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초승달 아래서 만나기로 하자.
몸이 무거워 더 이상 하늘에 떠 있을 수 없게 된
그 육중한 콘크리트 밑에서 만나기로 하자.
나는 왜 초승달이 하얗게 빛나지 않냐고
탓하지 않을 생각이다.
멀리 있을 때
밤하늘에서 하얗게 빛나던 그 달이
실제로는 태양빛을 분칠처럼 얼굴에 발랐을 뿐
사실은 먼지와 바위 투성이의
푸석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민낯의 얼굴을 사진으로 적나라하게 본 적도 있다.
초승달의 민낯에 관한 얘기는 더더욱 충격적이다.
그 유려한 곡선의 얼굴 윤곽이 사실은
분칠할 태양빛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건 화장을 하다만 얼굴이었다.
눈한쪽만 화장한 얼굴을 상상해보라.
당장 하루 종일 사람들의 킥킥대는 웃음에 시달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민낯의 달은 부식되기 쉽다.
건조한 공기에 약하고
따가운 햇볕 아래선 금방 얼굴이 탄다.
비는 얼룩으로 번진다.
그 초승달이 무거운 몸을 이 지상으로 내리면서
붉게 화장을 한 이유이다.
그나마 그래서 붉은 초승달은 봐줄만 했다.
우리는 그 붉은 초승달 아래서 만나기로 하자.
그 붉은 초승달 아래선
어느 누구도 하얀 얼굴의 초승달을
가까이 가면 분칠을 벗겨내며
우리들을 배신할 얼굴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붉은 초승달 아래 서면
우리는 지상으로 추락한 육중한 무게의 초승달이
붉게 화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멀리 있을 때
하얀 분칠로 우리의 마음을 앗아가고 싶었던
그 마음에 대해서도 동시에 머리를 끄덕인다.
그래서 붉은 초승달 아래선 배신이란 없다.
그러니 우리는 붉은 초승달 아래서 만나자.
그 아래서 만나
하얗게 분칠한 네 얼굴과
푸석푸석한 민낯,
그 민낯을 가리려 두껍게 바르는 화장 사이를 오가며
평생을 배신없이 살자꾸나.
2 thoughts on “붉은 초승달”
스타치올리가 작품명을 이렇게 바꾸고,
작품 해제도 이걸 갖다 썼으면 좋았겠네요.^^
올림픽공원 조각 중에 제일 크지 않을까 싶어요.
매번 갈 때마다 찍긴 하는데
별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질 못하겠더라구요.
이 날은 하늘빛도 좋고 구름도 협조를 해서
드디어 만족스런 사진을 얻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