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교』에 대한 몇 가지 짧은 노트

영화 『은교』의 포스터,
다음의 영화 안내 페이지에서 가져옴

• 은교는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올 사랑에 대한 기대같은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정문으로 들어올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랑은 담을 넘는다.
시인 이적요가 담에 걸쳐놓은 사다리는 말하자면
담을 넘어 느닷없이 찾아올 사랑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랑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

• 은교는 사랑이 존재로 오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 존재란 몸의 존재이다.
담을 넘어와 흔들의자에서 졸고 있던 은교는
바로 그 몸으로 온 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존재로 오는 몸의 사랑은 무섭다.
몸의 사랑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온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온기는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시인은 아름다운 시를 꿈꾸지만
그가 다듬어낸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도
존재에서 발원하지 못하면 그 온기를 가질 수 없다.
온기를 가지지 못한 순간,
그의 시는 죽어서 온기를 잃은 싸늘한 사체가 되어 버린다.
몸은 그 죽은 텍스트를 살려낼 수 있다.
그 앞에선 누구도 저항하기 어렵다.
무서운 사랑이다.

• 은교는 사랑이 함께 생활하고픈 욕망이란 것을 일깨운다.
은교가 처음 이적요의 집에 와서 한 일이란
청소하고, 설겆이하고, 식사를 만드는 일이지 시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그 생활이 이적요에게 밀려든다.
그는 함께 청소하고, 함께 설겆이하고, 함께 밥먹으려 한다.
심지어 먹지도 않던 샌드위치도 은교가 만드는 순간,
그의 식사가 된다.
우리가 따분해하고 지겨워하는
청소하고, 설겆이하고,
또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매일 똑같이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일상적 생활이
사실은 사랑할 때 우리들이 욕망한 궁극이었다.

• 은교는 몸의 존재이지만 몸의 존재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몸의 존재가 온기를 갖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몸밖에 없다는 점이다.
몸밖에 없을 때 몸의 존재는 몸에 갇힌다.
시인의 시는 그 몸에게 길을 열어준다.
시는 뾰족한 연필이 슬픔이 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 몸에 알려준다.
뾰족한 연필은 슬프다는 시는
몸에 갇혀 있을 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된다.
그러나 시인에게서 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아이에게
필통속에서 달그락 거리는 연필 소리는 울음소리였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갇혀있던 몸은 또다른 세상을 향해 몸을 연다.
은교가 필통을 흔들어
그 슬픈 울음소리를 들어보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다.
존재와 텍스트가 가장 아름답게 결합하는 순간이다.

• 은교는 몸의 존재이지만 몸에 갇혀 있다는 측면에서
몸밖에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결핍의 존재이며,
시인은 텍스트의 존재이지만 텍스트만으로 온기를 가질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또한 체온을 갖지 못한 결핍의 존재이다.
그 두 결핍의 존재가 만나서 이루는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몸의 존재로부터 텍스트를 받아적을 수 있는 것은
젊은 나이에는 불가능하다.
나이를 맞추지 못하는 사랑은 슬픈 법이다.
자칫 잘못하면 추하게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 너의 글에선 온기가 느껴지질 않아라는 말들을 한다.
무슨 글을 머리로 쓰냐는 힐난도 있다.
존재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말이다.
은교는 바로 그 온기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몸의 존재이다.
그걸 무시하면 어떤 글도 온기를 가질 수가 없다.

• 은교의 몸이 항상 온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몸은 동시에 육체적 욕망의 대상이다.
육체적 욕망의 대상이 되면 그때부터 은교의 몸은 수탈된다.
젊은 작가에게 은교는 수탈의 대상이다.
은교가 젊은 작가와 자고 나오면서 다리를 약간 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수탈은 인간의 몸을 망가뜨린다.
시인은 그 몸을 수탈한 놈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이 사다리를 놓고 기어올라가 창문으로 그들의 행위를 지켜본 것은
일말의 기대 때문이다.
젊은 작가 녀석이 사랑에 눈뜨길 바라는 기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너진다.
그 놈은 잘나가는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뭉친 놈이다.
그러나 그 잘나가는 속도는
알고 보면 자본의 세상이 만들어낸 성공에 대한 허구이다.
우리들은 그 허구를 쫓는다.
그 허구를 쫓는 놈은 생각이 거꾸로 된 녀석이다.
결국 그는 속도를 쫓다 달려드는 또다른 속도 앞에서 거꾸로 뒤집혀 죽는다.
죽는 순간, 비로소 드러난다.
그 놈이 세상을 거꾸로 살았던 놈이란 것이.
시인이 그 놈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 놈은 자신의 속도에 스스로 치어 죽었다.

• 은교는 사랑이 한번 연주되고 사라지는 음악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음악을 옮길 수는 없다.
음악은 연주되는 그 자리의 사람들만이 알 수가 있다.
사랑도 똑같아서 사랑했던 그 자리의 두 사람만이 알 수가 있다.
얘기를 듣고 사랑을 썼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은교는 그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텍스트는 그 텍스트의 당사자도
그것을 쓴 사람이 누군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 은교는 음악으로 비유하면 재즈같은 영화다.
재즈 음악을 하고 있는 한 친구에게서 들었다.
재즈는 듣는 이를 위한 음악이라기보다
그 음악을 하는 이들을 위한 음악이라고.
결국 재즈를 정말 즐기려면 그 음악을 직접 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은교는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 서 있는 영화이다.
글을 읽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겐 어려울 수밖에 없다.

• 은교의 몸은 두 가지의 사랑을 모두 겪는다.
아니 하나는 사랑이 아니라 사실은 욕정이다.
사랑은 은교의 몸을 통하여 은교를 느끼려 한다.
이적요의 사랑이다.
욕정은 은교의 몸을 통하여 그 몸을 자극하고
자신의 욕정을 그 몸에 배설하려 한다.
은교는 그래도 다행이다.
그 둘을 모두 겪었으므로.
대부분의 은교는 욕정에 상처받으면서 자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젊어서 은교의 몸을 느끼고
그 느낌을 받아적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슬프게도 몸이 쇠락한 뒤끝에서야
몸을 느끼고 받아적는 것이 가능해진다.
시인 황동규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기억력은 점점 쇠퇴해 가는데
감각은 점점 더 예민해진다고 했었다.
그 감각의 예민함은
우리가 죽어서 가야할 저 세상이 감지될 정도의 예민함이다.

4 thoughts on “영화 『은교』에 대한 몇 가지 짧은 노트

  1. 영화 은교를 보고 좀 싱겁다는 생각을 했어요.
    뭐냐? 이러면서 나왔거든요.

    이렇게 보니 싱겁던 영화에서 놓쳤던 맛이 많았구나 싶어요.
    그렇군요. 글을 쓰는 입장에 서 있는 영화였군요.
    한 단락 한 단락에서 하시는 말씀이 영화를 살려내네요.
    몸과 텍스트, 온기, 속도…
    존재와 텍스트가 아름답게 결합하는 달그락 필통 소리.
    햐아….

    1. 그런데 약간 좀 뻔한 영화이기는 했어요.
      처음에 스틸 컷으로 집과 담에 걸쳐놓은 사다리가 비칠 때는 저게 뭐지 했는데.. 은교에게 서지우가 너 어떻게 들어왔어 하고 묻는 장면에서 사다리요 하는 순간부터 그게 뒤늦게 찾아올 뜨거운 체온의 사랑이란 짐작이 들기 시작하면서 끝이 다 예상되기 시작하더라구요. 야구 중계 보면서 이제 도루할 시점인데요 하고 해설을 했는데 정말 도루하는 경우랄까. 에이씨. 이거 뭐야. 예상을 벗어나질 못하잖아 하는 느낌은 있었다는.
      요것 보다는 홍상수 영화가 더 나은 듯 싶어요. 다른 나라에서가 더 보는 맛이 있더라구요.

  2. 저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줌인-줌아웃을 자유자재로 하시는 평론가의 노트에
    기대어 한 번 봐야겠습니다.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엔 이런 거 별로 안 보이던데,
    이런 노트 종종 들려주세요.

    1. 영화가 최소한 1시간반은 봐야 하니까 그게 좀 고역이더라구요.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그 시간을 보내고 나면 뒤끝이 너무 허무하거든요. 그 때문에 자꾸 시에 탐닉하게 되는 듯 싶어요. 어제는 광화문에 나가 다른 나라에서를 봤는데 괜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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