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앤디 워홀을 생각한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서 내 생각이 자주 그 속으로 머물게 되는 것은 <마릴린 몬로>이다.
마릴린 몬로의 모습이 색채를 바꾸어가며 반복되고 있는 그림이다.
너무 유명해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다.
왜 그는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일까.
그때마다 나는 복제와 변형이 매우 손쉬운 디지털 문명의 폭넓은 자유를 떠올리곤 한다.
디지털 문명은 쉽게 베낄 수 있도록 해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대상을 쉽게 변형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대상이 바뀔 때까지 목 매달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상을 바꾸고 즐긴다.
물론 내가 디지털의 작업 공간에서 그녀의 사진을 변형시켰다고 하여 그녀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실의 공간 속에서 그녀를 바라볼 때 그녀는 무료한 일상 속에 묶여 있으며,
그 무료한 일상은 거의 변화가 없다.
일상이란 그런 것이며, 또 일상은 그렇게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일상의 무료함이 지나치면 우리는 일상 속에 살아야 하면서도 그 일상을 견디기 어렵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중의 욕망을 갖는다.
하나는 안정된 일상에 대한 욕망이며,
또 하나는 일상을 뒤흔들고 싶은 변화에 대한 욕망이다.
그 둘은 상치된다.
그렇다면 일상을 안정적이고 무료한 상태 그대로 두고 변화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바로 그때 우리는 워홀의 <마릴린 몬로>에서 그 대답의 일단을 듣는다.
나는 오늘 그녀의 사진을 갖고 잠시 동안 만지작 거렸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변신은 내 손아귀에 있었다.
일상의 그녀.
그녀에게 변신을 강요하지 말라.
그녀의 안정을 뒤흔들면 그녀가 고통스럽고 힘겨워 한다.
그녀에게서 일단 색깔을 제거해 버렸다.
그녀는 흑백의 두 가지 색으로 환원된다.
단조롭지만 우리는 그 두 가지 색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마치 그녀를 태초의 자리에 세운 느낌이다.
나는 그 단조로움에 보라빛을 덧입히고
아울러 그녀의 윤곽을 흩어놓았다.
누군가가 보라빛 향기를 노래했지만
이제 그녀가 내 손아귀 속에서 보라빛 향기에 묻혀있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그녀를 복제하여 이중으로 겹치고
그녀의 존재 양태를 바꾸었다는 것을.
복제된 그녀 중 하나는 정상 모드였지만
다른 하나는 제외(Exclusion) 모드였다.
제외 모드의 그녀는 정상 모드의 그녀를 살펴보더니
자신의 얼굴값을 일단 차감해 버렸고
이어 그 중에서 50퍼센트의 회색값은 그대로 보존시키며 새롭게 탄생했다.
나는 다음에는 그녀를
10명의 그녀로 분열시켰다가
하나로 모아볼 생각이다.
분명히 스케치풍에다 수채화 물감 분위기도 난다고 했는데
설명대로 되진 않은 것 같다.
그녀를 4번 복제한 뒤
흑백과 컬러 각각 두 개의 레이어를 이용하여 변신시켰다.
단순한 모드의 조합보다는 훨씬 더 낳은 것 같다.
이번의 변신을 위하여 그녀는 기본 필터를 하나 통과하기도 했다.
2 thoughts on “그녀의 변신은 내 손아귀에 있다”
복제!^^ 참 재밌게도 글을 쓰시네요.^^
김동원님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지 너무 궁금해요.^^
그나저나 지금도 고우시지만 20대쯤엔 꽃같이 아름다우셨을것이 눈에 보이네요. 저 눈빛은 정말 맑아요.저도 통통이님처럼 맑은 눈빛을 지닌 여자가 되고싶어요.^^
요즘 제가 실험 중이거든요.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과연 깊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
그래서 이 방법 저 방법 여러가지 모색을 해보고 있어요.
그 중의 하나가 생각에 앞서 세상이 실재한다가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생각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것도 맞는다는 것이죠.
생각으로 사랑을 만들 수 있을까.
예전에는 그녀가 저기에 있고 그것을 사랑으로 생각한다고 여겼는데 요즘엔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보고 있는 중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