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가 강원도에 있다.
영월에서 북쪽으로 40여리 가량을 더 들어가는 문곡리란 곳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때 돌아가신 것 같고,
할머니는 중풍으로 10년 동안 병석에 누워계시다
내가 중학교 때 돌아가신 것으로 기억되나 정확하진 않다.
병수발을 드느라고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다.
9월 9일에 고향으로 나섰다.
벌초가는 길이었다.
한동안 고향가는 걸음이 뜸했었다.
오랫만의 고향 나들이라 기분이 아주 좋았다.
올해 추석에는 고향에 내려가기로 하고
9월 9일을 그 날짜로 잡아놓기는 했지만
아침 일찍 떠나지는 못했다.
아직 일이 마무리가 되질 않아 9월 9일의 아침 시간을
급하게 일을 마무리하는데 보내야 했다.
내려간 김에 여행을 겸하여 고향 마을을 돌아볼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그녀가 옷가지랑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챙겼고,
일이 마감된 11시를 한 시간 가량 더 넘긴 뒤에
12시쯤 드디어 집을 나섰다.
길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중부고속도로는 전혀 막힘이 없었다.
12시 30분쯤 고향에 잘 다녀오라는 펼침막의 인사를 받으며
중부고속도로의 톨게이트를 들어섰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앞차가 강원도 차이다.
서울을 나서자 마자 벌써부터 고향 찾는 걸음을 반겨주는 느낌이다.
고향이란 그렇다.
내게는 강원도란 말만 들어도 반갑고
영월이라고 하면 벌써 손에 그곳에 잡히는 느낌이며
문곡리란 말이 나오면 나는 벌써 그 마을로 들어선다.
중부에서 영동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앙고속도로로 길을 바꿔탔다.
중앙고속도로는 치악산을 지나친다.
비 때문에 치악산은 온통 안개로 빚어낸 그림이 되어 있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린다.
고향이고 뭐고 그냥 신림에서 나가서 치악산이나 오를까 싶다.
이런 날 산의 정상에 가기는 어렵겠지만
오르면 보통 때 보기 어려운 풍경이 맞아줄 것이다.
흔들리던 마음을 치악휴게소에서 잠시 쉬며 다독였다.
서울 출발한 뒤로 시간은 1시간 40분가량을 넘기고 있었다.
휴게소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치악휴게소를 지나면 곧바로 신림이고
그 다음이 우리가 나가야할 제천이다.
신림을 지나 제천으로 나갔다.
톨게이트 나갈 때 물이랑 찐고구마를 챙겨준다.
명절이라고 고향찾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인가 보다.
그녀가 이런 거 처음 받아본다고 아주 좋아했다.
영월까지 가는 길이 예전에 다니던 길과는 완전히 다르다.
예전에는 항상 고향가는 길목을 거쳐 영월로 가지만 지금은 그렇질 않다.
때문에 고향으로 가려면 영월로 가다가 연당에서 예전 길로 나가야 한다.
연당에서 고향쪽으로 가다가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운 것은 눈앞에 펼쳐진 서강이
길을 휘돌아가며 만들어낸 동네 풍경 때문이었다.
길 옆에선 수수밭이 붉은 색 머리를 세우고
풍경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길 강조점을 마련한다.
지금은 작은 다리가 마련되어 아무 때나 차로 들어갈 수 있지만
예전에 내가 자랄 때는 배로 들어가는 강건너 마을이었다.
말하자면 우리에겐 강건너 섬이었다.
어릴 적 배타고 들어갔던 마을을 차를 갖고 들어가 보았다.
강가에 구명조끼와 구명대가 마련되어 있다.
시골까지 안전에 신경쓰게 되었다고 다들 뿌듯해 하겠지만
내게는 물놀이 위험지역이라는 말이 낯설다.
어릴 적 우리들이 그렇게 즐겁게 놀았던 강이
이제는 위험지역이라니 하는 느낌이다.
우리는 위험하기 짝이없는 곳에서 무사히 자랐다.
여전히 우리에게 고향은 어디나 위험지역이라곤 거의 없다.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나 보다.
처음 찾는 사람들에겐 이곳저곳이 다 위험한 곳이 내 고향이기도 하다.
벼랑이 아찔한 산과 강을 끼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서울 출발한 지 네 시간만에 고향에 도착했다.
치악산의 풍경에 시간을 내주고
문개실 풍경에 또 시간을 내주면서
여유롭게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빗줄기가 굵어 서두르질 않았다.
드디어 고향에 도착해 개울가 주차장에 차 세우고 내렸더니
나팔꽃들이 집단으로 반겨주었다.
저 산의 중턱쯤에 산소가 있다.
길이 없어 매년 올라갈 때마다
수풀이 무성하지 않은 곳을 골라 길을 내며 올라가야 한다.
아래쪽의 너른 밭도 매년 심는 작물이 다르다.
올해는 온통 콩이 차지하고 있었다.
위쪽으로도 밭이 있는데 손이 모자라는지 버려져 있었다.
모두 산자락 밑으로 묘소를 마련했는데
오래 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 자리까지도 길이 있어
그다지 높지 않다고 생각하고 묘자리를 그곳에 썼나 보다.
지금은 갈 때마다 올라가는 것이 쉽지가 않다.
산소까지 가던 원래의 길은 산의 품으로 깊이 묻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올라갔더니 잡풀들이 무성하고 묘소도 많이 내려앉았다.
왼쪽으로 보이는 잣나무는 묘소를 마련한 뒤 심은 것인데
내 무릎 밑으로 겨우 고개를 들고 있던 작은 나무들이 이렇게 무성해졌다.
밤나무도 있었는데 자꾸만 산소 위로 밤톨이 떨어져
어느 해에 내가 베어 버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 내려왔다고 마련한 선물인가 보다.
나와 그녀에게 하나, 우리 딸의 몫으로 작은 것을 하나 챙기셨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는 푸른 사랑이다.
푸른 사랑을 선물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녀도 한몫했다.
내가 벌초하는 동안 앞쪽의 시야를 막고 있는 잡목들을 잘랐다.
톱질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나중에 손목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흥부가 톱질하듯 슬금슬금 톱질했으니
톱질 한번에 하나씩 복이 쏟아졌을 것이라고 했다.
풀들을 다 베고 나니 말끔해졌다.
원래 아래쪽도 좀 정리를 하는데
가져간 낫이 이빨이 다 빠지는 바람에 잘 듣지를 않아
그냥 산소만 벌초를 하고 아래쪽은 대충 마무리했다.
내년에는 낫을 새로 장만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선낫이 아니라 양낫을 샀더니 한해쓰고 끝이다.
양낫은 가벼워서 좋은데 수명이 너무 짧다.
내 고향 문곡리 풍경이다.
한때는 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나 지금은 쇠락한 평범한 시골 마을이 되었다.
곳곳에 내 어릴 적 추억이 서려 있어
내게는 돌아다니는 곳마다 옛날 얘기를 들려주며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가는 곳이다.
내려와서 올려다보니 나무들 사이로 언듯 산소가 보인다.
아직도 고향 동네에서 살고 있는 친구는 하나밖에 없다.
모두가 대부분 영월 읍내로 나와서 살고 있다.
고향 동네의 친구네 집은 문이 잠겨 있었다.
전화도 되질 않았다.
고향 친구 기탁이이다.
영월 읍내로 나온 뒤에 연락해서 만났다.
저녁 먹었냐고 물었더니 퇴근해서 방금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며칠 영월 돌아보고 갈 생각이라고 했더니
영월에 새로 생긴 콘도에 방잡아주었다.
그녀가 곤드레밥을 먹고 싶다고 하자
영월에서 곤드레밥 제일 잘하는 청산회관에서 저녁을 사주었다.
간만에 먹어보는 영월의 곤드레밥이다.
서울서 곤드레밥을 먹으면 곤드레 나물을 찾아가면서 먹어야 하는데
영월서 먹으면 곤드레반 밥반이라 굳이 곤드레 찾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는 곤드레향이 좀 진해서 좋았는데 예전만큼 향이 진하진 않았다.
술 한잔 하지 않을 수 없어
옆탁자를 힐끔거리며 영월 사람들이 마시고 있는 것을 곁눈질하다
그것이 곤드레 막걸리란 것을 알게 되었다.
마셔보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막걸리 마셔보는 것도 큰 재미이다.
고향 친구를 만나서 1차로 접으면 아쉬움에 그날 밤 잠자기가 어렵다.
맥주집에 가서 2차했다.
영월 제일의 미인으로 기탁이에게서만 공인받고
우리도 기꺼이 동의해준 기탁이 집사람도 불러내 같이 마셨다.
시간이 훌쩍 밤 11시를 넘어가 버렸다.
고향에서의 첫밤이 친구에게 취하고 술에 취해 저물고 있었다.
숙소로 들어가는 밤길도 아늑했다.
2 thoughts on “벌초와 고향 친구 – 영월, 정선 기행 1”
달래 곤드레 만드레가 아니군요.
저 정도면 밥에서 곤드레 냄세도 제법 났을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막걸리도 곤드레랍니까.^^
초가을 여행을 알차게 하신 것 같아 여행기가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새 집 얻으셨다고 옛 집은 좀 길게 비우셨어요.ㅋㅋ
일 끝나자마자 떠나는 바람에 그리되었어요.
내내 비가 와서 특별한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비오는 날의 강원도 풍경이 아주 괜찮더군요.
산행이나 트래킹은 좀 위험해서 안전한 곳으로만 다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