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심각하면 서로에게 상처로 남지만
가벼운 다툼은 가끔 기억 속에 떠올릴 때마다 입가로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지나갈 수 있는 즐거운 추억이 된다.
집안을 둘러보면 이런저런 것들이 그런 가벼운 다툼의 기억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김이다.
정확히 그녀와의 첫 다툼은 김이 아니라 김밥과 관련된 것이었다.
우리 둘은 누구나 살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나나 그녀 모두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자랐지
한번도 스스로 밥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결혼하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
그녀가 어느날 오늘은 김밥을 해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서툴렀으랴.
물끄러미 김밥마는 것을 내려다보던 나는 무심히 한마디 했다.
–아예, 떡을 쳐라, 떡을 쳐.
갑자기 그녀가 김밥말던 손길을 멈추더니 눈물을 뚝뚝 떨구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녀는 한번도 누군가를 위하여 김밥을 말아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러니까 그냥 김밥을 말았던 것이 아니었고,
누군가를 위하여 김밥을 말았던 것이며,
그 누군가가 바로 나였다.
그래서 내 얘기는 그것이 아무리 그녀의 김밥에 대한 공정한 비평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공정성을 가질 수 없었으머,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무지막지한 배신 행위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상당히 미안했다.
혹 그녀가 말아준 김밥이 떡인지 김밥인지 헷갈리더라도 나처럼 김밥 자체에 눈을 빼앗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지어다.
그 어리석음은 사랑을 배신당한 한 여자가 주체못하고 쏟아내는 눈물의 씨앗이 되나니.
내 책상 위의 풍경이다.
컵은 벌써 이틀째 그 자리에서 먹다남은 음료의 말라붙은 자국과 함께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결혼초에도 내 책상 위의 풍경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점심 때 먹은 밥그릇이 저녁 때 퇴근한 그녀가 치워줄 때까지 그대로 제 자리를 지켰다.
어느날 그녀가 드디어 그 그릇들 좀 치우면 안되냐고 잔소리를 했다.
나름대로 바쁘자고 하면 얼마든지 바쁠 수 있는 프리랜서였던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언성을 높였다간 별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순식간에 머리를 굴린 뒤 조용히 “너, 발견예술이라고 들어봤냐”라고 물었다.
–그녀: 그게 뭔데?
–나: 아, 그 왜 변기를 가져다 전시해 놓고 “샘물”이라고 제목을 붙이거나 홍수에 떠내려가는 나무를 건져다 전시해놓고 “비행중”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예술있잖아. 그런 것을 발견예술이라고 해.
–그녀: 그런데.
–나: 니 눈엔 이게 내가 게을러서 책상을 어지럽혀 놓은 걸로 보이냐.
–그녀: 아니, 또 무슨 궤변이야. 그럼 이게 예술이란 말이야.
–나: 궤변이라니. 이건 제목까지 있어!
–그녀: 제목? 퍽도 있겠다. 그래 제목이 뭔데?
–나: <기옥 손길을 기다리며>
기옥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씩씩대며 나를 노려볼 뿐 그 다음 대꾸는 잇지 못했다. 좀 우당탕 거리기는 했지만 그날 설겆이도 또 그녀가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좀 편안한 마음으로 내 책상 위에서 지속적으로 발견예술의 전시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전시 기간이 만료되었다 싶으면 그녀가 작품들을 치워주었다.
빨래이다.
결혼초에 우리는 가사를 둘로 나누어 각각 분담했다.
나는 빨래를 맡았고 그녀는 식사를 맡았다.
내가 빨래를 맡은 것은 당시엔 세탁기가 없어서 빨래란 것이 순전히 힘을 필요로 하는 남자의 노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다 말다툼이 일면 그 불똥이 서로가 맡은 일로 번져 나갔고 그때면 절대적으로 내가 유리했다.
나는 이렇게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야, 너 내가 빨래 안해줘서 발가벗고 다닌 적 있냐? 나는 니가 밥 안해줘서 굶은 적 있어, 이거 왜이래.
내 책꽂이이다.
어느 날 그녀가 내 책꽂이를 쳐다보다 트집을 잡았다.
–동원이형, 책은 읽지도 않는 것 같은데 왜 계속 사들이는 거야? (그녀와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를 가리켜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그 습관은 우리의 결혼 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 그건 내가 책을 읽지 않는게 아니고 단지 속도의 차이에 의한 착시 현상일 뿐이야.
–그녀: 뭐, 착시 현상?
–나: 그래. 책을 사는 속도와 책을 읽는 속도의 근본적 차이에서 오는 착시 현상이지. 돈만 있으면 책을 사는 속도가 훨씬 빠를 수밖에 없어. 그래서 요즘은 책을 사는 속도가 빠른 것 뿐이지 내가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야. 다만 그 속도의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마치 내가 책을 읽지 않는 것처럼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것 뿐이야. 이제 알아듣겠어.
장롱의 틈새이다.
나에겐 좀 지저분한 버릇이 있는데 그건 얼굴의 숨구멍에서 분비되는 분비물을 말똥구리처럼 돌돌 말아서 장롱의 옆으로 나 있는 틈새로 정확히 튕겨보내는 습관이었다.
물론 그녀가 나의 이 습관을 그냥 용인했을 리 없다.
그녀는 딸을 하나 낳은 뒤, 어쩌면 지저분한 버릇도 지 아버지를 그대로 빼닯았냐며 자신이 나의 이 습관에 관한한 애를 낳고 나서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음을 한탄한 적이 있었다.
어쨌거나 그녀가 어느날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그녀: 야, 그거 계속 그리로 집어넣을래!
–나: 그럼 이 지저분한 것을 방 한가운데 놔두냐?
예상 외의 일격에 갑자기 할 말을 잃은 그녀는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어느 날은 그녀가 내가 보는 책을 문제 삼았다.
–그녀: 동원이형, 정말 그 영어책 다 알고 보는 거야?
–나: 사실 거의 몰라.
–그녀: 그런데 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 봐.
–나: 나만의 즐거움이 있거든.
–그녀: 모른다면서.
–나: 어, 아는 단어 찾는 즐거움. 50페이지 마다 아는 단어가 하나씩 나와. 얼마나 반가운데.
우산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그렇게도 귀했던 우산이 요즘은 왜 그렇게 흔한지 모르겠다.
이제는 집안 식구들 하나당 3개씩은 돌아가는 것 같다.
어쨌거나 어느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는데 그녀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 동원이형, 동원이형 아주 인간성 안좋은 거, 알아?
–나: 아니, 갑자기 서론이고 예고편이고 뭐고 없이 대뜸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 내가 말이야, 그동안 유심히 관찰해 봤는데, 비오는 날 우리가 같이 우산을 쓰고 가잖아. 그럼 동원이 형이 우산을 들 때와 내가 우산을 들 때가 아주 다르다.
–나: 그야, 나는 키가 크니까 높이 들고, 너는 키가 작으니까 나지막하게 들지.
–그녀: 그런게 아니고, 동원이 형이 우산을 들면 내가 비를 많이 맞는데, 내가 우산을 들면 동원이 형이 거의 비를 맞질 않아. 그러니까 동원이 형이 우산을 들면 거의 자기쪽으로만 쓰고 가는데 내가 들면 동원이 형을 씌워준다는 거지.
–나: 아니, 그래? 그런데 뭐가 문제야. 내가 드나 니가 드나 항상 똑같은 것 같은데.
그날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한참 쏘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도 비오는 날이면 그녀의 손에 들린 우산은 여전히 내 쪽으로 기울며, 내 손에 우산이 들리는 날이면 그녀가 우산대를 자신 쪽으로 당겨서 함께 들고 간다. 그 때의 내 얘기 뒤로 그녀는 내 사랑은 기다려선 안되며 완력을 이용하여 옆으로 끌어다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내 사랑은 그녀가 그다지 힘을 가하지 않아도 사실 그녀가 당기기만 하면 그녀의 옆으로 잘 끌려간다.
사랑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어서 곧잘 기다림과 인내의 사랑은 우리의 내면에 불만으로 쌓이다 끝이 난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사랑은 손이 닿는 거리에 있을 때 끌어당기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다.
10 thoughts on “작은 다툼의 추억들”
으악~ 동원님께 말걸면 안되겠네요.
그리고 그 말똥구린가뭔가 좀 쌓지마셔요. 으메 forest님 어찌사시나요.ㅎㅎ
우리 forest님은 나의 말을 물리치는 놀라운 신공을 갖고 있어요.
“아이구, 시끄러워”라는 신공이라고 제가 거의 무릎을 꿇고 말지요.
부부싸움도 쌓아놓으면 나중에 다 즐거움이 되니까 너무 심하게는 싸우지 말고 조금씩 싸우면서 많이 사랑하며 사세요.
덕분에 무덥고 짜증날 수도 있었던 아침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좋은 출발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웹에서 너무 재미있게 읽고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재미도 있었지만, 공감이 너무 되서리..
제 남자친구분도 필자님 못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복장터질때가 한두번이 아니지요.
덕분에 즐겁게 웃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원님의 글을 읽다보니 오늘 만난 사람이 생각나 몇자 적을까 합니다.
제가 만난 두 사람은 거의 10년의 시간을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결혼식은 생략하자 라는 말조차도 하지않고 그냥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레 함께 살기 시작한 두 사람은 친구이자 연인이자 정신적인 동지랄까 그런 모습으로 각자의 일을 하며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 여전히 지내고 있더군요.
처음 두 사람이 사귄다는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지금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요. 그 두사람 사이의 시간은 강을 만드는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더 굳고 튼튼한 다리를 만들고 혹여 어느 한 곳이 부식되면 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복구시키는 역할을 한듯 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있었지요. 그런 시간을 함께 만들어 나갈 사람.
지금은 바다가 되어 각자 섬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시간은 다시 다리를 만들 희망을 돋아나게도 하더군요.
말이 길었습니다.
그 두 사람과 이 글을 보니 희망이 두배는 커진 것 같습니다. ^^
저는 항상 결혼을 권합니다.
이건 나의 유머이긴 한데
그건 혼자 망하기 싫어서 입니다.
결혼이 사실 힘든 측면이 많죠. 하지만 혼자 사는 것보다는 재미난 구석이 더 많은 것 같고, 특히 애가 태어나면 더더욱 재미나고 즐거운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사실 많은 것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세상시름을 다 잊을 수 있을 정도니까요.
오늘은 그녀와 얘기를 나누다가 이제 헤어지기에는 추억이 너무 많다고 얘기를 했죠. 저는 보통 그녀와 여행을 떠나면 자세하게 기록을 하는 편이라서 특히 추억이 많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그런 글들이 노트 속에 아직 초고 상태로 잠자고 있죠. 추억이란 무서운 겁니다. 싸우고, 사랑하고, 웃고 그러면서 추억이 쌓이다 보면 어느 날부터 상대방이 지겨우면서도 또 그 빈자리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앞날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지곤 하죠. 그럼 이제 깊은 수렁에 빠진 겁니다. 사랑은 일종의 수렁이어서 깊이 빠지면 거의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글이로군요. ^^
특히 “사랑은 일종의 수렁이어서 깊이 빠지면 거의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이 말씀이 와닿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그저 한 여자만이 되어버리는 제가 무서워 그 넘의 사랑이 무섭습니다.
나를 나 스스로의 함정으로 부터 구해줄 사람을 다시 봅니다.
언젠가는 나타나겠죠. 그게 저의 희망입니다. ^^
솔직히 결혼에 대한 미련 많이 접었었습니다.
근데 김동원님의 블로그에 발을 디디면서 부터 마음이 움직이는군요.
감히 멋진 삶을 스스로 만드시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얼마만에 시원하게 웃는 웃음인지… 너무 웃겨서 눈물이 나네요. ^^
읽다가 눈물을 흘릴뻔했습니다. 확실히 대선배이신 eastman님께 매일 매일 한수씩 배워야겠습니다. – 이제 결혼한지 1년… ^^
어제는 그녀가 제 방에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작품치우러 들어왔다.
그녀의 불만 중 하나는 이상하게 말싸움만 하면 자기가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져주고 카메라 렌즈를 하나 건지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