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돗물과 탈출

Photo by Kim Dong Won
2014년 5월 5일 우리 집에서

물은 수도꼭지 뒤에 갇혀 있었다. 강줄기를 따라 흐르던 물을 꼬드긴 것은 혼탁해진 몸을 깨끗이 씻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유혹에 넘어간 물들은 정수장이란 곳으로 보내졌다. 물은 정수장에서 며칠을 기다리며 코를 찌르는 약품 냄새를 참은 끝에 말끔한 몸을 얻었지만 강으로 돌려보내지진 않았다. 물은 이제 갇힌 몸이었다. 정수장에서 가리키는 대로 등을 떠밀릴 수밖에 없었다. 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좁은 관이었다. 등을 미는 힘은 너무 강해 어떤 물도 강으로 돌아갈 역류의 꿈을 꿀 수 없었다. 물들의 사이엔 이미 풍문이 돌고 있었다. 이 관의 끝에 다다르면 탈출의 문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물들은 좁은 관을 통해 며칠을 기어간 끝에 단단하게 막힌 벽 앞에 도달했다. 막다른 벽 앞에서 숨죽인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관 속으로 몸을 들이밀 때 물들은 들었다. 가끔 어둠 속의 그 벽이 느닷없이 열릴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오래도록 기어온 작은 관의 어둠은 이제 물의 몸에 까맣게 배어 벽이 열린다고 해도 투명보다는 까만 어둠으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벽이 느닷없이 열렸을 때 물들은 걷잡을 수 없이 세상으로 뛰쳐나갔다. 모든 물들이 꿈꾼 것은 유혹에 넘어갔던 그들의 강이었으나 물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좁은 세면대의 작은 공간이었다. 그것은 탈출이 아니라 탈출을 위한 기나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다시 강으로 가는 길은 길고 멀었다. 그러나 물은 엉망진창으로 망가지는 몸으로도 그 길을 멈출 수 없었다. 강으로 돌아가는 것은 숙명에 가까운 물의 본능이었다. 세면대로 쏟아져 나와 잠깐의 탈출을 환호하던 물들이 또다른 긴 여정에 들어가고 있었다. 갇혀서 얻는 1급수의 몸을 내놓고 흐리고 탁하더라도 자유롭던 강줄기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6 thoughts on “수돗물과 탈출

  1. 여튼 선생님의 시선과 의미의 발견은 아주 아주~~놀랍습니다….
    거의 천재성을 만나게 된듯한데요~~~

    정말로 이런건 흔하게 만나 읽을 수 없는….

    매일 아침마다 수도꼭지 틀어 씻기만 했지 이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감사하구요~

    1. 아이구, 이건 아무 것도 아니죠. 이현승이란 시인은 목욕탕에서 샤워하다 넘어진 뒤에 나와선 넘어졌다고 말하질 않고 “추락을 촘촘하게 몸에 새”겼다고 말했는데요, 뭘. 사실 시인들의 시엔 정말 놀라운 장면들이 많아요. 끓는 라면에서 좌우의 대립을 본 시인도 있었어요. 언젠가 일상의 시적 재구성이란 주제로 책하나 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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