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산천

봄은 꽃이 열어준다.
봄이 올 때쯤이면 항상 카메라를 들고 꽃을 찾아다니곤 했다.
그것은 꽃을 찾는 걸음이기도 했지만 아울러 봄에 대한 갈증이기도 했다.
그냥 봄을 따뜻한 날씨로 맞는 것이 아니라
눈에 확연하게 잡히는 무엇인가로 맞고 싶었다.
재수가 좋으면 아직도 잔설이 남아있는 산속에서 꽃을 만나기도 했었다.
내가 자주 찾는 능동의 어린이대공원 식물원도
일찍 꽃을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는 꽃은 봄이 온다는 기별에 불과하다.
실제로 봄을 여는 꽃은
꽃만 피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봄과 함께 서 있었다.
봄을 여는 꽃을 만나면 그 자리엔 예외없이 봄이 완연했다.
내게 있어 그렇게 봄을 여는 꽃은 단연 진달래이다.
그 진달래는 우리의 산천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산천의 봄은 어디에서나 진달래가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그동안 만났던 여러 곳의 진달래를 한자리에 모았다.

2001년의 4월초에 그녀와 함께 충남의 왜목마을을 찾았다.
항구 옆에 작은 야산이 있었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조망권이 좋은 산이었다.
산의 이름은 석문산이었으며 높이는 79m에 불과했다.
산을 오르는 계단길의 여기저기서 진달래를 만났다.

2002년의 4월초에 진달래를 만난 곳은 서울의 북한산이었다.
그녀와 딸, 그리고 처제의 딸 은지가 함께 했다.
도선사 입구 쪽으로 올라갔다.
등산로로 들어서자 오른쪽 사면으로 진달래가 별처럼 뿌려져 있었다.
진달래에 홀려 등산로를 벗어나고 말았다.

2004년에는 4월말에 백담사를 다녀왔다.
시기가 늦어서 그랬는지 진달래는 꽃을 땅으로 내려놓고 있었다.
그래도 흙빛을 배경으로 삼은 분홍빛이 고왔다.

2006년은 진달래와 여러 번 만났다.
첫번째 만남은 김포의 고양2리에서 이루어졌다.
승재씨의 아버님댁이 있는 곳이다.
여러 명이 일행을 이루어 그곳을 찾았지만
나는 일행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동네의 야산에 올랐다.
진달래가 몽우리를 맺고
며칠 뒤에 오면 분홍빛 웃음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3월말에 고양2리의 야산에서 진달래가 전하는 봄소식을 들었지만
정작 내가 찾아간 곳은 서울 한복판의 창덕궁이었다.
사람이 가꾸어 놓아서 그런지 세련미가 보통이 아닌 듯 느껴졌다.

창덕궁을 찾은 뒤에도 계속 서울을 맴돌았다.
4월 중순 내가 찾았던 곳은 서울의 남산이었다.
남산은 그때 벚꽃 천지였지만
그 사이에서 진달래가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2006년은 진달래와 관련한 내 경험에서 큰 분기점이 된 해이다.
서울 한복판의 창덕궁을 두 바퀴나 돌며 진달래를 마주했다는 점도 특이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이 모두 진달래로 뒤덮인 강화도의 고려산을 처음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진달래는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산의 사면을 따라 분홍빛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진달래꽃이 아니라 진달래의 바다를 보았다.

2007년의 진달래 맞이는 서울의 창덕궁에서 이루어졌다.
역시 그곳의 진달래는 말할 수 없이 예뻤다.
여자들이 화장을 왜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화장한 꽃이라면 하면 이상할 듯 하지만
그곳의 꽃들은 잘 단장하고 있는 느낌이었으며,
초점이 흐려질 정도로 예뻤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화장한 꽃은 처음이었다.

2007년에는 4월 중순경에
용인의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한택식물원이란 곳을 찾았다.
온갖 꽃들이 가꾸어져 있었지만
진달래는 흔한 꽃이어서 그런지 식물원에 따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식물원을 벗어나 산으로 걸음했더니
그곳에서 진달래가 나를 맞아주었다.
그날의 꽃 중에서 진달래가 가장 예뻤다.

한해전 찾았던 고려산을 2007년에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그녀와 함께 찾았다.
진달래의 품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2008년에는 4월초에 우연히 하남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걷다가
그 길이 진달래와 함께 하기에 아주 좋은 길이란 것을 발견했다.
남한산성까지 가는 동안
내내 진달래가 나무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숨었다 했다.
객산은 내가 진달래와 은밀히 만나는 나만의 장소가 되었다.

2008년에는 또 신문기사를 보고 경기도 포천에 있는 아트밸리란 곳을 찾았다.
아트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밸리가 뛰어난 곳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의 우람한 바위들 사이사이에서 진달래를 만났다.
그곳에선 진달래가 가장 돋보였다.

2008년의 내 걸음은 내가 살던 곳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그 중에서 가장 자주 찾았던 곳은 남한산성이었다.
하남에서 발걸음을 시작한 뒤 산능선을 타고 하루 종일 걸어
산성의 북쪽 부분을 모두 걸쳐간 뒤에
서울의 마천동 쪽으로 내려온 적도 있다.
마천동 쪽으로 내려올 때면 저녁 무렵이 되었다.
내려오다 저녁빛에 물든 진달래꽃 한송이를 만날 수 있었고
그 순간 나는 잠깐 동안 진달래에 물들었다.

2008년에는 남한산성을 동서남북으로 훑고 다니며 섭렵을 했다.
원래 남쪽으로는 거의 가본 적이 없었는데
좋은 카메라를 들고 다닌 덕택에
카메라를 보고 관심을 표한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의 안내로 성의 남쪽에 귀한 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쪽은 길이 높게 흘러가며 나무들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있었고
그곳을 가며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을 듯
환하게 꽃을 피운 진달래를 만났다.

2009년 4월초에는 매번 팔당의 한강 남쪽을 맴돌던 걸음을 북쪽으로 옮겨
덕소의 새재고개란 곳을 넘어갔다.
고개를 넘어가며 이제 꽃을 피우고 있는 진달래를 만났다.
한창일 때 가면 이곳도 볼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후로 항상 이곳을 찾는 걸음은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었다.

2009년에는 세 번째로 강화의 고려산을 찾았다.
넘실대는 진달래의 물결은 여전했다.
그녀가 함께 갔고, 승재씨도 동행해 주었다.
아울러 서재석, 박영수 부부가 처음으로 같이간 길이기도 했다.

2010년에는 그녀의 사무실에 갔다가
사무실의 지척에 있는 양재동의 구룡산에 올랐다.
진달래꽃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천천히 걸으며 진달래의 봄을 혼자 여유롭게 향유했다.

2011년 4월초에는 팔당의 예봉산 자락에 있는 견우봉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저녁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는 진달래를 만났다.
반짝반짝거리는 듯했다.
직녀와 견우가 만난 뒤 앉아서 얘기 나누면
그들의 사랑에 눈을 반짝거리면서 이곳의 진달래가 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11년에는 차를 몰고 팔당의 강변을 달리다
길가의 산자락 아래로 피어있는 진달래를 보고 차를 세운 적이 있다.
차를 세우고는 잠시 작은 진달래의 군락지 사이를 걸어보며
그 분홍빛 봄을 함께 했다.
봄이면 우리의 산천은 어디나 진달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