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두 권의 시집을 동시에 읽을 예정이다. 하나는 강성은의 『단지 조금 이상한』이며, 또다른 하나는 김이듬의 『베를린, 달렘의 노래』이다. 각각의 시집을 따로 읽었다면 두 시집은 각자 다른 시 세상을 내게 펼쳐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집을 함께 읽을 때는 같은 세상이 다르게 펼쳐진다. 그것이 두 시집을 동시에 읽을 때의 즐거움이요, 재미이다. 하지만 두 시집을 그렇게 읽어가기 위해선 두 시집 사이를 일관되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해줄 하나의 맥락이 필요해진다. 그 맥락을 잡기 위해선 사전 답사가 필요하다. 나는 두 시집을 사전 답사했으며, 그 사전 답사에서 두 시집을 이어줄 하나의 맥락으로 부재의 존재학이란 말을 떠올렸다.
부재의 존재학이란 말은 쉽지가 않다. 금방 와 닿질 않는다. 나는 그것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부재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속담에서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그 중 한 속담은 안보면 멀어진다고 말한다. 부재가 존재를 지워버릴 것이라는 경고이다. 그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속담도 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는 속담이 그것이다. 그 속담은 함께 있을 때 지워져 있던 존재가 부재로 인해 오히려 그 존재를 드러낼 것임을 예고한다. 부재가 존재를 영원히 가슴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속담도 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속담이 그것이다. 이 경우엔 부재 때문에 존재가 영원한 아픔으로 새겨진다. 속담 속의 부재는 존재를 위협하기도 하고 존재를 강화하기도 한다.
시인에게 부재의 빈자리는 시의 텃밭이기도 하다. 시인들은 부재를 마주했을 때 부재를 시간에 맞겨 그 마모 작용으로 존재를 지워버리는 법이 없다. 겉으로 보면 부재는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빈터이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길러낸다. 그것의 가장 상투적인 예를 찾는다면 부재의 빈자리에 그리움의 씨앗을 뿌리고 그것을 배양하여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읽어야할 두 시집을 부재라는 맥락에서 살펴본다는 것은 이들 시집에서 접할 수 있는 부재의 양상과 그 부재가 만들어낸 특유의 시적 풍경을 살펴보는 여정이 될 것이다.
2
강성은의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은 「기일(忌日)」이란 제목의 시로 시작된다. 기일은 누군가가 죽은 날이며, 죽음은 어떤 존재의 영원한 부재이다. 죽음이란 부재로 자리가 비면 그 자리는 다시는 채워지지 않는다. 기일이란 우리들이 부재가 시작된 날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존재의 빈자리를 다시 채우는 날이다. 시간의 마모 작용으로 희미해져 가던 부재의 존재는 기일을 맞을 때마다 기억을 통하여 그 존재를 다시 새롭게 한다. 그런데 시인은 그 기일에 부재의 존재를 다시 기억해내기 보다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사라진 그 부재의 존재를 지우려 하고 있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강성은, 「기일(忌日)」 부분
죽음으로 지워진 부재의 존재는 기억으로 그 존재를 확보하지만 강성은이 바라보는 세상에선 존재에 대한 기억이 죽음이란 부재 앞에서 상당히 허약하다. 다시 말하여 죽으면 잊혀질 가능성이 크다. 부재가 존재를 지워버리는 순간이다. 그때 죽음이 가져온 존재의 부재를 강력하게 방어해주는 것이 “죽은 사람의 물건”이다. 물건은 그 사람의 기일이 되면 그 사람을 환기시킨다. 부재의 존재가 부재를 딛고 우리 곁에 계속 있을 수 있는 것은 그의 물건 덕택이다. 기억은 죽은 사람의 물건 속에 퇴적되어 화석처럼 굳어진다. 화석이 세월을 견디듯 물건 속에 퇴적된 기억도 굳건하게 세월을 견딘다. 그리하여 부재의 존재는 물건을 부여잡고 시간의 풍화를 막아낸다. 물건이 풍화를 견디는 한 부재의 존재도 부재를 극복한다. 우리는 죽어서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의 존재가 부여잡을 물건이 없을 때 비로소 부재한다. 부재의 존재가 물건을 부여잡고 존재를 확보하는 세상에선 산사람도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의 물건을 버리면 그때부터는 죽은 사람이 된다. 누군가 나의 물건을 버리면 그것은 곧 내가 버려지는 일이다. 이렇듯 사람의 물건이 그 사람의 부재 마저도 방어해 준다면 물건을 계속 갖고 있어야할 텐데, 시인은 그 사람을 기억해야할 기일에 오히려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며 마치 그 물건을 버릴 듯한 인상을 풍긴다. 아울러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며 나의 물건을 버림으로써 나를 버리게 될 사람들에 대해서도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
왜일까? 왜 강성은은 죽은 사람의 물건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버릴 듯한 인상을 풍기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한 한편으로 사실은 시인이 말한 기일의 그 죽은 사람이 누구일까가 더욱 궁금했다.
짐작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시인의 아버지로 추측했다. 시인에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아버지와 배드민턴을 쳤던 기억이다. “우리의 배드민턴 놀이는 셔틀콕의 비행은 슬로우모션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라켓을 높이 쳐든 아버지의 몸짓도 받으려는 나의 몸짓도 너무나 더디게 흘러갔다”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와 함께 했던 기억의 순간은 시인에게 매우 섬세하게 남았다. 그 기억 속의 시인은 “초등학교 시절의 하얀 체육복을 입은 여자아이”로 나온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다.
아버지에 대한 또다른 기억은 “아버지가 입던 양복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그 양복의 이름은 ‘런던포그’이다. 시인은 “아버지와 양복”이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고 전한다. 시인에게 그 아버지는 “고향이 없는 자가 그리워하는 고향”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강성은의 시 「여름 한때」는 아버지의 죽음과 얽힌 또다른 실마리를 제공한다. 시인은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있었”고 “그들은 내 부모였다”고 밝힌 뒤 “그들과 나는 소풍을 갔는데 햇빛이 눈부셨는데/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시인은 그날 “애써 웃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시를 읽으며 소풍갔다가 사고가 난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었다.
아울러 강성은의 시 「환상의 빛」 속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있다. 시인은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고 말한다.
어린 날에 겪은 아버지의 부재는 나이든 부모를 보낼 때와 많이 다를 수 있다. 나이든 부모는 세상을 떠도 자연스럽게 보낼 수가 있지만 어린 날엔 아버지를 잃으면 그 아버지를 보내지 못하고 부여잡게 된다. 혹시 그렇다면 강성은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를 아버지의 물건만으로 기억해야 했던 시절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부재의 존재를 물건에 새겨 기억해야 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너무 아버지의 물건에 심하게 경도되어 있다는 인식에 이른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시인은 이제 아버지를 보내야 한다는 인식에 이른 것은 아닐까. 그것이 바로 강성은의 시 「기일」을 읽으며 내가 가졌던 의문, 다시 말하여 기억해야할 날에 왜 기억을 담보할 물건을 버리려고 하는 것일까에 대한 답이 아닐까.
강성은의 시 속에선 꿈 얘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 꿈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낯설다. 가령 시인은 “운전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고 “면허증도 없는”데 운전하는 꿈을 꾼다. 그때 “옆 좌석에 누군가 잠들어 있”다. 그런데 그가 “모르는 사람”이다. 아울러 시인은 악몽도 자주 꾼다.
꿈처럼 이율배반적인 현상도 없다. 꿈은 분명히 내 꿈인데도 내 뜻으로 채워지질 않는다. 시인의 뜻대로라면 꿈은 부재의 아버지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꿈은 그와 전혀 다른 악몽들로 채워진다. 시인은 자신의 꿈이 마치 “얼굴을 모르는 당신의 꿈속 같다”고 말한다.
꿈을 잠재의식의 한 양태로 이해를 한다면 강성은의 꿈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아버지라는 울타리없이 세상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면서 가지게 된 낯섬과 두려움이 불러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가 그의 꿈 속에서 세상을 낯설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이다. 그 세상은 나의 것이면서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다. 꿈 속에서 나는 존재하면서도 부재한다.
죽음은 어떤 존재의 부재를 가져온다. 그 부재는 아버지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아니라 때로 내가 버려졌다는 의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시 「구빈원」에서 강성은은 “아이들이 버려진다/노인들도 버려진다”로 시작하여 지구라는 “이 행성이 우주의 거대한 쓰레기장이”며 “악몽이라는 이름의 푸른 별”이라고 말한다. 내게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맞이한 죽음이 아니라 어떤 충격적인 죽음 앞에서 마치 남아있는 자들이 이 세상에 버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을 때의 결과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강성은은 부재가 그 부재를 감당해야할 존재에게 상당히 혹독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3
김이듬의 시집 『베를린, 달렘의 노래』는 시인이 “베를린 변두리의 작은 방”에 머물며 그곳의 “자유대학교 파견 작가로 석 달”을 살았던 기간의 시적 기록이다. 그 기간은 시인에겐 말하자면 공간적으로 한국이 부재하는 기간이다. 아울러 석달이란 측면에서 보면 영원한 부재가 아니라 단기간의 부재이다.
그 공간으로 날아가며 시인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꾼다.
날아오면서 잠이 들었죠 공중에 뜬 채 꿈을 꾼 거죠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책을 펼쳤는데 글자들이 다 흩어졌어요 벌레처럼 꿈틀거리던 내 시집의 활자들이 활짝 활짝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완벽하게 증발하는가 싶더니 검은 눈송이로 흩뿌려졌어요 속이 시원했어요 찬바람 부는 테겔공항에 내렸어요 봄 대낮에 출발했는데 겨울 어스름에 닿아 있네요 불안한 내 그림자가 어른거리다 저만치 휘발해가는 밤이에요
—김이듬, 「날아가는 꿈」 전문
시인의 시는 쓰여지고 나면 시인의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가 되면 시인에게 고착되어 떨어지질 않는다. 시인은 그 그림자가 ‘불안’하다고 했다. 아마도 처음에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그림자였으나 그림자가 생기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 그림자에 묶여 그림자 바깥으로 한발자국도 못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생겼을 것이다.
독일행은 그런 불안 앞에서 기대를 품게 만든다. “시집의 활자들이 활짝 활짝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완벽하게 증발”해 버리는 밤을 거치고 난 뒤, 다시 말하여 비록 내가 썼으나 지금은 나를 가두고 있는 시 세계를 버리고 난 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를 쓰는 것이 그것이다. 과연 시인의 희망대로 그 꿈은 이루어졌을까.
시인이 독일에 가서 가장 먼저 겪은 것은 놀랍게도 한국이 부재하는 그 공간에서 한국의 과잉이었다. 김이듬의 시 「게스트 하우스」에서 우리는 그가 독일에 도착했을 때 “집을 구할 때까지 게스트 하우스에 묵기로” 했었다는 얘기를 접한다. 시인은 자신이 묵은 게스트 하우스가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한국인 민박집이었”으며, “조식으로 나오는 한식이 일품”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주인 내외”는 물론이고 “주인 내외의 친구들과도 가족처럼” 친해졌다. 아마 독일이라는 낯선 이국땅에서도 편안했을 듯 싶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자 얼굴이 가려왔”고 증상은 더욱 악화되어 “사흘째 저녁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견딜 수 없이 가려”워졌다. 그리고는 “급기야 만면에 수포가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그곳을 나와 새 거처에서 “차갑고 마른 빵을 먹”어야 하는 외로운 처지가 되자 그 “발진이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일까. 보통은 반대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시인에게 왜 이런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시인은 이를 두고 그 익숙한 한국인 민박집이 “지나치게 따뜻했고 익숙했으며 공기 중에 너를 탈 나게 하는 미세한 감정이 있었나 보다”고 진단한다. 이국에서 만나는 한국은 한국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과잉이 되기 싶다. 가령 예를 들어 나는 통영으로 여행을 하는 중에 한 게스트 하우스에 묵은 적이 있다. 그 집에선 아침에 손님들에게 수프와 샌드위치 한 조각을 내놓았다. 전혀 한국적이지 않은 식사였지만 한국에서 무슨 이런 식사를 내놓냐고 트집을 잡거나 그 아침을 불편해한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혹시 독일에서 만난 한국인 민박집은 한국에서보다 더 한국적이지 않았을까. 마치 한국이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그러한 과잉은 때로 적응하기 어려운 감정적 반응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는 이국의 한국에서 한국에 있을 때의 편안함이 아니라 한국의 과잉에 접할 수 있다. 그게 불편하면 탈이 난다. 독일에서 김이듬의 첫 경험은 독일이 아니라 부재하는 한국의 과잉이었다.
독일에서의 두번째 경험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한국이 이상한 나라였나 하는 의구심을 품게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 경험은 묵을 방을 찾으면서 이루어졌다. 독일에 대한 김이듬의 인상중 하나는 “가난한 예술가를 존중한다/다소 우대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시아 여자”에다 “단기 체류자” 신분이었던 시인은 독일에서 보면 “경제적 보증이 낮아” 셋방을 얻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방을 내준 “겔링 부인”은 그가 “시인이라서 셋방을 준다고” 하면서 그것도 “딸이 쓰던 아끼던 방을” 내준다. 셋방을 내주는데 그치지 않고 “집안에서 흡연은 절대 금지지만/시인이라서 시인이니까/부엌 쪽문을 열고 조금 피우는 건 이해”하겠다고 나온다. 김이듬은 그때의 경험을 “한 번도 경험 못한 시인이라서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선 예술가에 대한 과잉 대접이라 느끼기에 충분한 그 경험 앞에서 내가 “여태껏 이상한 나라에서 살다 온 것일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부재의 나라는 그곳에 있지도 않으면서 이상한 나라로 뒤바뀐다.
그 다음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두 나라의 비교이다. 무엇을 보든 비교를 하게 되는 그 시각이 스스로에게도 낯설었는지 시인은 “언제든 비교하는 내 안의 이방인, 너를 데리고 다니기가 버겁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비교는 둘을 나란히 놓고 함께 보는 것이다. 부재의 한국이 독일에선 시인이 가는 곳마다 독일 풍경의 옆으로 나란히 선다. 이러한 비교는 처음에 시인에게 발진을 가져왔던 한국의 과잉쪽으로 시인 스스로를 기울어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시인은 독일의 풍경 앞에서 자꾸만 한국으로 건너온다. 가령 “밤 열 시가 넘어서야 해가” 지는 그곳 특유의 백야 앞에서 훤한 지하도를 건너며 백야 현상에 모든 시선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거긴 새벽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거긴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또 “초호화 카데베 백화점에서 크로스백을 샀”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 가방은 시인을 몇 년 전의 한국으로 거슬러 오르게 만든다. “한눈에 반한, 멋지다고 느낀 이 가방은/몇 년 전까지 들고 다니던 가방/부산 지하도에서 소매치기가 칼집 만들었던” 가방과 비슷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한국을 떠나 “멀리 베를린까지 와서 나는/비슷한 한 패턴으로 살고 있다/만날 머쓱한 순간이 온다”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한국을 떠나 그가 발견한 것은 독일이 아니라 이제는 부제의 공간이 되어버린 한국이고, 한국에 있을 때 인식되지 않았던 그의 취향이 한국의 부재로 인하여 부각이 된다.
부재의 한국이 가장 크게 강화되는 경험은 결국 음식, 그 중에서도 김치이다. 시인은 “며칠 벼르다가 멀리 알렉산더플라츠까지 가서 김치를 사왔다”고 말한다. 문제는 “봉지를 뜯다가 천지사방 다 튀었다”는 것이다. 그는 벽을 물들인 김치 얼룩을 두고 “사방팔방으로 한국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 얼룩을 지우기 위해 “여기 이주해서 사는 한국인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방법을” 물었더니 할머니는 “이 우주는 통틀어 김치 국물 얼룩을 지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장담”을 한다. 시인은 이를 「김치 파워」라 이름 붙인다. 한국은 독일에 가면 부재의 공간이 되지만 시인이 확인한 것은 이국에서도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는 한국이었다.
4
나는 강성은과 김이듬, 두 시인의 시집을 무엇인가의 부재에 초점을 맞추어 읽었다.
강성은의 시에서 내가 본 것은 존재의 부재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어린 시절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한 존재의 부재는 아버지 없이 부딪쳐야 하는 세상을 낯설고 두렵게 만들었고, 그 경험은 시인에게 악몽을 몰고 온다. 시인은 존재를 지워버리려는 그 부재를 아버지의 물건이 갖고 있는 힘으로 넘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제 물건으로 부여잡은 그 부재의 존재를 보내주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여전히 죽음이 누군가를 보내는 일이 아니라 남은 자가 버림받은 것이란 의식을 갖고 있긴 하지만 시인은 그 낯선 세계를 꿈속의 악몽으로 미뤄두지 않고 그 세계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 “철새를 타고 먼 나라들을 여행하고 싶다”는 시인의 뜻은 그 낯선 나라와의 대면이 될 것이며, 여행이 끝나고 나면 세상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마음만 먹고 있을 뿐 시인은 아직 여행을 떠나지 않고 있다.
김이듬의 시에서 나는 독일이라는 한국의 부재 공간에서 그러한 공간적 부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다양한 양태로 살펴볼 수 있었다. 처음에 그 부재는 한국이 공간적으로 부재하는 곳에서 오히려 한국의 과잉으로 나타났다가 그 다음에는 한국이 결핍하고 있는 요소를 통하여 한국을 낯설게 만들었다. 아울러 비교를 통하여 독일의 어디에서나 출몰하다가 결국은 부재의 한국이 독일에서 더욱 강화되기에 이른다. 때문에 시인은 독일에서의 경험을 『베를린, 달렘의 노래』라는 제목 아래 모아두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베를린, 달렘에서 부른 한국의 노래에 가까워 보였다.
시인에게 부재는 없다가 아니다. 시인은 부재로부터 존재를 길어올려 시를 짓는다. 두 시인에게서 그 양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었다.
(『포지션(Position)』, 2013년 겨울호)
**이 글의 대상 시집은 다음과 같다
─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문학과지성사, 2013
─김이듬, 『베를린, 달렘의 노래』, 서정시학, 2013
2 thoughts on “부재의 존재학 — 강성은의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과 김이듬의 시집 『베를린, 달렘의 노래』”
제목과 시인들 이름을 보면서 여성 시인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이들의 시 세계엔 아랑곳하지 않고 단서를 찾았는데, 편한 답을 주셨네요.^^
그리 어렵게 읽히지 않는 이런 평론은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평론을 실으신 잡지 이름도 제목에 영향을 주진 않았나요?ㅋㅋ
그게 포지션이란 말이 어떻게 보면 좀 거시기하지만 각자 입장으로 쓰라는 뜻으로 그리 정했겠지 싶어서 저는 제 입장에서 썼지요. ㅋㅋ
사실 시를 시인의 개인사와 묶기 보다 텍스트에만 집중하는 편인데 요즘은 자꾸 개인사를 들춰가며 시를 읽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방법은 아닌데 사람들은 재미나 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