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한테 이름을 물었다. 여자는 “메이라고 부르면 돼”라고 답했다. 메이가 여자의 이름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보통 이런 경우, 이름에 대한 물음을 메이라는 답으로 들으면, 5월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그 순서를 따라갔다면 나는 그럼 5월생이야? 하고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이름이 나를 데려간 곳은 내 기억의 저장소였고, 메이라는 이름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오래 전의 기억 속에서 그 이름의 실마리를 뒤졌다. 그러자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오래 전에 나온 소설책 한 권이었다. 나는 그 소설 속에서 그 이름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말했다. “아, 나 그 이름 아는데.” 그리고는 그 이름이 오래 전에 읽은 한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고 말해주었다. 당연히 여자가 어떤 소설이었냐고 물었고, 나는 그 소설 제목이 『클럽 정크』였다고 답해주었다. 여자가 사서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너무 오래 전의 소설이라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 말했다. 여자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뒤적였다. 요즘은 그런 시절이다. 핸드폰으로 모든 것을 찾고 모든 것을 산다.
조금 뒤 여자가 핸드폰 화면을 뒤집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있는데?” 곧바로 주문을 하더니 집에 오면 읽어볼께라는 말을 추가했다. 나는 그 소설 뒤의 해설은 내가 쓴 거야하고 여자의 말에 곧바로 내 말을 덧붙여 이어놓았다. 빠른 속도로 말을 덧붙이자, 누구의 말이 누구의 말인지 혼동이 오기 시작했다. 서로의 말을 서로의 말에 뒤섞으며 둘이 빠른 속도로 얘기를 이어갔다.
여자와 나는 신상정보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학번을 말했고, 이어 여자가 곧바로 자신의 학번을 말해주었지만 나는 그것을 그녀가 태어난 해로 오인을 했다. 내가 년도를 다시 확인하며 뭐, 몇년생?하고 되물었다. 몇년생?을 되묻는 내 말은 내 입이 아니라 놀라서 동그랗게 확대된 내 동공에서 튀어나왔다. 여자가 웃으며 태어난 해가 아니고 학번이라고 그 수치의 실체를 정리해 주었다.
여자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하나 있으며, 아들이라고 밝혔고, 나는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둔 딸이 하나있다는 정보를 그 정보와 맞바꾸었다. 내가 건넨 정보에는 딸이 몇 학년인지를 알려주는 정보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주고 받은 정보의 불균형을 눈치챈 여자가 그녀의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정보의 내역을 보완해주며 균형을 맞추었다.
왜 우리가 서로의 신상을 털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처음 만나면 신상을 주고 받는 것이 꽤 유용한 재미였다. 나도 그게 재미났다. 우리는 이것저것 서로의 신상을 맞바꾸며, 그것을 기반으로 둘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사실들을 여러 가지 알아냈다. 그 사실 가운데 하나는 여자와 나의 나이 차이가 13살이란 것이었다. 나이 차이를 계산한 여자가 앞으로 쭈욱 반말써도 된다고 했다. 나는 말을 반만하는데도 서로 얘기를 알아듣는 거 보면 신기하지 않냐고 했다. 여자가 킥킥대고 웃으면서 너무 말이 정중하면 자신은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알레르기 질환이 있다고 했다.
집에 와서 책꽂이의 그 소설을 꺼냈다. 나는 그나 그녀, 혹은 그 사내, 그 남자, 그 여자로 지칭된 사람들 사이에서 메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를 찾아 여기저기 책을 뒤졌다. 메이는 없었다. 대신 레이가 있었다.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났을 때 얘기한 메이가 알고 보니 레이였다고 했다. 여자가 말했다. “이런, 손들고 벌서.” 그 순간, 귓가에 벌소리가 윙윙거렸다. 나는 벌서는 것은 좋은데 자꾸 귓가로 벌들이 날아드는 것 같다고 했더니, 여자가 벌에 관한한 물러나 주겠다고 했다. 나는 손을 들어올리지 않았다. 더 이상 벌들도 가까이 오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레이는 생각도 못하고 메이만 기억에 남겨두었다. 나는 여자에게 내 기억에 남아있는 메이가 누구인지 알아봐야 겠다고 말했다. 어느 날 만난 누군가가 이름이 뭐냐고 물었을 때 메이라고 하자, 나는 마치 아주 잘 안다는 듯이 내 기억 속에서 메이를 불러내 나도 메이를 안다며 내 기억 속의 메이를 눈앞의 메이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기억 속의 메이는 모르는 여자였다.
내가 소설책을 뒤지자 소설책을 집삼아 살고 있던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나를 내다보았다.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혹시 여기 메이라고 없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자신은 레이라고 했다. 메이가 여기 소설책 속에 산 적이 없나요라고 다시 묻자, 레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기억 속에서 호출된 메이는 누구였을까. 나는 심지어 그 이름자만이 아니라 메이라는 어감이 불러일으키는 그 여자의 이목구미까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젊고 예쁜 여자였으며, 보기만 해도 이빨이 시큰거리는 여자였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선명하게 불러낼 수 있는 여자였지만 인연의 실마리는 쉽게 찾아지질 않았다. 왜 하필 20년전에 알았던 여자라고 생각했는지 그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가끔 여자가 이름과 함께 기억 속에 남는다. 메이도 그렇다. 그러나 메이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2 thoughts on “메이의 기억”
이거 초현실주의 장편(掌篇)소설인가요?^^
장르 하나 개척해 보려구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