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가 구름을 부를 수 있을까. 감나무가 하늘을 부를 수 있을까. 또 감나무가 불러 내가 사는 집이 감나무 아래쪽으로 슬쩍 자리를 옮겨갈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가능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서울국제아트페어를 찾았다. 전시회의 마지막날이었다. 1층의 그림들을 대충 훑어보며 걸음을 옮겼고 1층 전시실의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유리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나는 한가람 미술관에선 특히 이 유리 계단을 좋아했다. 계단을 오르면 중간쯤에서 아래쪽으로 내려다보는 그림들과 그 그림들 앞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림과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함께 눈에 들어오는 그 풍경이 좋았다. 언제나처럼 그 유리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으로 올라서자 통로쪽으로 눈에 익은 그림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 <감나무>였다. 사실 처음본 그림이었지만 그것이 이상열 선생님의 그림이란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화가의 그림은 모두가 독특한 얼굴을 갖고 있다. 전문적 용어를 동원하자면 그것을 일러 마티에르라고 하지만 나는 그냥 그것을 화가의 그림이 갖는 그만의 독특한 얼굴로 이해하고 있다. 그 그림 속에선 감나무가 구름을 부르고 있었고, 또 하늘을 부르고 있었다. 감나무가 부르자 하늘이 달려와서 구름의 뒤로 섰고, 또 달려온 구름은 가지에 몸을 걸쳤다. 감나무 밑에선 붉은 지붕을 한 마을의 집 한채가 보였다. 그 집도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집은 아니었다. 감나무가 부르자 원래 자리를 버리고 그리로 옮겨온 집이었다. 내가 그곳에 간 것도 알고 보면 감나무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감나무는 하늘을 부르고, 구름을 부르고, 동네의 집까지 불렀으며, 그리고 나도 그 자리로 불렀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감나무는 왜 하늘을 부르고, 구름을 부른 것일까. 나는 또 왜 그 자리로 부른 것일까. 그것은 우리 일상 속의 감나무에선 감이 과일이지만 그림 속의 감나무에선 감이 삶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침밥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듯, 감나무도 햇볕과 물로 하루를 시작하고 바람을 견디며 감을 익혀간다. 아마도 감나무에서 감이 영글어가듯이 우리들의 삶도 때로는 비바람을 견디며, 때로는 분부신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영글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하루하루가 영글어가면서 우리의 삶이 되고 그 삶이 우리들의 이야기이듯이,감나무의 감도 사실은 삶이다. 그리고 그 감나무의 감이 삶이 되는 순간, 감은 열매가 아니라 이야기가 되고, 감나무는 그 이야기를 나누려 구름을 부르고 하늘을 부른다. 하늘은 푸른 빛으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구름은 흰빛으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 내가 하늘과 구름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늘빛과 구름의 빛깔 때문이다. 그 빛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빛이라기보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의 빛이었다. 그렇게 그림 속에선 감나무의 감이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한해를 견디며 영근 삶이 되고 구름과 하늘이, 동네의 붉은 지붕을 한 집이 그 얘기를 듣기 위해 감나무 주변으로 모인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가지끝에 붉은 빛으로 달려있는 과일을 보기 위해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붉은 빛으로 영근 삶의 얘기를 듣기 위해 그 자리로 걸음한다. 그림은 바로 과일을 보여주는 세상이 아니라 알고보면 감의 모습으로 온 우리들의 삶을 보여주는 세상이다. 나는 그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림을 보고 난 뒤 이상열 선생님과 술 한잔했다. 이번에는 유난히 많은 얘기를 나눈 것 같다. 특히 도판과 원화 사이의 차이에 대한 얘기가 기억난다. 선생님도 한국에 온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았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하면서 왜 도판을 볼 때는 느낌이 오질 않는데 원화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등산지도와 실제 등산으로 정리를 했다. 도판은 일종의 등산 지도이다. 등산 지도는 산을 안내하지만 그렇다고 등산 지도를 들여다 본다고 그것이 등산의 경험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등산의 경험을 온몸으로 느끼려면 직접 산에 가서 산을 올라야 한다. 말하자면 원화는 실질적인 등산이다. 우리는 등산이 보통 두세 시간 걸리기 때문에 그림도 제대로 감상하려면 등산처럼 한 그림 앞에 두세 시간은 서 있어야 한다며 낄낄거렸다.
그림을 그릴 때면 어느 그림이나 처음 가는 길이어서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렵다는 얘기도 나왔다. 글을 쓰는 나에겐 계획대로 씌여지는 글은 글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 점은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계획대로 그려지는 그림은 그림이 아닌 셈이다. 그 때문에 그림은 비슷한 듯해도 사실은 매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그림의 매력이기도 하다.
얘기 속에 밤은 깊어갔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흥겹고 즐거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그 흥분을 혼자 기울인 또 한잔의 술로 무마를 한 뒤에야 잠에 빠져들었다.
**전시회는 다음의 일정으로 열렸으며, 나는 마지막날 갔다
-전시회: 마니프 17!2011 서울 국제아트페어
-전시 기간: 2011년 10월 6일(목) – 18일(화)
-전시 장소: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입장료: 6,000원
4 thoughts on “구름을 부르는 감나무 – 이상열 그림 <감나무>”
바쁘신 중에도 항시 찿아주시고 감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그림에 대해서 좋은 글 남겨주셔서
더 더욱 기분이 좋습니다
11월에 뵙시다^^
11월쯤 날짜봐서 연락드릴께요.
길동쯤으로 모시겠습니다.
중간중간 행갈이를 해 주소서! 눈이 몹시 아른거려 몰입이 잘 안 되네요.^^
이건 그림 얘기라 그냥 그림을 보시는게 더 중요해요.
위의 그림 가운데서 가운데 걸려있는 그림인데.. 아주 좋았어요.
오늘도 인사동가서 그림 구경하다가 왔는데 역시 아트페어가 수준은 훨 높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