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으로 들어가 문으로 산을 나오다 – 계룡산 산행

2월 10일 토요일,
그녀와 함께 버스타고 계룡산에 다녀왔다.
17년전 신록이 우거진 5월에,
그때도 그녀와 함께 계룡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같았으면 그 길의 풍경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을 텐데
그때만 해도 그 길의 풍경보다 서로에게 눈이 멀어
그저 어디를 가도 풍경은 아랑곳없고
홀린 듯 서로를 쳐다보기에 급급했던 시절이었다.
오래 같이 살다보니 이제는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그때는 동학사에서 산을 넘어 갑사로 갔는데
이번에는 갑사에서 산을 넘어 동학사로 갔다.

Photo by Kim Dong Won

공주로 가서, 논산가는 버스로 바꾸어 타고, 계룡에서 내렸다.
그곳에서 다시 시내버스로 바꿔타고 갑사로 갔다.
갑사가 종점.
동서울에서 공주가는 버스비 7700원,
계룡까지의 버스비 1200원, 시내버스비는 1100원,
산에 오르기 전에 6000원짜리 산채비빔밥으로 점심먹었다.
“정말 산채로 비벼 주는 거겠지?”
밥먹기 전에 또 버릇처럼 실없는 소리를 한마디 했다.
밥상에 오른 냉이맛 속에서 봄이 벌써 파릇파릇했다.
밥먹고 갑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들이 얼기설기 길 위의 하늘에 얽혀 있었다.
길의 느낌이 아주 좋았다.
산으로 오르는 길과 절로 가는 길이 겹쳐있었다.
문을 열고 산으로 드는 느낌이었다.

Photo by Kim Dong Won

17년전 갑사의 기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거의 모두가 새건물 같았다.
원래 그 자리를 지켰을 나무들은 그 깊은 연륜을
하늘로 솟은 높다른 키와 무성한 나뭇가지로 보여주고 있었다.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 분명했지만
그 새로움을 나무의 오랜 세월이 그윽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절 뒤켠의 나무 한그루는 온통 구멍 투성이었다.
딱따구리의 소행이 분명하다.
나무는 그 속에 맛있는 벌레들을 품고 있다.
딱따구리는 나무를 보면
그 속에 맛있는 벌레를 품은 나무를 한눈에 알아보는가 보다.
나무에 달라붙어선 벌레를 내놓으라고 딱딱거렸을 것이다.
나무는 딱따구리에게 벌레를 내주고 숭숭 구멍이 뚫렸다.
절집의 뒤켠에 살아서 그런지
나무는 배가 고픈 딱따구리에게 보시하듯 제 몸을 내주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절을 뒤로 하고
갑사에서 연천봉으로 가는 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중간까지는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올라가는데 계곡물은 내려간다.
물은 어떤 곳에선 마음이 급한 듯 종종걸음이지만
어떤 곳에선 한참 쉬었다 가기도 한다.
우리도 가다 쉬다 하면서 산을 올랐다.

Photo by Kim Dong Won

물이 흘러가다 잠시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웅덩이엔 물이 담기고
그 물엔 다시 나무 그림자와 하늘의 햇볕이 담겼다.
올려다 볼 때는 하늘이 높기만 한데
웅덩이에 담긴 하늘은 깊기만 하다.
손넣으면 내 손에 하늘과 나무가 시리도록 차갑게 물들까.

Photo by Kim Dong Won

나무가 자욱한 길이다.
오전내내 안개가 하얗더니만
시간이 오후로 들어서자 안개가 슬슬 걸음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라가면
나무들은 우리 아래쪽으로 밀리면서
산아래쪽으로 내려선다.
내가 올라가면
그 덕에 나무는 산아래쪽으로 서볼 수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어디서나 애정 행각은 말릴 수가 없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이 나무는 옭아매듯 서로를 부등켜 안았다.
끔찍이도 좋았나 보다.

Photo by Kim Dong Won

처음 오른 봉우리는 연천봉.
해발 739m의 높이에서 해지는 쪽으로 산들을 내려보았다.
꼭대기 바로 아래쪽 턱밑에 암자가 있다.

Photo by Kim Dong Won

연천봉에 올랐다가 내려와 관음봉으로 향했다.
정상의 표석은 그곳의 높이가 816m라고 일러주었다.
구름이 그 위로 걸쳐있었다.
구름은 그다지 높이에 연연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높은 곳에 오르니 마음을 구름에 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높은 곳에 오르는 건가.
마음을 구름에 실어 볼려고.
그렇게 구름에 마음을 실어보내고 나면
가장 낮은 곳에 살아도 높이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기에
힘들어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높은 산에 오르려 하는 건가.
구름을 보고 있노라니 그럴 것도 같았다.

Photo by Kim Dong Won

관음봉에서 은선폭포 쪽으로 길을 잡았다.
동학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길을 내려서자 너덜바위 구간의 바위들이 온통 물에 젖어있다.
어제 비가 왔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쌀쌀한 냉기가 몸을 파고들었다.
바위엔 고드름이 잡혀있었고,
고드름이 뚝뚝 물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이끼들이 그 물방울을 받아 먹고 있었다.
달콤할 것 같았다.

Photo by Kim Dong Won


멀리 산골짜기 아래쪽으로 동학사가 보인다.
이 길이 예전에 계룡산을 올랐을 때의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17년만에 찾은 계룡산에서 옛 기억은
갑사는 물론이고 산의 어디에서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냥 옛날에 집착하지 말고 오늘의 산을 즐기다 가라고 산이 말했다.

Photo by Kim Dong Won

은선폭포로 내려가는 길에
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대신 돌들이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Photo by Kim Dong Won

은선폭포이다.
17년전 계룡산을 오를 때 폭포 하나를 보았던 기억은 분명히 남아있다.
폭포 이름을 분명하게 챙겨두지 않아 확신은 서지 않았지만
그 폭포인 것 같았다.
물줄기가 빠른 속도로 절벽을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절벽 아래쪽엔 물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내려가는 대로 모두 땅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계곡이 어지간히 목이 말랐나 보다.

Photo by Kim Dong Won

동학사까지 내려오니
지는 해가 저녁 햇볕을 절앞의 산봉우리에
환하게 걸어놓고 있다.
지금 산의 저녁은 눈부실 것이다.

Photo by Kim Dong Won

갑사의 문으로 들어가
동학사의 문으로 산을 나왔다.
문으로 들어가 문으로 산을 나왔다.

문을 나오니 그때부터 또 돈이다.
유성까지 버스비 1500원,
유성에서 동서울까지 버스비 9200원 들었다.
산에 있을 때가 좋았다.

9 thoughts on “문으로 들어가 문으로 산을 나오다 – 계룡산 산행

  1. 관음봉이라고 쓴 글자가 있는 돌비석 사진이 제일 마음에 와 닿습니다.
    꼭 그 돌비석의 파란 하늘 넘어에는 아름다운 꿈이 펼쳐지는 샹그릴라가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자연은 언제나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1. 오전에는 정말 안개가 심했는데
      오후에는 하늘이 파랗더군요.
      그래도 그다지 맑은 날은 아니었어요.
      언제 기회가 되면 한국에 나오셨을 때 설악산에 한번 가보세요.
      힘들긴 한데 정말 좋아요.

  2. 지금은 열심히 일하고 이스트맨님 연배가 되면 저도 블로그에 염장사진 마구마구 올릴꼬야요!!!
    ㅠ_ㅠ ===3=333

    1. 당연히 그러셔야죠.
      근데 내 나이대까지 기다리진 마세요.
      그냥 틈만 나면 내빼는 재미가 정말 좋거든요.

      저도 원고가 세 개 정도 겹쳐 있는데 책상 앞에 앉아있는다고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떠났어요.

      지금까지 일한 걸로도 충분한 당신, 떠나라. 그 다음은 나중에 걱정하시고.

  3. 갑사 들어갈 때 입장료 낸 거 빼먹었다..ㅎㅎ

    사진 좋고, 글 좋고…
    예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소들이 없는 것 같더라.
    참 세월 빠르네…
    나무나 돌들도 세월을 느낄까…

    1. 갑사 입장료 2000원.

      나무나 돌은 우리가 기억하는 한에서 세월을 느끼지 않을까.
      우리 기억이 흐릿해지면 나무의 세월도 흐릿해 질 것 같아.

  4. 핑백: fore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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