숲을 볼 수밖에 없다. 그 경계를 넘어가 다른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림의 바로 옆에 화가가 서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는 슬쩍 물어본다. “이 사과나무 숲은 어디예요?” 물론 나는 그로부터 답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답을 그냥 전하는 방식으로 얘기를 풀어가기 보다 이제부터 얘기의 구성을 달리해 보려 한다. 만약 그의 답을 그냥 전했다면 그의 그림 「사과나무 숲」은 어딘가에서 본 사과나무 숲을 그린 그림이 된다. 그러나 그의 답을 듣는 순간, 나는 그림이란 것이 무엇을 보고 그리는 작업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림이란 사과나무와 화가의 만남이었으며, 그린다는 것은 알고 보면 그 만남 이후로 둘이 화폭에서 사과나무 숲을 가꾸어낸 만남의 연장이었다. 나는 그 둘의 만남과 그 이후를 전하고 싶어졌다.
사과나무가 화가 이상열을 만난 것은 충주의 한 길가에서 였다. 예전에 어떤 가수가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고,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고 노래 부른 적이 있었지만 정작 서울에선 그 어떤 나무도 심지 않았다. 거리에 사과나무를 심은 곳은 충주였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이상열이 그 곳의 길을 지나가게 되었고, 가로수로 늘어서 있던 사과나무는 그가 화가란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사과나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눈속으로 뛰어들었다. 화가 이상열이 급정거를 하듯 멈추었음은 물론이다. 눈속으로 사과나무가 뛰어드는 그 급작스런 사태에 그가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긴 했지만 그러나 그는 팔을 벌리고 자신을 멈춰세우며 눈속으로 뛰어든 나무들을 다시 시선 밖으로 쫓아내지 않았다. 그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과나무가 그의 눈속으로 뛰어든 이유를.
우리는 대개 모두가 꿈꾼다. 사과나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거리에 사과나무를 심고 꿈을 꾸지만 사과나무의 꿈은 원래는 길거리의 가로수가 아니라 사과나무 숲이었다. 사과나무는 모여 숲을 이루고 싶었다. 그렇다고 사과나무가 숲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 사과나무끼리만 모여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은 아니었다. 모여 살면 사과나무가 이루는 풍요는 더 커진다. 사과나무는 커진 풍요를 사람들과 넉넉히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삶은 꿈처럼 되지는 않는 법.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 듯, 길거리를 지나는 차들의 소음이 발밑에 깔리는 것이 가로수로 선 사과나무의 오늘이다. 그래도 사과나무는 꿋꿋하게 현실을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충주의 어느 길가에서 만난 뒤로 사과나무와 화가 이상열의 만남은 계속된다. 그 둘이 만나는 곳은 화가 이상열이 마련해놓은 화폭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던가. 우리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만나서 서로 얘기를 나누고, 그 얘기 속에서 종종 우리들의 꿈을 내비친다. 만남은 알고 보면 꿈을 나누는 장소이고 시간이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 서로 얘기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화가는 그 만남을 형상으로 구체화할 뿐이다. 그리하여 이상열과 사과나무가 만난 장소와 시간 속에선 사과나무가 그 꿈을 얘기하고, 그러면 이상열은 그 꿈을 붓에 실어 그의 발밑에 형상과 색으로 깔아준다. 그건 그 꿈의 얘기를 들어주는 일이다. 사과나무는 여전히 충주의 길거리에 서 있지만 이상열이 마련한 화폭 속에서 그 발밑에 제비꽃이 깔린 것은 그 때문이다. 아마 사과나무가 화가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풀밭에 앉아 있지만 이름으로는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 제비꽃의 얘기를. 그리고 어느 날, 내가 그 둘의 만남 앞에 선다. 둘의 만남이 가꾸어낸 사과나무 숲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저 보고 감상하는 그림의 세상이 아니라 화가와 사과나무, 그리고 내가 모두 한자리에서 만나는 만남의 자리였다. 셋, 그러니까 화가와 사과나무와 나는 그림이란 그 만남의 자리에서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그림이 혹시 「사과나무 숲」 한 점밖에 없지 않나 오해를 살 듯하다. 그 얘기를 너무 길게 놓았다는 느낌 때문이다. 사실은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있었다. 퇴계원에서 왔다는 배나무가 배꽃을 안은채 서 있었고, 파란 집의 기억을 안고 있는 감나무도 있었다. 이건 내 마음이라며 복사꽃을 건네고 있는 복숭아 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화가 이상열에게 그들이 서 있던 원래의 자리를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과의 만남을 쓸데없이 신상을 캐는데 허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퇴계원 배꽃」은 내게 말했다. 봄이 와서 배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배나무가 배꽃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계절을 봄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화폭 속에서 만난 배꽃은 봄이 와서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배꽃 이야기로 봄을 채워놓고 있었다. 「파란 집 감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을이 와서 익은 감을 본 것이 아니라 감나무가 채워놓은 가을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의 세상에선 봄이 와서 꽃이 피고, 가을이 와서 감이 익지만 그의 그림 세상은 만남의 공간이어서 꽃을 피워 채워놓은 봄 이야기가 있었고, 감나무 가지 사이로 하나둘 감을 채우며 불러온 가을 이야기가 있었다. 그림 앞에 선 것은 오후의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 얘기에 귀 기울이다 언듯 시간을 확인했더니 날이 벌써 저녁으로 저물어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2011년 5월 11일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오른쪽이 이상열 선생님

**전시회 일정은 다음과 같다
-전시회: 2011 한국구상대전
-전시 기간: 2011년 5월 9일(월) – 15일(일)
-전시 장소: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B6
-입장료: 5,000원

2 thoughts on “나무는 어떻게 그의 화폭으로 가게 되었는가 – 2011 한국구상대전 이상열 전시회

  1. 전시장에서 오랫만에 두분을 뵈니 반가웠습니다
    시간이 예전으로 되돌아간 느낌도 많았습니다
    항시 제그림을 봐주시고 좋은글 많이 써주셔서
    제그림의 신선한 영감이 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좋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겟습니다
    시원한 6월에 뵈요^^

    1. 그날 옥이는 너무 웃어서 나중에 배꼽찾아 전시장 다시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어요.
      간만에 오랫동안 얘기하고 그림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림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 좋은 시간이기도 했구요.
      항상 건강하시구요.. 다시 전시장에서 뵐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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