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9일이었다.
나는 11시쯤 집을 나가 강변의 동서울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행선지를 쏘아보고 있었다.
돈이 별로 없어서 멀리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내가 몸을 실은 것은 춘천행 버스였다.
버스는 1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춘천에 나를 내려주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공지천까지 걸어갔으며,
그곳에서 소양2교까지 또 걸어가고,
다리를 건넌 뒤엔 버스 터미널의 행선지들을 또 쏘아보다가
소양댐 가는 시내 버스에 또 몸을 실었다.
그때의 사진들을 보면 춘천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내가 남겨놓은 메모는
그 인상을 별로라고 정리해놓고 있었다.
나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 것은
의암호 옆에 버티고 선 거대한 적전비,
소양댐에서 맞닥뜨린 육영수 송덕비(정확히는 송덕비가 아니라 방문 기념비)였다.
메모는 한 시대가 우리의 정신에 뿌린 레드 컴플렉스의 마약과 군사정권의 그림자가 참 깊고도 깊다고 적어놓고 있었다.
한해란 알고 보면 지척의 과거인데
그래도 한해 전엔 내가 지금보다는 더 젊었었나 보다.
전적비와 송덕비, 그 둘 모두 사진이 없다.
늦가을만 카메라에 담았던 그 고집을 보고 있노라니
그때가 그래도 올해보다 젊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잎은 나무의 것이다.
거의 한해 내내 그렇다.
그러나 나무는 주기적으로 제 것을 모두 내놓고 알몸이 된다.
그때면 느낌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앙상하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무가 한해내내 갖고 있던 그의 소유를
모두 벗어버렸다는 것이다.
제 것을 모두 내놓고 소유를 벗으면
앙상한 알몸으로도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닐까.
가을 나무가 그렇게 상념으로 번진다.
11월의 날씨는 쌀쌀하다.
그러나 변색된 잔디에 몸을 누인 단풍의 진홍빛은
그 쌀쌀함을 따뜻하게 무마한다.
나아가 셋이 몸을 부비며 체온을 합치면
그 따뜻함은 더더욱 상승기류를 탄다.
가위, 바위, 보!
근데, 이상해.
우리는 왜 매일 보만 내는 거지.
배를 훌렁 드러내고 즐기는 배들의 늦가을 일광욕.
줄타기 인생.
햇볕과 바람에 흔들리며 몸을 말려,
아니, 햇볕과 바람으로 몸을 속속들이 채워
당신의 뱃속으로 간다.
그러니 당신은 알고 보면
시레기국이 아니라
가을 햇볕과 바람을 들이키는 셈이다.
세상을 노랗게 칠할 거야.
공지천변의 사색.
근데 어느 화장실에 사색을 너무 하면 사색이 된다고 적혀 있던데…
하늘을 날 때
새의 날개죽지는 땀에 촉촉이 젖어 있다는데
물에 둥둥 떠있을 때
오리의 물갈퀴는 정신없이 물을 휘저으며 바쁜 것일까.
가을을 낚다
공지천변에서 마주보이는 상중도의 늦가을.
가을은 색으로 오고,
늦가을은 그 색을 데려간다.
늦가을이 색을 데려가고 나면
그 자리는 하늘과 바람의 차지가 된다.
다리로만 남은 세월
버림받은 몸.
몸의 한쪽으로 선명한 그 선홍빛의 자국으로 보아
쫓겨난 것이 분명하다.
돌고 돌아가는 길.
소양강 댐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하지만 이 풍경은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올해 이곳의 나무들을 밀어버리고
주차장을 만들고 있었다.
한해 전에 내가 이곳을 걸어갔다는 것이
무척이나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붉은 파도
2 thoughts on “춘천, 한해 만에 꺼내본 그 늦가을의 추억”
이날 무지 걸었던 생각이 나네요.
정말 젊었던지. 택시도 전혀 안타고.
가을 단풍은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
올해도 그걸 좀 찍어야 하는데…
저도 가을만 고집하는데 젊은건가요?^^
올 가을엔 정말 가을풍경 많이 많이 찍어두고 싶어요.
그중 나은것으로 큰 액자도 만들어 가을수채화처럼
컴앞에 걸어두고도 싶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