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물에 대한 단상

Photo by Kim Dong Won

몇달전부터 화장실에서 쉬익하는 바람빠지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소리는 최근에 들어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소리의 진원지로 벽을 지목했다.
그녀가 귀를 대고 탐문을 한 그 벽은 수도관이 지나는 길목이었다.
그녀는 수도관에 구멍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럴리가 있냐고 했다.
나는 변기 뒤쪽의 물통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라고 우겼다.
이번에는 우기는데 장사없다는 속담이 맞는 말이 되고 말았다.

10월 15일날 나는 새벽 5시에 잠에서 깼다.
그날 나는 동서울 터미널에 나가 한계령가는 첫차를 타고
설악산에 가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아직도 눈가에 두텁게 내려앉아 있는 잠을 부비며 화장실에 앉아있는데,
세상의 소음이 조용히 숨을 죽인 밤인지라
그날따라 바람빠지는 소리가 더욱 요란하고 선명했다.
그때 내 눈에 화장실 바닥에 약간 내비친 물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왠 물이지. 이 새벽에.
눈을 가까이 가져가니 소리가 귓전으로 선명하게 파고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수도관에 구멍이 난 것이었고,
그곳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그 사태 앞에서 내가 한 일이라곤 그녀를 불러
“여기서 물이 새네. 오늘 사람불러서 고쳐”라고 한마디 일러준 것 뿐이었다.
나는 물이 터진 화장실을 그녀에게 맞겨놓고는 그 길로 설악산으로 날라 버렸다.

사는 집이 오래되고 낡은 단독주택이다 보니까,
몇년에 한번씩 수리를 해야 한다.
첫번째 수리는 처음 이 집을 샀을 때, 대대적으로 도배를 한 것이었다.
그때의 벽지는 지금도 깨끗하다. 물론 내 기준이긴 하지만.
두번째 수리는 지붕에서 물이 새서 대대적으로 지붕을 수리한 것이었다.
비가 심하게 올 때는 그릇을 한 서너 개 갖다 놓아야 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집이 낡은 것은 그런대로 참을만 하지만 비가 새는 집은 참으로 처량하다.
집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바깥에 서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녀는 맑은 날도 매일 빗물이 새는 악몽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우리 바로 앞집이 헌집을 헐고 새로 지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지붕을 고쳤다.
그때 고친 지붕은 지금까지 새지 않고 있다.
그녀의 악몽도 깨끗이 치유되었다.
요즘도 우리는 비가 억수로 퍼붓는 날이면
둘다 밖을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이 된다.

세번째 수리는 이번에 터진 수도 때문에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수도관이 너무 낡아 전체를 교체하기 전에는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고 한다.
설악산에 갔다가 밤늦게 들어와 보니 집안이 공사판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3일 동안 수리를 한 끝에 1층과 2층의 화장실이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을 했으며,
수도물이 말 그대로 어디서나 펑펑 나오게 되었다.

이 집으로 이사를 와서 수도물이 이렇게 펑펑 나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우리 집의 수도물은 항상 쫄쫄 거렸다.
우리는 수도물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집안의 어디에선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설겆이를 하다가 수도꼭지가 그 시원찾은 물줄기를 후루룩 도로 삼켜 버리면
그녀는 나나 우리 딸이 화장실에서 물을 내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다 물을 틀었는데 물이 안나오면,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물을 틀어놓고 잊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집안을 둘러보면 누군가 잠그는 것을 잊어먹은 수도꼭지 하나가 분명히 있었다.
때문에 우리 집의 수도꼭지는 단순히 물이 나오는 출구가 아니라
집구석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알려주며
그 비밀을 폭로하는 이중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수도물을 보면 누군가가 방금 어디를 들어갔다 나갔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한번도 동시에 물을 쓸 수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 꼭지를 틀고 물의 흐름을 보면
누군가 그 물 앞에 있거나 방금 물을 스쳐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2층의 싱크대 있을 때는 물의 흐름 만으로
아래층의 움직임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수도를 고치고 난 뒤로 우리는 이제 그 비밀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은 펑펑 쏟아져서 좋긴 한데
물줄기가 세지자 우리집만의 은밀하던 그 비밀까지 쓸려가 버렸다.
그 통에 갑자기 집이 아주 비밀스런 집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제 어쩌랴.
서로의 비밀을 물줄기로 나누어 갖던 그 옛시절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이제는 각자의 비밀을 그 시원한 물줄기 속에 묻어서 지켜주는 수밖에.

화장실을 새롭게 고친다는 얘기를 듣자
진표 아빠 홍순일씨가 수도꼭지를 보내주었다.
사실 수도꼭지를 보내주겠다고 했을 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우리집 화장실에서 그가 보내준 수도꼭지의 품격이 단연 돋보일 것 같아
전체적인 조화가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우리집 화장실이 좀 좁고 누추합니다만
그러나 수도꼭지 하나만큼은 품격이 남다릅니다.
이게 홍순일이라고 내가 아는 사람이 선물한 겁니다.
아마 수도꼭지를 선물받은 사람은 있어도
저처럼 품격을 선물받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렇게 버젓이 대놓고 남들에게 자랑을 하면
말하는 나나, 듣는 사람이나 한순간이 아주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순일씨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다.
수도꼭지도 고맙고,
수도꼭지로 인하여 누리게 된 또다른 즐거움도 고맙고.

Photo by Kim Dong Won

8 thoughts on “수도물에 대한 단상

  1. 형님의 그 배짱은 언제나 저를 유쾌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저 역시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은 아내의 몫이라고 굳게 믿고있는 편이라…, 멋진 풍경만이 좋은 글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형님의 삶속에는 모든 것이 이야기 소재인 것 같아요. 좋은 카메라 렌즈보다 더욱 값진 착한 눈을 갖고 계신 털보아저씨가 곁에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2. 저희집이랑은 반대네요.^^
    저흰 꼭 제가 없을때 남편이 뭔가를 수리해놓거나 장만해놓을때가 많거든요.ㅋㅋ
    제가 아기 낳을 달이 가까와질때마다 친정에 미리가서 지내곤했는데 아기낳고 집에와보면 도배가 되어있거나 장판이 새로 깔려있거나 식탁이 바뀌어있거나 밥솥이 바뀌어있거나 했거든요.^^
    물론 저에게 전화로 알려주구요.
    저도 가끔은 남편없을때 뭔가 지저분하고 걸리적 거리는일을
    해결해 버렸을때 더 큰 성취감을 느끼기도하구요.^^
    아마 상대에 대한 따뜻한 배려심 아닐까 생각되네요.

    1. 그러니까 가을소리님은 좋은 남편과 같이 사는 것이고, 저는 좋은 아내랑 같이 산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좋은 남편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로 같이 살려면 많은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남편도 있답니다. 아내가 저에게 열을 배려한다면 제가 아내에게 하는 배려는 단 하나에 불과하죠. 어떻게 보면 완전 불공정 거래죠. 저는 그 불공정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어요. 원래 사랑에 공정한 거래란 있을 수 없는 거니까요. 공정한 거래는 장사를 할 때나 통용되는 거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 남편께서 가을소리님에게 그렇게 해주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가을소리님을 무지무지 사랑할 테니까요.

  3. 산으로 가시면서 오늘 사람 불러서 고쳐 놓으라 하신 대목에서 피식~ 웃었습니다.^^ 단지 시간이 없어 그러셨는지, 아니면 수도배관 같은 거 고치는 데 기계치라 그러셨는지,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후자에 가깝거든요.^^

    1.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대목에선 설악산으로 날라버린 저를 이해를 해주지 않습니다. 설악산이야 다음에 갈 수도 있는 것이고, 보통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진을 찍으러 가는 길이 아니고 그냥 단풍 구경에 불과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말 한마디 남겨놓고는 설악산으로 훌쩍 떠났다는게 이해가 가질 않는 거죠. 보통은 그 경우 설악산 일정을 취소한 뒤에 사람을 부르고 집수리하는 것을 직접 돕게 되죠. 아무리 사람을 부른다고 해도 이것저것 치워주어야 할 것도 많고 아내가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좀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거든요. 결국 제 얘기의 초점은 그 많은 일을 모두 아내에게 맡겨놓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떠나버렸다는 것이죠. 더더욱 심각한 것은 갔다와서는 공사판으로 변해버린 집안을 보며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설악산가길 정말 잘했네”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보통 이런 경우엔 세상의 모든 아내가 저같은 사람과 함께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아내가 그런 나를 데리고 그래도 살 수 있는 것은 “야, 너 오늘 설악산 갔다오길 정말 잘했어. 이 집안 꼴좀 봐”라고 생각해주기 때문이죠. 우리집의 특수한 구조라고나 할까요. 원래 지금사는 집으로 이사를 올 때는 집사람이 이사를 한 뒤에 저는 그날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원고를 쓰다가 저녁늦게 주소를 보며 우리 집을 찾아왔었죠. 불가사의한 것은 그래도 우리 둘이 그럭저럭 잘살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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