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냄새로 오던 날 – 차주일의 시 「냄새의 소유권」

Photo by Kim Dong Won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 반지하방의 냄새처럼 내게 깊숙이 밴 여자이다. 그러나 사실을 고백하자면 그녀는 한번도 내게 냄새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냥 오랫 동안 나와 함께 산 여자였다. 가난한 시절을 함께 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다지 여유롭게 살고 있지는 못하다. 그녀와 너무 오래 산 나는 마치 반지하방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심정처럼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마음만 그렇게 흔들릴 뿐 여전히 나는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녀가 내게 깊숙이 밴 반지하방의 냄새처럼 다가섰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계기가 된 것은 차주일의 시 한 편이었다. 사람들은 시어라고 하면 표현이 뛰어난 언어 정도로 이해를 하지만 시어는 때로 그 이상이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언어와 똑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형태상으로는 똑같아 보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시의 언어는 언어를 통하여 세상의 구조를 재편하곤 한다. 다시 말하여 시의 언어는 똑같은 세상을 달리 구성하여 새롭게 탄생된 세상을 우리에게 내민다.
하지만 나는 시로 새롭게 편재된 세상을 보여주기 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먼저 보여주려 한다. 그리하여 나는 시인이 말하는 세상을 우리의 일상적 언어로 환치했다. 그러자 그것은 사는 집이 보증금 천에 월세 사십의 반지하라고 하는 어느 집의 얘기였다. 밤 11시가 넘어 그 집의 반지하 철문을 열면 가장 먼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반기는 것은 퀘퀘한 냄새이다. 11년째 살고 있지만 그 냄새는 없어지질 않고 있다. 시인은 집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려고 미장이며 방수 전문가를 불러 수리를 해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 집의 식구들은 너나 없이 이 퀘퀘한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었다. 반지하방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장면은 쉽게 상상이 될 것이며, 그 경험이 자신의 것이기도 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실질적 공감이 가능할 것이다. 그 현실을 말하고 있는 차주일의 시 「냄새의 소유권」은 이렇게 시작된다.

밤 11시 넘어 반지하 철문을 연다. 보증금 천에 월세 사십의 집주인은 냄새다. 11년째 바뀐 적 없는 이 집의 주인이 되어보려고, 미장이며 방수 전문가까지 불러봤으나, 냄새는 도무지 소유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오히려 냄새는 두 딸과 아들과 아내와 나를 여지없이 불러들였다.

시에 대한 논의를 잠시 유보하고 계속 현실적 정보를 시와 중첩시켜 보기로 한다. 이 반지하방에는 다섯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 그 가족은 “두 딸과 아들과 아내와 나”로 구성되어 있다. 반지하방은 거의 골방에 가깝다. 골방은 한쪽으로 쳐박혀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게다가 골방은 빛이 잘 들 것 같지 않은 느낌도 강하다. 그 둘을 묶으면 반지하방은 한쪽으로 쳐박혀 있는 어둠침침한 골방이다. 그곳에 살고 있는 가족들은 서로 거의 말을 주고 받지 않는다.

다섯은 골방에 틀어박혀 서로에게 자유를 배려했다. 이곳에서는 늘 같은 일만 반복되므로, 대화 따위로 서로 시간을 빼앗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현실은 시에 드러난 표면적인 주거 상황이다. 그런데 그 반지하방의 가족들 사이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가족 중 둘째 딸이 어떤 요구를 한 것이다. 아마도 딸은 가정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에게 요구했을 것이다. 둘째 딸이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 온 날이었다. 시인은 딸이 놀러갔다온 친구의 집을 “레인보우하이팰리스”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 이름이 연상시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름은 타워팰리스이며, 일반화를 하자면 한국에서 최고간다는 주상복합의 주거 시설이다. 둘째 딸이 요구한 것은 수건을 각자 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얘기는 곧 지금까지 반지하방의 가족은 수건 한 장을 같이 써왔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수건이 하나밖에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냥 수건을 니꺼내꺼 없이 써왔다는 얘기이다. 정리를 하자면 다섯 명의 가족이 반지하방에서 같이 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은 수건도 함께 써왔다.

둘째가 개인 수건 일곱 장을 달라며 투덜거렸다. 레인보우하이팰리스에 사는 친구를 따라가 층운이 다른 구름 냄새를 묻혀온 날이었다.

사건은 또 벌어진다. 이번에는 첫째 딸이 가출을 한 것이다. 반지하방의 꼬질꼬질한 삶이 지겹다며 가출을 했다. 남아있는 가족들은 가출한 첫째 딸을 걱정하며 며칠을 보낸다.

첫째가 그 구름을 찾아나섰다. 남아 있는 넷이 며칠간 불안해한 것은 평소와 다른 냄새 때문이었다.

다행히 첫째는 가출에서 돌아온다. 하긴 가출했다고 어디로 갈 수 있었겠는가. 집으로 돌아온 첫째는 수건에 얼굴을 묻고 펑펑 눈물을 흘린다.

가출에서 돌아온 첫째가 수건에 얼굴을 묻고 질기게도 울었다. 수건 한 장을 같이 사용하던 넷은 믿었다. 첫째가 돌아온 이유가 수건 냄새 때문이라고.

반지하방의 현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개인 수건을 달라는 둘째의 요구와 첫째 딸의 가출이 있었지만 반지하방의 현실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반지하방에서 나는 냄새도 여전했고 가족들도 모두 그 집에서 계속 살게 되었다.

다시 다섯의 얼굴 냄새를 발효하는 수건 한 장이 깃발처럼 걸렸다. 집안은 예전처럼 지워지지 않는 냄새로 평화로워졌다. 다섯이란 말이 우리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상 차주일의 「냄새의 소유권」 전문

아마도 처음에는 표현이 달라졌다는 점 이외에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가령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보증금 천에 월세 사십의 반지하방은 집주인이 냄새가 아닐까 싶을 정도 냄새가 많이 난다는 일반적인 얘기가 “보증금 천에 월세 사십의 집주인은 냄새다”라는 좀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뀐 것 이외에 다른 변화를 짐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그 때문에 이 시도 겉보기엔 그냥 “보증금 천에 월세 사십”의 곤궁한 삶을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집의 가난한 삶은 그 집이 골방에 다섯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는 말에서 더욱 강화된다. 골방이란 말에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느낌은 그 방에 빛이 잘 들지 않으며, 방의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작은 방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그곳의 가난을 더욱 강화한다. 그곳에 사는 가족들은 별로 얘기도 없다.
섬이 갇혔다라는 인식을 부르는 것은 육지를 생각했을 때이다. 가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공간이나 섬과 같아서 그곳에 고립되어 있는 동안에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곳에 갇혀 있다는 인식을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공간을 나가 다른 공간을 접하는 순간,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리의 공간에 갇혀 있었다는 차별 의식에 이른다. 순간 섬은 육지로부터 버림받은 곳이 되고 만다.
반지하방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날 가족 중 둘째가 거대한 부의 공간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그 거대한 부의 공간은 시인의 시에서 레인보우하이팰리스라는 말이 상징한다. 그곳은 무지개처럼 높이 걸려있는 궁전이다. 레인보우하이팰리스라는 말은 상징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말은 곧장 우리로 하여금 타워팰리스라는 실질적 이름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마도 둘째는 그런 집에 사는 친구를 방문했는가 보다. 바로 그 순간 둘째에게 체감되는 가난은 더욱 강화된다. 부가 강하게 체감시킨 그 가난에 대한 둘째의 반응은 개인 수건을 달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그런 측면에서 현실타협주의자이다. 꿈은 타워팰리스에 두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그 불가능을 혼자 쓸 수 있는 개인 수건으로 타협을 보고자 한다. 일곱 장의 개인 수건은 그 세상에 대한 무지개꿈을 새길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의 파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첫째 딸이 가출을 한 것이다. 아마도 그런 부의 세상을 꿈꾸었거나 아니면 문득 그 일로 인하여 환기하게 된 반지하방에 방기된 듯한 가난의 운명이 지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첫째는 가출에서 돌아왔다. 돌아와선 펑펑 울었다. 아마도 첫째는 자신의 가난이 얼마나 깊은 수렁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시는 반지하방의 가난을 더욱 강화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시가 세상을 새롭게 편재하거나 나아가 세상의 기존 구도를 정반대로 전복시킨다는 얘기는 공허해지고 만다. 이 시의 어디에 현실에 대한 재편된 시각이 숨어 있고, 또 이 시의 어디에서 세상이 전복되고 있는 것일까. 사실 그 지점을 찾아냈을 때 비로소 시 속에서 세상이 전복된다. 그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면 시는 그냥 뛰어난 언어 표현에서 머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시를 대상에 대한 좋은 표현 이상으로 읽어내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시인은 표현하기 전에 세상을 바라보았을 것이며, 시인이 세상을 바라볼 때 어떤 시각의 변화가 동반된다. 그 시각의 변화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드는 동력이다. 우리가 보는 일상적 풍경과 똑같았다면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 똑같은 세상이 달리보였고, 그리하여 시인은 그 다르게 보이는 세상을 사람들에게도 전하려고 시를 썼을 것이다.
문제는 시가 시인의 변화된 시각에 포착된 세상을 보여주지만 그 세상은 시인의 바뀐 시각을 함축할 뿐, 그 바뀐 시각 자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를 통해 시인이 바라본 세상을 바라봄과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을 함께 들여다 보아야 하는 입장이 된다. 바로 그 때문에 쉽게 쓰여져 있는 듯한 시가 도리어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제 다시 시로 돌아가보자. 차주일의 시 「냄새의 소유권」이 어떤 곤궁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곤궁한 삶을 앞에 두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냥 사는 게 어렵겠구나하는 동정심을 그 삶에 보태주거나 빨리 그 삶을 벗어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원해주는 수밖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시를 읽고 난 뒤끝이 많이 허무해진다. 좋은 시는 어딘가에 그 허무를 넘어갈 수 있는 통로를 예비해둔다. 찬찬히 그 통로를 한번 찾아보자.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반지하방은 단순히 주거 시설의 하나가 아니라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때문에 내가 시를 들려주기 전에 말해준 현실적인 반지하방 얘기에선 은연중에 세상이 빈자와 부자로 나뉜다. 그렇게 가난과 부로 나뉘어진 세상에서 빈자의 세상은 그저 못살고 불편한 세상에 불과해진다. 그것은 탈출하여 어서 빨리 부자의 세상으로 가야하는 세상이다. 그 세상에선 부자의 세상은 동경의 대상이 되고 빈자의 세상은 버려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또 암암리에 알고 있다. 이 세상에 버려져야할 삶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굳이 버려야할 삶이 있다면 불편하고 가난한 삶이라기 보다 욕망으로 움켜쥐려는 부유하고 화려한 삶이다. 욕망은 가난과 묶이는 법이 없다. 가난한 삶을 욕망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욕망의 꼬리표는 어느 경우에도 가난한 삶에 붙는 법이 없다. 욕망의 꼬리표는 언제나 부유하고 풍요로운 삶의 뒤에 붙는다.
욕망은 무엇인가를 손에 쥐어주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그것을 내주면서 우리를 그 속에 가둔다. 그 속에 갇히면 우리는 얻으면서 잃는다. 그리고 잃는 것이 더욱 소중한 것일 때가 많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어떤 삶이 가난하고 불편하다고 하여 그런 삶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알고 있다.
시가 소중한 것은 세상의 편재를 달리하여 우리들이 꿈꾸고 있는 세상이 우리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댓가로 치루면서 얻어질 수 있는 세상임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가령 예로 든 차주일의 시 「냄새의 소유권」에서 세상은 냄새가 수건에 밸 수 있는 세상과 냄새마저 수건에 스밀 수 없는 세상으로 나뉜다.
냄새나는 반지하방이라는 현실적 상황은 세상을 반지하방에 사는 못사는 사람과 “레인보우하이팰리스에 사는” 잘사는 사람으로 나누고 우리들을 잘사는 세상에 대한 욕망으로 내몬다. 그러나 시가 편재한 세상을 눈앞에 두면 같은 상황이 좀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여전히 상황은 같지만 시 속에선 세상이 빈자와 부자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냄새가 수건에 밸 수 있는 세상과 냄새마저 수건에 스밀 수 없는 세상으로 나뉜다. 사람들의 욕망은 모두 부의 세상으로 몰려가고 있지만 시인이 이렇게 세상의 편재를 다시하고 나면 그 세상은 알고 보면 냄새마저 스밀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다섯의 얼굴 냄새를 발효하는 수건 한 장”을 가지고 있는 반지하방의 세상이 가난한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스밀 수 있는 세상이 되며, 사람들의 욕망이 몰려가고 있는 잘사는 세상이 알고 보면 같은 공간에 살아도 서로가 남남처럼 되버려 서로 스밀 수 없는 세상으로 바뀐다. 반지하방의 공간에선 사람들이 수건 한 장을 매개로 서로에게 냄새가 되어 스며든다. 그리고 그 시를 읽고 나자 한번도 냄새로 다가온 적이 없던 한 여자가 내 삶의 깊숙한 곳에 냄새로 배어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시적 공간은 단지 언어적 표현을 달리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은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의 세상에서 보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을 달리 조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차주일의 시도 그 점에선 예외가 아니다. 그가 그린 반지하방의 세상은 가난의 공간이 아니라 알고 보면 부자와 빈자로 나뉘어지던 세상을 냄새의 소유권을 잃어버린 세상과 그 소유권을 여전히 갖고 있는 세상으로 세상을 나누고 부를 쫓아간 이 시대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려준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우리 모두 가난하게 살자는 권유는 아니다. 다만 부를 쫓아간 사람들이 모두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이 가난의 공간 속에 그대로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한다. 가난한 삶도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것이란 것을 그는 냄새의 소유권으로 증명하고 있다. 나중에 잘살 게 된 뒤에도 그것은 회상으로 불러내면 삶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덕분에 나도 그녀의 냄새를 되찾았다.
(2011년 11월 20일)

**인용된 시는 다음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차주일 시집, 『냄새의 소유권』, 천년의시작, 2010

2 thoughts on “그녀가 냄새로 오던 날 – 차주일의 시 「냄새의 소유권」

  1. 아….놔..우리집인 줄알았어요….깜놀…
    전 이런 사진이 좋더라..왠지 모를 노스텔지아 말이예요..
    왠지 어린고등학생이 똑똑 하면 자다가 어린 여고생이 창문을 열고 …..
    (긴생머리여야함) 왜…….. 그러면 캔커피 주면서…내일 시험잘봐…이럴것 같은…
    지금 생각해보면…밤중에 커피주고 멍미… 그럴테지만…ㅋ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