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지각의 속박, 그 너머의 세상 – 박지웅과 서화성, 안효희, 전명숙의 신작시

시와사상 2014년 여름호
신작시 특집

1
느낌과 실상은 다를 때가 많다. 느낌은 우리들 감각의 몫이다. 하지만 감각의 인지력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확장하여 실상에 좀더 다가선 것은 과학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으며 공전의 속도가 평균 초속 30km라고 말한다. 지구가 초음속 비행기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밝히고 일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움직임은 우리들에게 감지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감지력이 우리를 속일 때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일출과 일몰이다. 우리의 눈엔 아침마다 동쪽에서 해가 솟고 저녁이면 서쪽으로 진다. 그러나 과학은 실제로는 해가 돋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회전축을 중심으로 지구가 하루에 한바퀴씩 스스로 돌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감각이 우리를 속이는 일은 깜깜한 밤에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똑같이 일어난다. 우리의 눈에는 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우리에게 그것은 바로 눈앞의 현재이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가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사실은 과거라고 말한다. 빛이 별을 떠나 우리 지구에 도달하는데 수백 년이 걸릴 때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보는 별이 수백 년 전의 빛이란 것이다. 우리는 아득한 과거를 현재와 혼동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과학이 인식의 지평을 크게 확대해준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보고 들으며 느낄 수밖에 없는 감각의 한계 내에서 살고 있다. 과학자들은 그 감각의 한계 내에 안주하지 않고 과학이란 방법으로 그 한계를 넘어간 사람들이다. 감각의 한계 내에 안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보면 시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시인들도 감각의 한계 내에서 살고 있지만 감각의 포로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에겐 모두 우리를 묶고 있는 감각의 속박을 풀고 그 너머로 건너가고 싶은 욕망이 있다. 시인들은 여전히 일상적 감각의 한계 내에서 살면서도 그들만의 텍스트를 통하여 그 한계를 넘어가려 한다.
나는 박지웅과 서화성, 안효희, 그리고 전명숙의 시를 그들이 넘어서고자 했던 감각이나 인지력의 속박과 그들이 그 속박을 어떻게 넘어가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그들의 시를 들여다볼 생각이다.

2
우리는 모두 경험을 통하여 겨울 다음에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한 해라는 시간의 단위 속에서 체감할 수 있는 계절의 순환이다. 그러나 박지웅에게서 봄은 “하늘에서 땅을 발견”하는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인의 눈에 겨울은 ‘북풍’의 계절이다. 시인은 그 북풍이 계절이 끝나는 시기의 날씨를 기록한다. 아마도 그 며칠간 시인이 자리한 섬에 구름이 많았는가 보다. “섬 하늘에 구름은 쉴 새 없이 넘어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겐 쉼없이 흘러가고 있는 구름이 마치 “오래된 첫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듯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봄은 겨울의 뒤를 잇는 단순한 계절의 하나가 아니라 시작의 자리가 된다. 시인은 또 구름에게서 ‘순록’을 모습을 보았다. 먹이를 찾아 먼길을 이동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봄은 순록의 배를 채워줄 계절이다. 시인은 또 구름을 “상공에 요동치는 땅”으로 보았다. 그 땅이 지상으로 내려와 “순록 하나 꽃 한 조각으로 줄어드는 시간”이 바로 겨울의 막바지이다.
겨울의 막바지에 시인은 시간을 앞으로 돌려 ‘창세기’까지 가져가기에 이른다. 때문에 겨울의 막바지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곧 시인에겐 우주의 시작이다. 그 하늘에 “서서히 별들의 설계도가 그어지고/그 사이로 깊은 우주의 강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이다. 우주가 새롭게 열리는 이 엄청난 현상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봄이다.

봄이 오고 있었다
—박지웅, 「극적인 구성」 부분

봄은 우리의 일상적 느낌 속에선 단순히 겨울의 뒤끝에서 맞게 되는 계절의 하나이다. 그러나 때로 봄은 누군가에게선 창세기로 돌아가서 새롭게 맞는 우주의 열림이 된다. 실제로 봄은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단순히 계절의 하나가 아니라 얼마든지 우주의 열림이 될 수 있다. 박지웅에게서 아쉬운 것은 그렇게 극적으로 구성된 봄이 어떤 경험에서 왔는지는 그의 시 「극적인 구성」을 읽는 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해명은 다른 시가 보여줄지도 모른다. 때로 어떤 시 한 편이 내비치는 아쉬움은 다른 시가 메꿔줄 때가 있다.
박지웅이 들려주는 또다른 얘기는 바람에 대한 얘기이다. “흑산도 바람”으로 아주 구체화되어 있는 그 바람의 느낌을 그는 바람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느낌인 강하고 시원하다나 많다를 버리고 “흑산도 바람은 호탕하다”거나 “흑산도는 바람으로 호의호식하는 섬이었다”는 방향으로 느낌을 달리한다. 시인에게 그러한 느낌의 바람은 처음에는 “섬이 베푸는 호의”였다. 그러나 바람이 태풍으로 바뀌면 바람은 이제 “바람의 고문”이 된다. 섬의 어부는 고문이 된 바람을 ‘고소’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모습을 옆에서 엿보았다. 아마 섬에 사는 “늙은 어부”가 이 놈의 바람, 모두다 잡아다 어디 유치장에라도 쳐넣고 싶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을 지도 모른다. 시인에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시로 들렸을 지도 모른다. 시가 된 말은 엄청난 힘을 갖는다. 그 옛날, 황진이는 동짓 섣달의 기나긴 밤을 시의 힘으로 뚝 잘라 두었다가 님오신 날에 펼 수 있었다. 그것이 시의 힘이다. 말이 시가 되면 바람도 사냥할 수 있다.

그는 바람을 잡아넣을 시를 짜기 시작했다
—박지웅, 「바람사냥」 부분

박지웅이 그의 시를 통하여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봄과 바람을 다른 차원으로 확대했다면 서화성은 자신의 일상을 시의 이름 아래 옮겨놓고 있다. 시 속에서 그가 서 있는 일상은 눈이 내린 어느 날의 새벽으로 시작된다. 눈이 왔으니 당연히 세상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화성의 감각은 그 세상의 느낌을 “삼십촉 가로등이 무색할 정도로 비탈길은 눈이 부셨다”고 감지해낸다. 또 눈이 왔으니 그 날 아침엔 차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마치 엉금엄금 기어가듯 조심스럽게 길을 갔을 것이다. 그 광경에 대한 느낌은 “눈길에 묶인 차들이 엉그정엉그정 아침을 배달하”고 있었다로 재편되어 있다. 차들이 속도를 내지 못하니 출근은 늦어졌을 것이다. 대개 사람들이 지켜야할 출근 시간은 9시이다. 그 시간에 출근을 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초조해진다. 그러나 시인은 사람들의 초조함을 적는 대신 이렇게 적었다.

어느새 도망치듯 9시는 달아나고
—서화성, 「새벽은 5시부터 분장한다」 부분

즉 시인에겐 막힌 길로 인하여 출근 시간을 지키지 못해 초조해진 아침이 아니라 출근 시간인 9시가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초조해진 직장인들의 마음을 내몰라라 도망쳐 버린 아침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막힌 거리를 용케 헤쳐 출근을 했나 보다. 좀 늦기는 한 것 같다. 시인이 “그냥 시계바늘을 따라 11시, 나는 살아 있다라고 쓴다”고 남긴 구절에선 그 늦은 출근과 그래도 출근은 했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만져진다. 그러나 아침의 출근길을 가로막았던 눈은 채 하루를 가지 못했다. 그가 “눈이 내렸던 지하철 6번 출구”에 선 “오후 3시”의 시인이 “줄지어선 발자국이 녹은 지 오래 전 일이었다”고 적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눈내린 날의 아침 출근길은 시의 세상에선 그 느낌이 전혀 다를 수 있다.
또다른 시 속의 서화성은 “토요일오후”의 거리를 걷는 듯 보이기도 하고, 집에서 “주말연속극”을 보고 있는 듯도 하다.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자신의 토요일 오후를 “버들가지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늘어지는 토요일 오후로 읽었다. 또 “소화불량이 된 거리”는 차량으로 심하게 막히고 있는 거리로 읽었다. 그가 거리를 걸으며 더듬은 옛기억 속에는 “기장읍 2층집”에서 먹었던 ‘팥빙수’가 있다. 팥빙수를 먹은 것은 12월이었다. 육천 원짜리 팥빙수를 천천히 녹여 먹으며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풍경은 이렇게 느낌을 달리하고 있다.

…육천 원짜리 팥빙수가 12월, 그 시간을 녹이곤 하였다…
—서화성, 「그날처럼」 부분

그러니까 나의 현실 속에선 사람들이 12월의 추운 겨울에 천천히 팥빙수를 녹여 먹으며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시인의 세상에선 육천 원짜리 팥빙수가 12월의 시간을 녹여주곤 한다. 즉 나의 세상에선 시간이 흐르면서 팥빙수가 녹는데 시인의 세상에선 팥빙수가 시간을 녹인다.
안효희가 마주한 세상에선 죽은 사람이 보인다. 그 사체는 무려 ‘7년’이나 된 사체이다. 죽음은 삶의 종말이다. 유골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인은 죽어서 7년이나 지난 뒤에 발견된 사체에 대해 그것이 “죽어서도 죽지 못한 7년은/신음처럼 내뱉은 가늘고 긴 고백”이라고 말한다. 시인의 세상에서 사체는 사체가 아니라 언어가 된다.

온몸으로 작성된 마지막 언어
—안효희, 「유언」 부분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지만 시인은 그 죽음의 너머로 건너간다. 사체가 뱉는 언어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시인은 사체가 몸으로 작성한 마지막 언어를 읽어내며, 그 언어에서 “거미줄처럼 곳곳에서 방치”된 ‘고독’을 읽어낸다. 그리고 시인이 그 고독을 읽어낼 때 우리는 몇 발자국만 나가면 이웃이 있는 세상에서 이웃들 사이에 고립되어 있던 삶을 본다. 우리는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는 듯 하지만 동시에 이웃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사체와 함께 안효희가 마주한 또다른 대상은 해체 수리 중인 “불국사 3층 석가탑”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해체되어 ““보륜2 동” “보륜3 서”라는/낯선 이름으로” 지상에 정리되어 있는 석가탑은 “신라 경덕왕 10년의/바위틈 소나무에 꽃피는 긴 사경”의 시작이다. 사경이란 경문을 베끼는 일이다. 신라의 경덕왕 10년은 석가탑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751년을 가리킨다. 석가탑은 그때부터 오랜 세월을 우리 곁에 있었다. 바위틈에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그 소나무에서 꽃이 필 정도로 오랜 세월이다. 그런데 수리를 위하여 해체되었을 때 그 세월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석가탑의 안쪽으로 내면화된 세월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내면화된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우리 곁에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그 시간이, 해체되었을 때 시인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다. 시인에겐 그래서 석가탑의 해체가 경문을 다시 베끼는 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인의 그 감각 속에서 해체된 석가탑이 내면화된 세월을 드러냈을 때 석가탑은 돌탑으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꿈틀대며 살아나기에 이른다. “사천왕이 커다란 말을 건네고/목어와 자하문의 용두도 펄럭이며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인에게 석가탑이 감내한 그 시간은 곧 햇살이다.

꽃무늬 새겨진 앙화와 복발에
흐르지 않는 시간, 햇살이 비쳤다
—안효희, 「햇살, 좌정」 부분

아마도 실제로 앙화와 복발 부분에 햇살이 비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엔 그 햇살이 햇살이라기보다 “흐르지 않는 시간”이다. 일상적으로 보면 그것은 해체된 석가탑의 부분이지만 시인의 감각 속에선 오랜 시간 석가탑에 축적된 시간의 자리이며, 그 자리에 고인 시간이 환하게 빛을 낼 때 그것이 햇살이 된다.
전명숙은 가죽에 대해 말한다. 가죽은 죽은 동물의 껍질이다. 그러나 가죽에 대한 그의 얘기는 전혀 다르게 시작된다.

담고 있는
내용물이 다를 뿐
가죽은 죽지 않는다
—전명숙, 「가죽」 부분

그의 눈엔 동물이 죽어서 남긴 껍질이 가죽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내용물을 담으려/이전의 살덩이를 버리려는” 음모에서 가죽의 삶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가죽에 대한 이러한 시각 속에선 우리들이 “가죽에 갇혀”있는 것이며, 우리의 삶은 “가죽을 늘리는데 골몰하는,/가죽의 본능에 충실하는” 삶일 뿐이다. 그의 시 속에선 가죽과 우리들의 관계가 정반대로 전도된다. 마치 태양과 지구의 관계가 지동설을 계기로 뒤집혔듯이. 그리고 혹시 이렇게 뒤집힌 가죽과 내용물의 전도된 세상이 실상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속은 텅비어 있는데도 껍데기로 서로의 눈을 현혹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가죽과 내용물을 뒤집어 놓은 시인의 발상은 우리 삶의 실상에 가까워지고 만다. 시인은 마치 내게 묻는 듯했다. 당신이 걸치고 있는 가죽은 어떤 ‘짐승’의 “머리를 떼어내고” 또 “심장을 떼어내고” 가져온 것인가요 라고.
가죽에 이어 전명숙이 마주한 것은 에스컬레이터이다. 전명숙이 “한 걸음도 걷지 않아도/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고 말을 했을 때만 해도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설명은 우리의 현실적 느낌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다음 얘기는 분위기를 조금 달리한다. 시인의 눈에는 이제 에스컬레이터의 운명이 포착된다. “수없이 헐떡여도/도달할 수 없는 정상이 있다”는 것이 에스컬레이터의 운명이다. 말을 바꾸면 에스컬레이트는 아무리 끊임없이 올라가도 정상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이쯤에 이르면 에스컬레이터는 슬그머니 정상에 대한 우리들의 욕망으로 환치가 된다. 가져도 가져도 채울 수 없는 욕망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들의 욕망이 되고 나면 “한 걸음도 걷지 않아도/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란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설명도 한 걸음도 걷지 않고 정상에 오르고 싶은 우리들의 욕망이 된다. 그 욕망이 에스컬레이터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결국 시인은 에스컬레이터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고 만다.

극복되지 않는 계단이 있다
마음대로 내려갈 수 없는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있다
—전명숙, 「에스컬레이터」 부분

우리는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이것이 과연 에스컬레이터일까. 혹시 “걸리면 씹어버리”며 “텅 빈 허기로/스스로 제 몸을 물고 들어가며” 제 몸을 파먹는, 그러면서도 정상에 대한 그 무한궤도의 움직임을 멈출 수 없는 에스컬레이터가 결국은 욕망의 포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현대인의 모습은 아닐까.

3
정리를 해보면 박지웅은 그의 시속에서 계절의 순환에 불과했던 봄을 통하여 우리들을 창세기로 데려다주었으며, 그의 시 속에선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바람이 시라는 그물망에 잡힐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얻을 수 있었다. 서화성의 경우에는 눈내린 날의 하루나 어느 토요일 오후의 산책과 집안에서 보낸 평범한 시간이 시의 풍경으로 전환되었다. 안효희는 오래된 죽은 사체가 몸으로 남긴 유언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으며 해체된 석가탑 속에서 드러난 시간이 햇살로 반짝이는 풍경을 보여주었다. 전명숙의 시 속에선 가죽과 그 가죽을 남긴 동물의 관계가 정반대로 뒤집어지고 에스컬레이터는 욕망 앞에서 스스로를 주체못하는 우리들의 다른 이름이 되고 있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면서 세상을 지각하는 한편으로 보고 듣고 느끼면서 우리의 감각과 인지력이 가져다준 세상에 갇힌다. 과학은 우리들이 그 감각의 한계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과학이 말하는 세상을 감지하며 살아가지는 못한다. 과학이 아무리 지구가 자전하고 있는 것이지 해가 뜨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눈앞에선 여전히 해가 뜨거나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우리들이 갇혀 있는 감각의 세상에서 해방되어 또다른 세상을 살고 싶어한다. 시는 바로 그때 우리들이 우리들 감각의 한계 내에서 세상을 달리 보고 느끼면서 감각이라는 우리의 한계 내에서 살면서도 우리의 세상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시가 한편 씌어질 때마다 우리의 감각 한계 내에 갇혀 있던 세상이 그 한계를 넘어 끊임없이 확장된다. 네 명의 시인이 또 그렇게 세상을 확장하여 인식의 지평을 넓혀놓고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세상을 좀더 넓고 깊게 볼 수 있었다. 내겐 그게 시의 미덕이었다.
(『시와사상』, 201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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