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1월 11일 토요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활공동체인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전북 김제의 금산사로 가을 나들이를 다녀왔다.
나눔의 집 원장이자 금산사 주지인 원행스님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나들이었다.
후원자들이 함께 했고, 가까운 곳의 동네분들도 와주었다.
할머니들의 금산사 구경길을 사진으로 스케치했다.
(나눔의 집 홈페이지: http://www.nanum.org
또는 http://www.cybernanum.org
나눔의 집 후원 및 자원봉사 문의 전화: 031-768-0064)
김순옥 할머니.
출발하기 전, 벌써 할머니의 얼굴엔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할머니는 소풍가는 어린 아이가 되었다.
금산사 주지인 원행스님은
점심 약속이 되어 있는 전주의 톨게이트까지
몸소 마중을 나와주었다.
버스에 올라와 할머니들과 반갑게 인사나누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을 전주의 한 음식점으로 안내해 주었다.
점심은 전주 비빔밥이었다.
비빔밥은 따로따로이던 맛을 하나로 섞어
또다른 맛을 만들어낸다.
사람과 사람이 섞여 하나의 길을 가면
그때부터 함께가는 그 길은 맛이 남다르다.
할머니들의 길에 함께 한 사람들에게
이날 하루의 나들이길은 비빔밥만큼이나 맛있는 길이다.
점심을 먹고 금산사로 가기 전에
전주은혜마을 효경원에 들렀다.
노인들을 위한 요양원이다.
그곳엔 나눔의 집에 있다가
조카가 사는 곳에서 가깝다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긴
한도순 할머니가 있다.
지나는 길이어서 할머니를 보기 위해 잠시 그곳에서 버스를 세웠다.
그러나 지난 해 8월 그곳으로 옮겨가신 할머니의 눈에선
사람들의 얼굴에 대한 기억이 지워져 있었고,
할머니의 입은 굳게 닫힌 채 말이 없었다.
일본군에게 말못할 치욕을 강요당한 뒤
할머니가 가장 먼저 잃어버린 것은 말이었다.
할머니는 한동안 그 말을 되찾지 못했다.
그러다 할머니는 “일본은 과거를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소치리며
잃었던 말을 되찾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말을 다시 잃어버리고 있었다.
요양원 시설은 편하고 깨끗했지만
같은 아픔을 함께 나누며 같이 지냈던 할머니들과 떨어지면서
할머니가 겪게 된 외로움이 더 컸나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 말을 앗아갔나 보다.
어찌보면 할머니는 할머니들과 함께 소리침으로써
말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말을 잃은 사람도 함께 소리치면 말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함께 소리쳐 할머니의 말을 다시 찾아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라!”
다시 그렇게 외치고 그 외침 속에서 할머니의 말을 찾아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나야, 나, 옥선이. 나 못알아보간디.”
“할매, 나 못알아 보겠어요. 저보고 매일 시님이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한도순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가운데가 한도순 할머니, 왼쪽은 이옥선 할머니,
오른쪽은 강일출 할머니, 정면 뒷모습은 승연스님,
휠체어를 잡고 있는 뒷쪽 분은 김강원 변호사이다.)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훔쳤으며,
나눔의 집 원종선 간호사도 흐르는 눈물을 피해가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를 물었을 때
그래도 할머니가 입을 모아 말을 한마디했으며,
그것은 “간호사”란 말이었다.
그나마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간호사는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목소리가 아니라
오물거리는 입모양으로 겨우 그려낸 말이었다.
원종선 간호사는 지난해 8월 이곳으로 떠날 때만 해도
관절염으로 고생은 하셨지만 그래도 걸어다니셨다며
말을 잃어버린 할머니의 모습에 또 다시 눈물을 훔쳤다.
이옥선 할머니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함께 있어야 했다며 할머니를 떠나보낸 지난 해를 후회했다.
“할머니, 우리가 다시 올께.
그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나눔의 집 부원장 승연스님이 할머니 귓가에 대고 속삭였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말씀이 없었다.
가까이 있으면 매일 아침 말이라도 붙여볼 수 있겠지만
이제는 이렇게 가끔 찾아보는 것밖에 달리 해줄 수 있는게 없다.
승연스님은 그게 제일 아쉽다.
승연스님은 할머니의 눈 속에 그 모습이라도 남겨놓으려는 듯 눈을 맞추고
한동안 그 시선을 떼지않고 있었다.
한도순 할머니에게 들리면서 나들이길이 눈물길이 되었지만
정해진 일정을 어쩔 수가 없어 곧 금산사로 향했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들을 위해
금산사에선 절까지 버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동네 사는 철민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김순옥 할머니의 발걸음이
다시 소풍온 어린이의 즐거움을 되찾고 있었다.
김군자 할머니와 이옥선 할머니가 나란히 함께 절을 돌아본다.
함께 길을 간다는 것, 동행!
그 동행의 힘이란 얼마나 큰 것인가.
그 동행의 걸음이 둘만되어도
벌써 두 사람에게선 힘이 솟고 따뜻한 온기가 풍긴다.
할머니들의 길엔 할머니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길엔 또 함께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젊은이들이 있어 그 동행의 길은 힘과 패기를 얻는다.
이 날의 길엔 중앙대 사진학과 학생 두 명과
그들의 여자 친구들이 함께 해주었다.
또 장새론여름 학생도 빼놓을 수가 없다.
이날 중앙대 사진학과 3학년인 전제홍 학생은
김순옥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할머니의 젊은 연인이 되어 주었다.
할머니는 날아갈듯 기분이 좋았다.
금산사에선 따뜻한 방을 마련하여
할머니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박옥련 할머니와 문필기 할머니가 따뜻한 방에서
잠시간의 휴식을 즐기고 계시다.
김군자 할머니의 지팡이는 방안으로 들지는 못하고
문간에 기대어 휴식을 즐겼다.
금산사에선 따뜻한 방만이 아니라 다과도 함께 내주었다.
절을 돌아본 즐거움도 컸지만
이렇게 방에 앉아 절에서 내준 음식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며 나누는 대화의 즐거움도 크다.
절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오늘의 길엔 동네분들과 후원자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함께 해 주었다.
말을 잃어버린 한도순 할머니의 오늘은 슬펐지만
사람들의 동행으로 인하여 한편으로 오늘의 길은 훈훈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 슬픔과 훈훈함이 교차되고 있었다.
6 thoughts on “가을 나들이가 눈물길이 되다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김제 금산사 나들이”
이렇게 글이랑 사진만봐도 목이 메이는데 실제로 보고 듣고하면 정말 참을수 없겠어요.
김동원님도 많이 우셨죠?
어제 남편이랑 한반도를 보면서도 많은 생각에 잠겼었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 울었죠, 뭐.
어찌나 안됐는지…
기념관 짓는다고 야단인데 그것보다는 요양원 지어서 할머니들이 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는게 우선이란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할머니들은 떨어져 홀로 지내면 안될 거 같아요.
장새론여름이란 이름이 넘 예쁘다…^^
할머니를 만난지 한 계절이 지나서 그런가.. 할머니….만 해도 눈물나던게 이제 좀 괜찮네…
이제 밝게 웃으면서 할머니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어.
그렇지만 이번에는 너무 슬프더라.
황금주 할머니라고 있는데 그 할머니도 나눔의 집에 있다가 부산으로 딸을 따라 내려갔다는게 걱정도 되고…
몇달던 나한테 전화번호 적어주며 인터뷰하러 와도 된다고 했던 할머닌데…
장새론여름은 이름이 너무 길어서 여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새롬으로 부르기도 하고…
무지 예쁜 대학생이야.
마지막 사진에서 V자하고 있는 한가운데의 대학생이 바로 그 주인공!
그러게.. 할머니들을 너무 자주 만나면 슬퍼지는 것 같어.
나는 만난지 꽤 지나서 그런가… 가슴이 이제 좀 덜 아파.
할머니들은 상처가 많아서 그런지 가슴아픈게 넘 오래가니까 좀 힘들더라구.
나같은 사람은 그냥 멀리서 응원하는게 젤로 좋은 것 같어.
그래도 낯익은 얼굴이 찾아오면 얼마나 좋아하는데.
봉사를 하려면 자주 찾아가서 낯을 익혀야 하는 거 같아.
나도 이제는 낯이 익어서 상당히 반겨줘.
먹을 때 얼마나 챙겨준다고.
어쨌거나 할머니들이 함께 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나라에서 신경좀 써줬으면 좋겠다.
가족들도 할머니들 데려갈 생각은 안했으면 좋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