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그녀와 함께 선자령에 다녀왔다.
선자령은 이름과 달리 고개가 아니라 평창에 있는 산이지만
횡계나 대관령 옆에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찾아가기에는 더 쉽다.
횡계행 버스를 탄 우리는 그곳에서 내려 걸어가거나,
아니면 택시로 대관령 휴게소까지 가려 했으나
우리가 탄 버스가 횡계에 들리는 것을 깜빡하여
강릉에서 다시 대관령을 넘어 횡계로 돌아가는 바람에
곧장 대관령에서 버스를 내릴 수 있었다.
산은 길이 완만하여 크게 부담이 없었다.
선자령의 산길로 접어들면 나무들이 울창하다.
그녀가 저만치 간다.
나무는 그녀의 키를 세 길, 네 길, 다섯 길을 넘어서고,
그녀의 키는 금방 초록빛 숲속으로 잠긴다.
그녀는 숲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초록이 깊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보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자령의 산길이 항상 그렇게
앞사람을 숲속으로 감추곤 하는
아주 초록이 깊은 그런 길은 아니다.
길은 종종 가을볕에 몸을 말리고 있는 풀들을 좌우로 두고
낮게 넘실대기도 한다.
오를수록 산의 나무들은
허리가 가늘어지고 키도 점점 낮아진다.
나무들이 키를 낮추면
가지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볕의 양은 점점 많아진다.
그러다 보면 선자령 정상 부근의 풍력발전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무들도 이제는 한 길 정도의 키로 사람들과 눈을 맞추기 시작한다.
가다보면 억새가 하얗게 손을 흔들어 지나는 사람을 반긴다.
당신도 잊지 말고 억새에게 손을 흔들어 주시라.
손을 흔들 때는 당신도 하얗게 흔들어야 한다.
이제는 길가의 풀과 나무들이 허리 아래쪽으로 몸을 낮춘다.
그러면 시선이 멀리 산등성이로 먼저 올라서서
이만치 서 있는 우리에게 빨리오라고 손짓이다.
하지만 다리는 시선의 손짓을 짐짓 모른채,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누가 어지러운 풀잎을 가지런히 모아 댕기를 따주고 갔다.
댕기를 딴 풀은 그 맵시를 자랑하고 싶어
어디론가 멀리 산밑으로 외출하고 싶지 않았을까.
선자령의 정상 부근은 목장의 일부이기도 하다.
때문에 정상 부근에선 넓게 목초지가 펼쳐진다.
그곳에선 풀들이 아무리 발돋움을 하여 키를 세워도
우리의 발목 아래쪽으로 놓인다.
우리는 목초지에 앉아서 한참 동안 볕을 쬐었다.
이곳에 앉았을 때 메에에 울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초록이 일렁이는 둥근 초지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우리는 그것을 비행접시 착륙장으로 명명했다.
나는 그녀에게 “저곳에 가면 분명 최초로 착륙하는 비행접시에겐
착륙장 이용료를 면제해준다는 안내판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게 “가서 직접 확인하고 오면 안되겠니?”하고 말했다.
하지만 난 이상하게 가서 확인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상을 알리는 표지석.
선자령은 낮으막한 산이었지만
정상의 표지석은 백두대간을 모두 호령할만큼 높고 우람했다.
정상에 올랐을 땐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올랐을 때 선자령의 하늘에선
구름이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었다.
가는 길을 물었더니 강릉길에 나선 것이었다.
선자령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 곳곳에서 풍력발전기를 만난다.
날개는 엇박으로 제각각 돌아가지만
가끔 스텝을 맞출 때도 있다.
풍력발전기란 것이 바람의 힘으로 날개를 돌려
전기를 얻어내는 것이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물속에 산소알갱이가 녹아있듯이
아마 바람 속엔 전기알갱이가 녹아 있을 거야.
가끔 바람을 시원하게 호흡할 때면
온몸이 짜릿할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건 분명한 것 같다.
나는 풍력발전기의 날개는 물고기의 아가미와 비슷해서
용케도 바람 속에서 그 전기알갱이를 골라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내려오다 그 생각을 바꾸었다.
풍력발전기는 바람보다는 구름을 뚫고 내려온 저녁 햇살을 잔뜩 받아두었다가
그걸 우리에게 보내 밤을 밝혀주는게 틀림없었다.
내려오다 보면 붉은 가을을 가득담아
손을 활짝 펼쳐든 은행잎을 만나게 된다.
그 손을 한번 잡아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마도 손이 붉게 물들지도 모른다.
아울러 단풍의 손을 잡을 때 고개를 들어
나무가지 끝을 한번 올려다 보는 것도 잊지 마시라.
우리가 시선을 길에 낮게 깔고 산을 내려갈 때
머리 위 나무가지 끝에서 나뭇잎들이 계속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머리 위의 나뭇잎들에게도 서운하지 않게 한번쯤 손을 흔들어주어야 한다.
또 내려오는 길에 구름이 가면놀이를 하자고 잠시 발길을 잡을지 모른다.
오늘의 구름은 대마왕 가면을 썼다.
구름의 가면놀이에 동참하고 싶다면
임시방편으로 양손의 엄지와 집게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그 동그라미를 적당히 눈에 가져다 붙인 뒤
‘배트맨!’을 외치면 된다.
선자령으로 오르는 길은 중간에서 둘로 나뉜다.
하나는 2.7km 길이고, 다른 하나는 2.9km 길이다.
당연히 짧은 길은 험하고, 먼 길은 완만하다.
짧고 험한 길로 내려오면 새로난 영동고속도로를 구경할 수 있다.
선자령이 너무 낮아 왠지 산에 오르고도 허전한 느낌이 든다면
중간에서 대관령 휴게소 쪽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반정으로 가는 샛길을 택하여 대관령 옛길로 내려가면 된다.
그러면 강릉으로 향하게 된다.
대관령 옛길로 내려왔다면
그 길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옛길만나가든”에서 식사를 하시라.
정선 태생이라는 그 식당의 주인 어른은
젊었을 적 한 미모하셨을 아주머니와 함께 그 식당을 꾸려오다
지금은 식당의 운영을 서울분에게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 짓고 있는 펜션은 두 분이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두 분은 짙은 어둠에 잠긴 대관령 옛길을 내려온 우리 두 사람을
자신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 앉혀주었으며 술까지 건네주셨다.
아주머니는 버스 시간에 늦지 않도록
우리들을 대관령 박물관까지 태워다 주셨다.
훈훈한 인정을 맛본다는 것은 여행의 또다른 매력이다.
두 분과 식당을 건네받아 운영하고 있는 아저씨에게 두루 고마울 뿐이다.
(사진에서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는 분과 맨오른쪽 분이 두 내외분이다.)
5 thoughts on “숲으로 사라져 초원을 만나다 – 평창 선자령”
아직도 정겨움이 살아있는 산사람들… 참으로 고맙지.
배고픈 나그네를 위해 기꺼이 수저를 내놓으시고 술도 권하시니…
여행의 즐거움이 이런 것이 아닐까…
나 설악산 가고 시퍼~~
다음 주에 가자.
좋은 전등하나 사고 천천히 산넘으면 되겠지 뭐.
명절 잘 보내셨어요?^^
지금도 보름달이 이쁘게 떴어요.
혹 보름달 사진이 올라오지 않았을까 여기먼저 왔는데.^^
식당이름도 멋지네요. 옛길 만나거든..^^
저도 대관령가면 꼭 거기서 먹어봐야겠어요.
가을소리님도 추석 잘 보내셨지요.
제가 먼저 댓글 봐서 인사드려요.
보름달보면서 소원빌어보세요. 멋진 일이 생길거예요^^
올해는 보름달 사진 안찍었어요.
오늘은 나의 그녀랑 근처의 남한산성에 다녀왔죠.
보름달은 내려오면서 그냥 눈에만 담아두었어요.
이번 추석에는 그냥 설겆이 두번으로 통통이를 도왔죠.
그래도 평상시와는 달리 상당히 양이 많던데요.
중요한 것은 어머니도 예전과 달리 그다지 언짢아 하시지 않았다는 것.
통통이는 설겆이가 그냥 설겆이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어가는 중요한 힘같이 느껴진다고 하더군요.
가을소리님도 좋은 추석이었죠? 세상은 조금씩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