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가리 씨앗의 잠

Photo by Kim Dong Won
2006년 12월 31일 미사리 한강변에서
(박주가리 씨앗)

대개 씨앗은 열매의 한가운데 있기 마련입니다.
사과만 해도 그렇죠.
그 맛있는 육즙의 한가운데 사과 씨앗이 있습니다.
사과의 씨앗은 그 상큼한 사과향의 한가운데 묻혀 잠을 자고 있는 것이겠죠.
사과향 속에 묻힌 잠이라고 생각하니 그 잠이 부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잠을 깨우는 우리들을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이 금방 달아나 버립니다.
우리들이 사과를 갉아먹는 사각사각 소리가 바로 그 씨앗의 잠을 깨울테니까요.
잠에서 깨면 아마도 우리들은 그 씨앗을 어디론가 버려버리겠지요.
깨면서 버림받는 운명이라니, 참, 사과 씨앗의 운명도 좀 그렇습니다.
오, 나는 아무리 상큼한 향으로 감싸준다고 해도
사각대는 이빨 소리에 잠이 깨는 그런 운명은 싫습니다.

한해의 마지막날
그녀와 함께 미사리 한강변에 나갔다가 박주가리를 보았습니다.
박주가리의 씨앗은 사과의 씨앗과는 그 운명이 전혀 다릅니다.
박주가리의 씨앗도 열매 속에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열매가 다 익으면 씨앗을 둘러싼 껍질이 씨앗의 방이 되어 줍니다.
씨앗들은 껍질로 바깥을 감싼 하얀 방에 모여 모두 함께 잠을 잡니다.
그 잠은 아주 곤해서 가을을 지나 겨울까지 이어집니다.
아니, 어떤 때는 봄까지 이어지기도 하지요.
그렇게 잠을 자다 보면
종종 바람이 지나가다가 방문을 흔들며 좀 일어나 보라고 보채곤 합니다.
또 따뜻한 햇볕이 조용히 방문을 두드릴 때도 많지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방문이 열리고 햇볕이 방안까지 들어옵니다.
얼마나 눈이 부시겠어요.
열린 방문의 틈새로 머리를 들면 지나가던 바람이 손을 내밉니다.
바람에게 손을 맡기는 순간,
박주가리의 씨앗은 하늘로 둥실 날아오릅니다.
오호, 그 순간, 푸른 하늘을 마음껏 호흡할 수 있습니다.
바람과 햇볕이 깨워주고,
일어나면 푸른 호흡으로 날아갈 수 있는 박주가리 씨앗의 잠,
향기는 없어도 좋으니 잠은 그렇게 자고, 또 그렇게 일어나고 싶습니다.

알고보면 매일매일 아침마다 햇볕과 바람이 찾아와
내가 자는 방의 바깥에서 나의 잠을 깨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밥먹으라는 소리에 잠이 깰 때까지
계속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였는지도 모릅니다.
난 박주가리 씨앗이었는데,
내 스스로를 사과 씨앗의 운명 속에 방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올해는 햇볕과 바람이 내 잠을 깨워주는 하루하루를 맞고 싶습니다.
바람이 내미는 손을 맞잡고 일어나면
나의 하루하루도 푸른 호흡으로 시작될 것 같습니다.

Photo by Kim Dong Won
2006년 12월 31일 미사리 한강변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박주가리 씨앗)

20 thoughts on “박주가리 씨앗의 잠

  1. 그 씨앗이 박주가리였구나. 이름 참 특이하네.
    씨앗이 어린아이 볼보다 더 부드럽고, 우유빛보다 더 하얀 우유빛이더군.

    이제 새해를 맞이했네.
    어찌보면 시간은 그냥 계속 흐르고 있는데 내가 맞이하면
    그 시간이 내 것이 되어주는 것 같아.
    이렇게 깨어있으면서 새해를 맞이하고,
    그리고 그 시간을 이렇게 호흡할 수 있어 참 기뻐.

    올해는 글도 많이 쓰고 사진도 많이 찍고 여행도 많이 다니자.

    1. 자유로우려면 프리덤을 쓰면 되는디…ㅎㅎ
      그래서 당신은 자유롭지 못한거야. 그걸 못쓰기 때문에… ㅋㅋ

      당신의 자유가 꼭 내 손 안에 있는 것 같어.
      “당신은 이제부터 자유인으로 인정합니다~” ㅎㅎ

    2. 삼천포 없어졌다…ㅋㅋ

      당신의 망명지대였던 나…. 당신은 나의 망명지대였다우.
      당신은 자유로울 수 밖에 없어.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자유로운 사람이야.
      그리고 난 여전히 당신의 망명지대로 살거구.
      또한 여전히 당신의 유일한 구속자이며 유일한 망명지대로 살거야. 그리고 당신 자유 안에서 나두 자유로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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