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10월 3일),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하루 종일 방에서 나랑 뒹굴고 놀래, 아님 등산을 갈래.”
난 등산을 선택했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 강변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9시 10분.
횡계행 버스표를 끊었으며, 9시 35분차였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은 그곳의 선자령이었다.
선자령도 좋았지만 어제는 대관령까지 가는 버스길도 아주 특이했다.
우리가 탄 버스가 섰던 자리.
떠나면서 버스를 세워두었던 자리를 차창으로 바라보면
이제 그 자리가 비어있다는 느낌보다
마치 우리가 섰던 그 자리를 쑥 뽑아갖고 떠난다는 기분이 든다.
그게 바로 여행의 느낌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섰던 자리를 비우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섰던 자리를 쑥 뽑아갖고 떠나서
여행지에서 훌훌 털어버리고 오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인지 모른다.
보통은 버스가 천호대교를 건너 올림픽 대로를 타는데
이 날은 잠실대교로 건너가고 있었다.
멀리 잠실운동장과 코엑스 건물이 보였고,
전체적으로 뿌연 날이었다.
중부고속도로의 톨게이트가 아직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차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앞좌석의 사이로 엿보았더니 길에 차들이 가득했다.
그러자 운전기사 아저씨는 항상 다니던 고속도로를 미련없이 버렸다.
우리처럼 여행길을 나선 사람에겐 아주 다행스런 일이었다.
추석 귀향을 하는 사람들은
고향가는 즐거움으로 무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막히는 길의 짜증스러움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우리 같이 여행길을 떠난 사람들은 길이 막히면 무료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버스는 팔당대교를 넘어서고 있었다.
팔당댐에 갇혔다가 풀려난 한강물이
아침 햇볕에 반짝반짝 부서지고 있었다.
버스는 남한강 줄기를 따라 양평으로 향하고 있었다.
버스의 차창으로 내려다보는 팔당호의 풍경은 아름답다.
속초나 양양을 갈 때 버스를 타고 이 길을 가본 적이 여러 번 있었으나
횡계행 버스를 타고 이 길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때문인지 같은 길의 같은 풍경인데도 처음 보는 풍경같았다.
길옆으로 논이 계속 이어지고,
논에선 벼가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었다.
햇볕이 한움큼 쏟아지고 있었고,
빛이 쏟아질 때마다 벼도 그만큼씩 익어간다.
이럴 때는 차창의 커튼을 젖히고 눈을 감은채
차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좋다.
눈을 감아도 햇볕은 우리 몸 깊숙이 들어와 환하게 부서진다.
그때마다 우리도 이 가을날과 함께 익어간다.
앗, 수동 탈곡기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를 택하자
속도가 빠른 그 길, 그러니까 고속도로에선 전혀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간간히 차창으로 담기며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어릴 적 추수날이면 발로 밟아 돌리는 저 탈곡기가
하루종일 논에서 윙윙거리며 신나게 노래를 불렀었다.
아마도 온가족이 다 모였나 보다.
추수에는 일하고 돈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는 것 같다.
국도로 간 버스는 이런 풍경으로 끊임없이 차창을 채워주며
우리의 눈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빨리 길을 가야 하는 운전기사 아저씨는
용문을 지난 뒤 횡성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버스는 새말IC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섰다.
고속도로로 올라선 버스는 이제 다시 예전대로 달리기 시작한다.
강원도의 고속도로에선 가끔 달리다 보면
멀리 우리가 가야할 길이 미리 그 모습을 나타내곤 한다.
저 길은 조금 뒤 우리들이 가야할 길이다.
가야할 길과 함께 지나온 길도 보인다.
지나온 길의 저편으로 산들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물넘고 산넘어 이 길을 가는 느낌이 든다.
시선을 들어보니 하늘에 구름 몇점이 떠 있다.
구름은 몸이 가볍지만 버스의 날렵함은 이길 재간이 없다.
버스는 금방 구름을 따라잡더니 구름을 뒤로 밀어냈다.
이 예쁘장한 버스 터미널은 장평 터미널이다.
버스가 다음에 들릴 곳은 진부이다.
진부는 오늘이 장날이라고 했다.
그곳에 내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횡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만 들어가는 곳을 놓치고 만 것이다.
고속도로에선 나가는 곳을 놓치면 쉽게 길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나가는 곳이 조금 뒤의 뒤쪽, 시선에 잡히는 곳에 있었지만
버스는 그곳으로 나가지 못했다.
버스는 결국 강릉까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속도로 방음벽 너머로 멀리 강릉이 비치고 있었다.
강릉 톨게이트를 나온 버스는 급하게 방향을 바꾸어
옛날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대관령의 옛길로 들어서서 횡계로 향했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당황한 눈치였지만
구불구불 거리는 길을 올라가며 옛추억까지 함께 맛보는 우리들은 즐겁기만 했다.
우리는 양해를 구해 대관령에서 버스를 내렸다.
우리는 내릴 때,
누구나 실수는 있는 법이니
오늘 하루는 조심해서 운전하라는 말을 인사로 건넸다.
대관령 휴게소의 풍력발전기가 가진 손가락 세 개를 모두 펼쳐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횅하니 달려온 뒤,
횡계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올라오던 그 틀에 박힌 길이
오늘은 국도를 따라가며 풍경을 맛보고
강릉까지 갔다가 다시 옛길을 따라 대관령에 이르는 아주 특이한 길이 되었다.
4 thoughts on “차창으로 기록한 대관령까지 가는 길”
운전기사 아저씨의 실수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죠?^^
아주 급한일로 가는거 아니라면 그런 상황이 더 재밌을것같거든요.^^
늘 정해져있는길. 내가 가야할길로만 가는 인생 참 재미없어요.
가끔 뜻밖의 길로도 가며 모험해보고싶거든요.ㅋㅋ
근데 대관령길 참 자주 가시네요?
난 아직 한번도 못가서 가보고싶은곳.^^
추석 귀향 차량으로 길이 막히는 바람에 아주 독특한 경험을 했지 뭐예요.
이 날 대관령은 말도 못했죠. 양떼목장에 온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몰려든 관광버스가 수십대는 되는 것 같더군요. 아마도 이 날은 양떼목장에 양떼보다 사람이 더 많았을 것 같아요.
저도 달리는 차안에서 사진찍고 퐈요~
제 니콘4300…힘들때 많이 도와준친구라서 중고로 팔기가 맘아파요..
달리는 차안에서 사진찍는건 욕심인건가~~ㅜ_-
늦게 깜깜한 대관령 옛길을 걸어서 강릉으로 넘어갔는데
넘어가선 한 식당의 가족들 저녁 자리에 끼어서
저녁까지 공짜로 얻어먹었답니다.
물론 술도 얻어먹고.
2층 노래방에서 노래도 한곡 부르고 가라고 하더군요.
나중에는 차로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었답니다.
이상하고 신기하고 재미난 여행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