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으로 흘러내리는
완만한 산의 경사를 타고
나무들이 서 있다.
나무들은 경사를 무시하고
바로 머리맡의 하늘을 향하여
똑바로 자라는 삶을
고집하지 않는다.
비탈의 나무는 모두
경사면에 대하여 몸을 기울이고 서 있다.
나무의 기울어진 각도를 보면
거의 경사면에 대하여 수직이다.
그러니 내가 보기엔 경사면이었지만
나무에겐 그 경사면이 평지였을 것이다.
비탈은 경사의 완력을 갖고 있다.
경사의 완력은 우리에게서
중심의 안정성을 빼앗아간다.
때문에 비탈에서 우리는
몸의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
한쪽 다리는 뻗고 한쪽 다리는 구부려야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다.
그 자세는 편한 자세가 아니다.
비탈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으려면
우리들은 많이 힘겹다.
비탈에서 잠깐의 순간이 아니라
생애 전체를 살아야 했던 나무는
그런 방법으로 비탈을 견디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나무는 비탈을 살기 보다
비탈을 평지로 만들 방법을 궁리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그 방법은 비탈에 맞추어
수직으로 몸을 기울이는 방법이었다.
그 방법으로 나무는 모든 비탈을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
나무들은 결코 비탈에 서 있지 않다.
경사진 평지.. 그곳에서 나무들이 산다.
6 thoughts on “나무와 비탈”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의 존재를 애정어린 눈길로 증언해 주시는 김동원 작가님!
올해도 열심히 사신 것처럼, 건강 지키시고 내년에도 좋은 작품 많이 올려주세요.
미국 광팬 올림.
다시 또 한해가 갔네요.
년말 년시 즐거움으로 가득하시길요.
그리고 관심과 응원 감사드려요. ^^
우리 기준에선 비탈이나 평지가 되지만, 나무들 생각은 차원이 조금 달랐던
모양이네요.^^ 그러고 보면 지동설도 갈릴레오보다 먼저 이땅의 나무들이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ㅋㅋ 함안까지 멀리 내려갔다 오셨네요.
아무 말이 없어서 그렇지 나무가 말을 할 수 있으면 많은 지혜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멀더군요. 가는데 꼬박 네 시간이 걸리더라구요.
역시 사진은 멀리가야 하는 구나 싶었습니다.
함안에서 남강을 따라 진주까지 가면서 사진찍고 싶더라구요.
사진이 수평선과 사선…두선의 만남이네요.^^.
강가에서 산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나무들이 비스듬히 서 있는게 신기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