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느 마을에나 있던 성황당엔 꼭 오래된 고목이 몇 그루씩있었다.
사람들은 그 나무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복을 빌었다.
현대적 교육으로 무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그것은 모두가 한시바삐 털어내야할 나쁜 미신이었다.
이번 10월 15일 토요일에 한계령에서 시작하여 설악산을 오르면서 정말 많은 나무를 만났다.
그 나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정령들의 거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날 홀로 산을 올랐다고 해도 나는 쓸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무의 정령과 얘기 나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성황당이 나쁜 미신이 아니라
우리가 받았던 옛교육이 나쁜 교육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날, 설악산의 나무들을 이야기로 옮겨본다.
어떤 나무는 꼿꼿하게 자란다.
꼿꼿한 나무는 바람이 불면 그에 결연히 맞선다.
그러다 부러지기도 한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강한 의지가 필요할 때가 있다.
어떤 나무는 바람이 부는 대로 자란다.
바람은 그 나무의 흥이다.
바람과 손잡고 허리를 휘며 몸을 맡긴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흥이 필요할 때가 있다.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면서 나무는 듬직함을 갖추기 시작한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도 나이들면 그런 듬직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역시 나이들어가면서 얻게 되는 연륜의 가장 큰 미덕은
속을 비울 줄 알게 된다는 점인 듯하다.
오래된 고목은 거의 예외없이 속을 비운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도 그렇게 자신을 비워야할 때가 있다.
사람들은 하늘의 푸른빛이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설악산을 오르다 보면
종종 나뭇잎을 떨군 가지가 실핏줄처럼 하늘로 번진 것을 볼 수 있다.
대지의 저 깊은 곳에서 푸른 물줄기를 길어올리면
그것이 처음엔 초록 이파리가 되며,
그 이파리가 지상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때부터는 하늘의 푸른빛이 된다.
우리가 부모님의 푸른 젊음을 쪽쪽 빨아먹고 성장하여 젊은이가 되듯
나무도 제 푸름을 하늘에 주고
저는 회색빛 마른 둥치로 말라간다.
그러나 자식이 앗아간 젊음이 늙은 나무의 슬픔은 아니다.
잘큰 자식은 늙은 나무의 무한한 기쁨이다.
그때면 나무는 춤을 춘다.
산지사방으로 팔을 벌리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제 흥에 겨워 혼자만 춤을 추는 것은 아니다.
둘이 얽혀 트위스트를 추기도 한다.
춤 앞에 박수와 환호가 빠질 수 없다.
어떤 나무는 가지 끝의 이파리를 바람으로 요란하게 흔들어 나무들의 춤에 환호를 보낸다.
아울러 나무의 박수와 환호는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산을 오르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 산이 설악산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발이 무거워질 때쯤 하늘을 한번 올려보고
그때 바람이 가지 끝의 이파리를 요란하게 흔들고 지나가면
그 순간의 나뭇잎 소리를
그곳까지 올라온 자신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 인사로 여기시라.
더더구나 가을에는 한여름내 초록 일색이던 그 환호가
노랗고 붉은 환호로 더욱 화려해진다.
분명 다리의 힘이 솟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나무는 우리를 사랑으로 맞아준다.
나무가 분명하게 하트를 만들어 우리 앞에 내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설악을 오르면 나무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
2 thoughts on “설악산의 나무들”
사진도 좋지만 역시 글이 너무 좋아요.
시인+소설가+동화작가까지 모두 가능하실듯.^^
가끔 생각하던게 김동원님 글에 있네요.
‘우리가 부모님의 푸른 젊음을 쪽쪽 빨아먹고 성장하여 젊은이가 되듯..’
전 제가 그런줄 몰랐었죠.
제가 아이를 낳아보고 아이 한명 나을때마다 제 젊음과
아름다움을 모두 아이에게 나눠주고 전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되어간다는걸 깨달았을때 저또한 부모님에게 그런 존재였구나 싶었어요.
물론 부모님께선 “너때문에 내가 이렇게 늙었다”식의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그렇지만 세월앞에 장사없다고 아무리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아이도 낳아보지 않은 여자라해도 나이들면 아름다움은 꽃이 시들어 말라버린것처럼 시들게 되니까요. 횡설수설이네요.^^
한라산을 오를 때는 산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번 설악산은 특히 나무가 자주 눈에 들어왔어요.
다음에는 그 힘겹다는 공룡능선 쪽으로 오르며 사진을 한번 찍고 싶어요.
한번 갔다 와서 설악산을 너무 울궈먹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너무 좋았던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